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피플 파워
조선 순조 때 제주도에 기이한 외모의 사람들이 표착한다. 150년쯤 전에 조선에 왔다는 박연(벨테브레)와 하멜과는 또 다른,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고 광대뼈는 유난히 튀어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없었다. 제주 목사는 이들을 서울에 보고하고 서울 정부는 으레 하던 대로 청나라에 이들을 보냈다. 그런데 청나라도 귀찮았는지 정말로 몰랐는지 우리도 대관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조선에 되돌려 보냈다. 이 불쌍한 표류민들은 제주에서 요령성 심양까지 수천리 길을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목사도 별 수 없었다. 먹을 것이나 주고 조선말이나 익히라고 할 밖에. 그런데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흑산도 홍어 장사꾼 문순득이었다. 문순득은 놀랍게도 그들과 말이 통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송, 즉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문순득도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까지 흘러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한 파란만장한 사나이였는데 그 와중에 익힌 여송 말을 건네자 이 필리핀 사람들은거의 뒤집어지고 말았다. (문득 문순득이 타갈로그 어를 했는지 스페인 어를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결국 문순득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인들은 국적을 회복(?)했고 임금은 그들에게 여송 송환령을 내린다. 이렇듯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일찍부터 우리와 인연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가 필리핀에서 노예로 팔렸고 가톨릭 성인 김대건 신부가 공부한 곳도 필리핀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필리핀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한국 공무원들의 단골 연수지였고 오늘날 미국 대사관과 문화관광부가 들어앉아 있는 쌍둥이 건물의 설계자였다
하나 더 들자면, 한국 야당의 색깔처럼 돼 있는 노란색 역시 그 유래는 필리핀에서 왔다. 1986년 2월 25일 장기 집권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시킨 20세기의 드라마 필리핀의 피플 파워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던 것이다. 이걸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이 그 상징색을 갖다 썼고 그 이후 ‘황색’은 ‘민주당’ 내지 ‘민주화세력’의 색깔이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2월 25일의 필리핀 혁명은 우리 6월 항쟁의 전주곡과 같은 사건이었다.
왕년에는 열혈 반일 게릴라였던(또는 그렇다고 주장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을 닮았고 두 번 연임한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을 짓밟은 후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은 남한의 박정희를 닮은 그에게 암운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그의 유력한 라이벌이었던 상원의원 베그니노 아키노의 암살부터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 그를 웬 젊은이가 총을 쏘았고 (그렇다고 주장되고) 그 젊은이는 편리하게도 필리핀 보안군에 사살됐다. 아키노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아키노를 누가 죽였는지는 7천만 필리핀 국민들이 다 알고 있었다. ‘마르코스가 니노이 (아키노의 애칭)를 죽였다.’
아키노를 대신한 것은 그 부인 코라손이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투쟁 (lavan)을 뜻하는 손가락 L자 표시와 노란 깃발로 필리핀을 뒤덮었다. 그리고 1986년 운명의 대통령 선거일이 찾아왔다. 마르코스는 왕년에는 필리핀이 한 수 가르쳐 준 나라 남한이 즐겨 저지르던 부정선거를 여지없이 자행했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종료가 아니라 시작이었다. 필리핀 주교 회의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야당은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이때 스타일을 구긴 건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었다. 세계 각국이 필리핀의 추이를 주시하며 마르코스의 당선 축하를 유보하고 있는데 소련은 버젓이 축전을 보냈고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야당도 부정을 했는데 뭘”이라며 어정쩡한 가운데 마르코스 정부에 집착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섰다.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부정선거 무효를 온몸으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라모스 참모총장과 엔릴레 국방장관의 반란이었다. 이들 역시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르코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던 필리핀 군부에서 용기 있는 결단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라모스 참모총장은 한국전쟁 참전자였다. 중공군 고지를 기습하여 70여 명을 죽였지만 필리핀군은 단 한 명도 사상자가 없었던, 이리고지 전투의 수훈자였다. 라모스는 휘하 장교들과 기관단총을 메고 시위대에 합류했고 엔릴레는 군중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마르코스는 마침내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에게 이들에 대한 진압령을 내린다. 엔릴레 측도 단호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마르코스를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월 22일 필리핀의 정신적 지주라 할 하이메 신 추기경이 가톨릭 소유 베리타스 (진리) 방송에 등장했다. “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우리 국민들의 단결과 지지를 위해 아귀날도 병영 (반군의 거점)에 모여 주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두 군인 친구들에게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아귀날도 병영은 하나의 성지가 돼 버렸다. 친 마르코스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했지만 그 앞을 수녀들이 막아섰고 뒤이어 수천 수만 명의 군중이 틀어막았다. 죽음을 무릅쓴 노란색의 물결. 신부들은 설교 대신 연설을 택했고 수녀들은 그 앞에서 성호를 긋고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을 꺾고 누르려던 압제의 우두머리를 마침내 몰아냈다. 1986년 2월 24일. 이 사건은 한국 신문에도 대서특필됐고 “다음은 한국”이라는 암암리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때 5공 정권이 허둥지둥 “한국과 필리핀은 다르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냈지만 분위기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교묘하게 순번을 고른다.
하나 더 추가할 것. 원래 필리핀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공화국의 긍지, 스스로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역사, 동남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높은 국민 교육 수준과 낮은 문맹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강력한 시민 단체, 뿌리 깊은 지방 자치의 전통 등이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에는 빨리 도달했을지 모르나 그를 뒷받침할 사회 경제의 민주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이익 집단이나 계급적, 직업적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 의해 조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 부조 관계를 가진 연결망에 의해 이뤄진다"(미국 정치학자 란데)는 말이나 “의회 의원을 포함한 주요 관직 584개를 소수의 ‘가문’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학자 심블란의 말처럼, 스페인 통치 이래 필리핀을 지배해 온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보호와 후원을 등에 업고, 가문의 지배 하에 있는 식구(?)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고 자기들끼리의 독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기동했으나 그 기동은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부유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나와바리’를 구축하고 그 안의 가난한 유권자들의 ‘대부’가 되고 ‘묻지마’ 지지를 획득하는 순간, 그 민주주의는 상갓집 개도 물다가 뱉을 헝겊 막대가 되고 말았다. 2월 혁명도 그랬다. 민주주의의 적을 타도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올 시스템에 대해서는 필리핀인들이 별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고 할만한 상황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암살당한 베그니노 아키노나 그 아내 코라손 아키노나 대지주 집안이었다.
필리핀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턱도 없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필리핀을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재벌 총수 한 사람을 위해서 행정부 수반이 사면권을 행사하는 어이없는 상황, 삼성에 밉보이면 죽는다는 상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꼬락서니가 필리핀에서 빛나는 가문의 영광의 한 단면같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가난의 대물림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그 고리를 끊는 일이 파천황만큼이나 어렵게 인식되는 사회, 용은 4대 강쯤에서나 나는 것이 당연하고, 한때 오색빛깔 용들이 출몰했던 개천들은 특목고와 자사고와 어린쥐의 열풍 속에 죄다 복개된 나라라면 필리핀으로 가고 있는 정황이 아닐까.
1986년 2월 25일 필리핀 피플 파워
조선 순조 때 제주도에 기이한 외모의 사람들이 표착한다. 150년쯤 전에 조선에 왔다는 박연(벨테브레)와 하멜과는 또 다른, 가무잡잡하고 키가 작고 광대뼈는 유난히 튀어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없었다. 제주 목사는 이들을 서울에 보고하고 서울 정부는 으레 하던 대로 청나라에 이들을 보냈다. 그런데 청나라도 귀찮았는지 정말로 몰랐는지 우리도 대관절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조선에 되돌려 보냈다. 이 불쌍한 표류민들은 제주에서 요령성 심양까지 수천리 길을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야 했다. 제주목사도 별 수 없었다. 먹을 것이나 주고 조선말이나 익히라고 할 밖에. 그런데 그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흑산도 홍어 장사꾼 문순득이었다. 문순득은 놀랍게도 그들과 말이 통했던 것이다. 그들은 여송, 즉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문순득도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까지 흘러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한 파란만장한 사나이였는데 그 와중에 익힌 여송 말을 건네자 이 필리핀 사람들은거의 뒤집어지고 말았다. (문득 문순득이 타갈로그 어를 했는지 스페인 어를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결국 문순득의 도움을 받아 필리핀인들은 국적을 회복(?)했고 임금은 그들에게 여송 송환령을 내린다. 이렇듯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일찍부터 우리와 인연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가운데 상당수가 필리핀에서 노예로 팔렸고 가톨릭 성인 김대건 신부가 공부한 곳도 필리핀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필리핀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한국 공무원들의 단골 연수지였고 오늘날 미국 대사관과 문화관광부가 들어앉아 있는 쌍둥이 건물의 설계자였다
하나 더 들자면, 한국 야당의 색깔처럼 돼 있는 노란색 역시 그 유래는 필리핀에서 왔다. 1986년 2월 25일 장기 집권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시킨 20세기의 드라마 필리핀의 피플 파워의 상징색이 노란색이었던 것이다. 이걸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이 그 상징색을 갖다 썼고 그 이후 ‘황색’은 ‘민주당’ 내지 ‘민주화세력’의 색깔이 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2월 25일의 필리핀 혁명은 우리 6월 항쟁의 전주곡과 같은 사건이었다.
왕년에는 열혈 반일 게릴라였던(또는 그렇다고 주장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을 닮았고 두 번 연임한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을 짓밟은 후 1인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은 남한의 박정희를 닮은 그에게 암운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그의 유력한 라이벌이었던 상원의원 베그니노 아키노의 암살부터다. 비행기에서 내리려는 그를 웬 젊은이가 총을 쏘았고 (그렇다고 주장되고) 그 젊은이는 편리하게도 필리핀 보안군에 사살됐다. 아키노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아키노를 누가 죽였는지는 7천만 필리핀 국민들이 다 알고 있었다. ‘마르코스가 니노이 (아키노의 애칭)를 죽였다.’
아키노를 대신한 것은 그 부인 코라손이었다. 코라손 아키노는 투쟁 (lavan)을 뜻하는 손가락 L자 표시와 노란 깃발로 필리핀을 뒤덮었다. 그리고 1986년 운명의 대통령 선거일이 찾아왔다. 마르코스는 왕년에는 필리핀이 한 수 가르쳐 준 나라 남한이 즐겨 저지르던 부정선거를 여지없이 자행했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종료가 아니라 시작이었다. 필리핀 주교 회의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야당은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이때 스타일을 구긴 건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었다. 세계 각국이 필리핀의 추이를 주시하며 마르코스의 당선 축하를 유보하고 있는데 소련은 버젓이 축전을 보냈고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야당도 부정을 했는데 뭘”이라며 어정쩡한 가운데 마르코스 정부에 집착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어섰다.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부정선거 무효를 온몸으로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라모스 참모총장과 엔릴레 국방장관의 반란이었다. 이들 역시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르코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던 필리핀 군부에서 용기 있는 결단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라모스 참모총장은 한국전쟁 참전자였다. 중공군 고지를 기습하여 70여 명을 죽였지만 필리핀군은 단 한 명도 사상자가 없었던, 이리고지 전투의 수훈자였다. 라모스는 휘하 장교들과 기관단총을 메고 시위대에 합류했고 엔릴레는 군중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마르코스는 마침내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에게 이들에 대한 진압령을 내린다. 엔릴레 측도 단호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마르코스를 최고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월 22일 필리핀의 정신적 지주라 할 하이메 신 추기경이 가톨릭 소유 베리타스 (진리) 방송에 등장했다. “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우리 국민들의 단결과 지지를 위해 아귀날도 병영 (반군의 거점)에 모여 주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사랑스런 두 군인 친구들에게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아귀날도 병영은 하나의 성지가 돼 버렸다. 친 마르코스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출동했지만 그 앞을 수녀들이 막아섰고 뒤이어 수천 수만 명의 군중이 틀어막았다. 죽음을 무릅쓴 노란색의 물결. 신부들은 설교 대신 연설을 택했고 수녀들은 그 앞에서 성호를 긋고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 국민들은 그들을 꺾고 누르려던 압제의 우두머리를 마침내 몰아냈다. 1986년 2월 24일. 이 사건은 한국 신문에도 대서특필됐고 “다음은 한국”이라는 암암리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때 5공 정권이 허둥지둥 “한국과 필리핀은 다르다”는 식의 보도를 내보냈지만 분위기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역사는 그렇게 교묘하게 순번을 고른다.
하나 더 추가할 것. 원래 필리핀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수립된 공화국의 긍지, 스스로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 피 흘린 역사, 동남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높은 국민 교육 수준과 낮은 문맹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강력한 시민 단체, 뿌리 깊은 지방 자치의 전통 등이 그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에는 빨리 도달했을지 모르나 그를 뒷받침할 사회 경제의 민주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핀의 정치 체제는 이익 집단이나 계급적, 직업적으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이 있는 개인들에 의해 조직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상호 부조 관계를 가진 연결망에 의해 이뤄진다"(미국 정치학자 란데)는 말이나 “의회 의원을 포함한 주요 관직 584개를 소수의 ‘가문’이 점유하고 있었다”는 학자 심블란의 말처럼, 스페인 통치 이래 필리핀을 지배해 온 유력 가문들은 가문의 보호와 후원을 등에 업고, 가문의 지배 하에 있는 식구(?)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고 자기들끼리의 독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기동했으나 그 기동은 형식적이었던 것이다. 부유하고 세력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나와바리’를 구축하고 그 안의 가난한 유권자들의 ‘대부’가 되고 ‘묻지마’ 지지를 획득하는 순간, 그 민주주의는 상갓집 개도 물다가 뱉을 헝겊 막대가 되고 말았다. 2월 혁명도 그랬다. 민주주의의 적을 타도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올 시스템에 대해서는 필리핀인들이 별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고 할만한 상황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암살당한 베그니노 아키노나 그 아내 코라손 아키노나 대지주 집안이었다.
필리핀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턱도 없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필리핀을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재벌 총수 한 사람을 위해서 행정부 수반이 사면권을 행사하는 어이없는 상황, 삼성에 밉보이면 죽는다는 상식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꼬락서니가 필리핀에서 빛나는 가문의 영광의 한 단면같이 보이는 건 착각일까. 가난의 대물림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그 고리를 끊는 일이 파천황만큼이나 어렵게 인식되는 사회, 용은 4대 강쯤에서나 나는 것이 당연하고, 한때 오색빛깔 용들이 출몰했던 개천들은 특목고와 자사고와 어린쥐의 열풍 속에 죄다 복개된 나라라면 필리핀으로 가고 있는 정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