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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2.27 배정자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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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2년 2월 27일 배정자의 일생 

그녀의 고향은 김해였다. 밀양부의 아전이었던 아버지가 역모 혐의를 쓰고 민씨 척족에게 피살당한 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관비가 돼 끌려갔다.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눈까지 멀었다는 얘기도 있으니 배정자 아니 그때까지는 배분남이라고 불리웠던 여자 아이의 유년 팔자는 참으로 기구했다 하겠다. 이후 절에 맡겨져 통도사에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했지만 이 여자 아이는 절에서 염불 외고 경 읽을 팔자 또한 아니었다. 절에서 뛰쳐나와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동래부사 정병하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개화파 인사로서 일본에 망명와 있던 안경수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김옥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옥균은 총명해 뵈는 이 소녀를 정성껏 도와 주었고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소개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배분남을 숫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먹이고 입히며 가르쳤다. 공부를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이미 이 눈치 빠른 소녀를 밀정으로 써먹을 심산을 굳히고 있었다. 이토가 배분남에게 준 이름이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였고 배정자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만남은 그녀의 일생을 그 누구보다 일본에 충성스러운 조선인으로 규정지었다. 그녀는 김옥균의 밀서를 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일본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국내 진입에 성공하는데 그건 다름아닌 을미사변때 민비 살해에 가담한 군인 우범선 (농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을 암살한 고영근의 신임장을 이용해서였다. 그녀는 화려하게 한양의 상류 사회에 복귀한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화술,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밀정, 즉 정보원으로서 진가를 발휘했던 사례 중의 하나는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행을 저지한 것이다.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은 엄정중립을 수차례에 걸쳐 선언했지만 일본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고 결국 전쟁은 대한제국에서 벌어질 운명이었다. 이에 친러파들은 고종을 평양 내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몽진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배정자에게 “너도 같이 가자꾸나.”라고 얘기를 흘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누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중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 스파이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해 냈다. 

고종 황제에게 이토의 오만방자한 서한을 전달하여 그 일로 노여움을 사 절영도, 오늘날 부산 영도로 귀양보내지기도 했던 배정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의기양양하게 한양으로 돌아오고 을사조약 이후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을 주무를 때 가히 최고의 절정기를 누린다. 그 오빠가 한성판윤 즉 서울시장으로 벼락출세를 할만큼. 그녀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을만큼. 그녀는 철저하게 일본인이 돼 있었고 일본이 동양의 맹주로서 뒤떨어진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본의 믿음에 충실했다. 한일합방이 됐을 때는 몸져 누운 몸으로 만세를 불렀던 것은 그 일례일 뿐일 것이다. 

이토가 죽은 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헌병 사령관 아카시였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출병하는 일본군에 배정자를 파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미모와 화술로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 와중에 마적의 포로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마적 두목과 동거하면서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니 스파이로 치면 정말 대단한 능력의 보유자였다. 그 뒤에는 만주 일본 공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인들의 동태를 사찰하고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 공으로 그녀는 ‘중추원 참의’에까지 오른다. 그녀는 정말로 ‘몸과 마음을 바친’ 친일파였다. 아니 그냥 일본인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적의 자식으로 관비가 됐다가 기생으로 팔려갔다가 여승이 됐다가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조선 땅을 떠나 이국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여자에게 민족 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조선이란 멸시와 천대의 눈길과 퀴퀴한 냄새와 남루한 입성의 사람들로 기억되는 ‘저주 받은 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수 명의 남편을 갈아치우고 애인이 끊일 때가 없었으며 밀정 노릇에서 은퇴할 환갑 바라보는 나이에도 30년 연하의 애인을 두고 있었던 이 에너지 넘치는 여자에게 조선은 과연 어떻게 비쳐졌으며 일본은 또 어떻게 비쳐졌을까. 무언가를 숭배할수록 그에 반하는 대상에 대한 경멸은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힘이든 신이든 돈이든 외국이든. 아마 배정자도 그랬을 것이다. 

해방이 오고 그녀는 반민특위에 끌려간 여섯 명의 여성 가운데 부동의 1순위였다. 하지만 “일본이 이길 줄 알았다.” (서정주)나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이광수)의 찌질함과는 달리 일본 제국 최고의 밀정 중 하나였던 배정자의 사과는 시원스런 구석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겠습니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후 배정자도 풀려났으나 너무나 밀정 행각이 뚜렷하고 유명했던 그녀는 다른 친일파들처럼 화려하게 부활하지 못했다. 1952년 2월 27일 전쟁의 포화가 여전히 불을 뿜던 가운데의 어느 날, 하필이면 배정자의 여든 두 번째 생일이었던 그날, 배정자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 앞을 스쳐갔을 남자들, 철모를 때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첫남편 전재식, 두 번째 남자 현영운, 마적 두목, 전라도 갑부의 아들 조모, 30년 연하의 순사 등등의 인물들 가운데 그녀가 가장 크게 떠올린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였을 것이다. 그녀의 삶을 실질적으로 규정했던 것은 고국의 누구도 아닌 일본인이었다. 배정자는 스스로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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