산하의 오역
1802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 태어나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바탕 ‘대선 멘붕 힐링 무비’로서 극장가를 쓸고 지나간 후 ‘레미제라블’의 완역본이 서점에서 각광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802년 2월 26일 그는 나폴레옹이 아직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과 왕당파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조합인데? 하고 갸우뚱할 필요 없다. 바로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의 출신성분이니까. 아버지는 아들 빅토르가 자신의 뒤를 잇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 아들은 나이 열 네 살 때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샤토브리앙은 그 작품보다는 그가 즐겨먹은 스테이크 이름으로 유명하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라고 들어나 봤나)
빅토르 위고는 그가 꿈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작가가 될 운명이었다. 원래는 왕당파적 성향이 있었지만 부르봉 왕조 최후의 왕인 샤를 10세의 정부에 의해 희곡 대본을 검열받고 무대 공연이 금지되자 점차 자유주의적인 쪽으로 그 성향이 변해 간다. 프랑스 자체도 격변이었다. 그가 ‘파리 드 노트르담’ 즉 노틀담의 꼽추를 쓸 때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불을 뿜어 부르봉 왕조가 막을 내렸고 ‘시민의 왕’ 루이 필립이 왕이 됐다. 후일 레미제라블의 주요 무대가 되는 이 1830년대에 위고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는데 그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의 애인이자 숭배자가 되는 여배우 줄리엣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서였다. 줄리엣은 이후 50년이 넘도록 위고의 반려자가 됐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위고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위고의 아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도 바람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위고가 바람만 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일으킨 봉기, 1832년 6월 봉기의 현장 근처에서 그 처참한 모습을 지켜 본다. 그가 열심히 희곡을 쓰고 있을 때 총소리가 난무했고 잠시 뒤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걸레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젊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신이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봉기가 끝난 후 아낙네들이 그 핏자국을 지우며 “그들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 텐데”는 어쩌면 그 현장에서 위고가 중얼거린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기획된 것은 1840년이었고 그로부터 위고는 근 20년 동안에 걸쳐 기획하고 저술하고 수정하고 다듬는다. 혁명과 반동, 전쟁과 폭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짓밟히고 외면되고 저버려졌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선인과 악인들의 파노라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개를 형성하고 뼈대를 갖춰 가게 된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위고의 코멘트 하나. “단테가 시로써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쩌면 <레미제라블>이 국적과 세월을 넘어 각광받는 이유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 지옥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굶어죽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야 하는 지옥, 그 지옥 앞에서 “자기 빵을 도둑 맞는 빵집 주인의 공포”를 걱정해야 한다고 우기는 어느 나라 일등신문의 칼럼이 칼춤을 추는 지옥.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고상한 문체와 어휘를 버렸다. 그래서 후일 작품이 완성된 후 사실주의 소설가 플로베르 등에 의해 저속하고 부정확한 단어를 썼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굳이 비교가 가능하다면 <태백산맥>의 그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번역도 없이!) 감당해야 했던 난감함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1848년 또 한 번의 혁명인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건설될 무렵에도 위고는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한림원 의원으로, 학파의 거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밀었고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공화국 대통령의 첫 손님으로서 위고는 의기양양 대통령궁 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강남 좌파’ 같은 형국이었고 그래서 욕도 여실히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 ‘대 나폴레옹의 작은 조카’가 공화정 정신을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흉내내 황제가 됐을 때 위고는 격노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온 귀족으로서, 한림원 의원으로서의 고상한 신분을 내던지고 펜 대신 삽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는데 가담했고 시민들의 저항을 호소하며 거리를 누볐다. 누군가 위고에게 “(선동) 팜플렛을 써야 할 때입니다”라고 하자 위고는 다음과 같은 명답을 남긴다. “아니오! 지금은 무기를 들어야 할 때요!” (“캐비어 좌파의 역사” 양영란 옮김, 워드앤코드) 나이 쉰에 이른 위고는 그의 소설 속 마리우스가 되어 시가전에 나선다. 국회의원도 픽픽 총에 맞아 나가 떨어지는 긴박함 속에서 그는 구사일생을 경험한다. 그를 구한 것은 장발장이 아니라 그의 평생의 애인 줄리엣이었다고 한다.
그는 추방되어 영국령 건지 섬에 머무르며 계속 글을 쓴다. 줄리엣과 함께 있으면서도 쥴리엣의 하녀들까지 자신의 여자로 삼는 왕성한 바람둥이 기질을 발휘하면서 그는 19년 감옥 생활을 한 장발장을 창조했고, 쥴리엣으로부터 코제트의 이미지를 완성시켰고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비감하게 끝난 1832년의 폭동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우스와 앙졸라의 폭동 30년 만에 (1862) 레미제라블을 완성했다. 그 전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빈곤한 생활에 의한 남자의 추락, 굶주림에 의한 여자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들의 쇠약이라는 현대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 작품과 같은 책도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지로 그의 <레미제라블>은 “이상한 운명과 싸우고 괴로움을 견디어 낸 위대한 사람” (장발장 묘비문)들의 희로애락과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그를 옥죄는 역사의 칡넝쿨을 절묘하게 묘사해 인류 문화사의 보물로 남게 된다.
1871년 파리 코뮨에서 그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호화롭게 살았던 그의 과거보다는 레미제라블의 작가답게 파리 코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좀 이견이 있긴 하지만)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열렬한 왕정주의자로서 전제 정치의 신봉자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점차 그는 조금씩 변하여 1848년에는 마침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단명했던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 그는 위고를 공화주의자라 하여 국외로 추방했다. 1871년에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뮨을 지지했다. 보수파의 최우익에서 그는 서서히, 더구나 견실하게 사회주의 좌익으로 옮겨갔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 반동으로 변하는데 위고는 정반대였다.”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레미제라블을 썼지만 역으로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이 빅토르 위고라는 예술가의 위대성은 더욱 커져 간 것은 아닌지.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나이 들면 이상해지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노.
1802년 2월 26일 빅토르 위고 태어나다.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한바탕 ‘대선 멘붕 힐링 무비’로서 극장가를 쓸고 지나간 후 ‘레미제라블’의 완역본이 서점에서 각광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1802년 2월 26일 그는 나폴레옹이 아직은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과 왕당파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조합인데? 하고 갸우뚱할 필요 없다. 바로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코제트의 연인 마리우스의 출신성분이니까. 아버지는 아들 빅토르가 자신의 뒤를 잇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이 아들은 나이 열 네 살 때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외교관인 샤토브리앙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문학청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샤토브리앙은 그 작품보다는 그가 즐겨먹은 스테이크 이름으로 유명하다. 샤토브리앙 스테이크라고 들어나 봤나)
빅토르 위고는 그가 꿈꾼 사람보다 더 위대한 작가가 될 운명이었다. 원래는 왕당파적 성향이 있었지만 부르봉 왕조 최후의 왕인 샤를 10세의 정부에 의해 희곡 대본을 검열받고 무대 공연이 금지되자 점차 자유주의적인 쪽으로 그 성향이 변해 간다. 프랑스 자체도 격변이었다. 그가 ‘파리 드 노트르담’ 즉 노틀담의 꼽추를 쓸 때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불을 뿜어 부르봉 왕조가 막을 내렸고 ‘시민의 왕’ 루이 필립이 왕이 됐다. 후일 레미제라블의 주요 무대가 되는 이 1830년대에 위고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는데 그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의 애인이자 숭배자가 되는 여배우 줄리엣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서였다. 줄리엣은 이후 50년이 넘도록 위고의 반려자가 됐으며 심지어 말년에는 위고의 가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위고의 아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도 바람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으니까.
위고가 바람만 피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리우스와 앙졸라가 일으킨 봉기, 1832년 6월 봉기의 현장 근처에서 그 처참한 모습을 지켜 본다. 그가 열심히 희곡을 쓰고 있을 때 총소리가 난무했고 잠시 뒤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가 본 것은 걸레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젊은 시민과 학생들의 시신이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봉기가 끝난 후 아낙네들이 그 핏자국을 지우며 “그들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을 텐데”는 어쩌면 그 현장에서 위고가 중얼거린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기획된 것은 1840년이었고 그로부터 위고는 근 20년 동안에 걸쳐 기획하고 저술하고 수정하고 다듬는다. 혁명과 반동, 전쟁과 폭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짓밟히고 외면되고 저버려졌지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그 가운데 선인과 악인들의 파노라마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얼개를 형성하고 뼈대를 갖춰 가게 된다. 여기에 대한 적절한 위고의 코멘트 하나. “단테가 시로써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 내려 했다.” 어쩌면 <레미제라블>이 국적과 세월을 넘어 각광받는 이유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 지옥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굶어죽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야 하는 지옥, 그 지옥 앞에서 “자기 빵을 도둑 맞는 빵집 주인의 공포”를 걱정해야 한다고 우기는 어느 나라 일등신문의 칼럼이 칼춤을 추는 지옥.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고상한 문체와 어휘를 버렸다. 그래서 후일 작품이 완성된 후 사실주의 소설가 플로베르 등에 의해 저속하고 부정확한 단어를 썼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굳이 비교가 가능하다면 <태백산맥>의 그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를 (번역도 없이!) 감당해야 했던 난감함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1848년 또 한 번의 혁명인 2월 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건설될 무렵에도 위고는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작가로, 한림원 의원으로, 학파의 거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을 밀었고 그는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공화국 대통령의 첫 손님으로서 위고는 의기양양 대통령궁 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강남 좌파’ 같은 형국이었고 그래서 욕도 여실히 얻어먹었다.
그러나 이 ‘대 나폴레옹의 작은 조카’가 공화정 정신을 부정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삼촌을 흉내내 황제가 됐을 때 위고는 격노한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지탱해온 귀족으로서, 한림원 의원으로서의 고상한 신분을 내던지고 펜 대신 삽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는데 가담했고 시민들의 저항을 호소하며 거리를 누볐다. 누군가 위고에게 “(선동) 팜플렛을 써야 할 때입니다”라고 하자 위고는 다음과 같은 명답을 남긴다. “아니오! 지금은 무기를 들어야 할 때요!” (“캐비어 좌파의 역사” 양영란 옮김, 워드앤코드) 나이 쉰에 이른 위고는 그의 소설 속 마리우스가 되어 시가전에 나선다. 국회의원도 픽픽 총에 맞아 나가 떨어지는 긴박함 속에서 그는 구사일생을 경험한다. 그를 구한 것은 장발장이 아니라 그의 평생의 애인 줄리엣이었다고 한다.
그는 추방되어 영국령 건지 섬에 머무르며 계속 글을 쓴다. 줄리엣과 함께 있으면서도 쥴리엣의 하녀들까지 자신의 여자로 삼는 왕성한 바람둥이 기질을 발휘하면서 그는 19년 감옥 생활을 한 장발장을 창조했고, 쥴리엣으로부터 코제트의 이미지를 완성시켰고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비감하게 끝난 1832년의 폭동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우스와 앙졸라의 폭동 30년 만에 (1862) 레미제라블을 완성했다. 그 전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빈곤한 생활에 의한 남자의 추락, 굶주림에 의한 여자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들의 쇠약이라는 현대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 작품과 같은 책도 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지로 그의 <레미제라블>은 “이상한 운명과 싸우고 괴로움을 견디어 낸 위대한 사람” (장발장 묘비문)들의 희로애락과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그를 옥죄는 역사의 칡넝쿨을 절묘하게 묘사해 인류 문화사의 보물로 남게 된다.
1871년 파리 코뮨에서 그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호화롭게 살았던 그의 과거보다는 레미제라블의 작가답게 파리 코뮨을 지지한다. (여기에는 좀 이견이 있긴 하지만)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는 열렬한 왕정주의자로서 전제 정치의 신봉자라 해도 좋을 정도였으나, 점차 그는 조금씩 변하여 1848년에는 마침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단명했던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자, 그는 위고를 공화주의자라 하여 국외로 추방했다. 1871년에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뮨을 지지했다. 보수파의 최우익에서 그는 서서히, 더구나 견실하게 사회주의 좌익으로 옮겨갔다. 많은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 반동으로 변하는데 위고는 정반대였다.”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레미제라블을 썼지만 역으로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이 빅토르 위고라는 예술가의 위대성은 더욱 커져 간 것은 아닌지.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나이 들면 이상해지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