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6년 2월 24일 소록도의 비가(悲歌)
조선 태종 때 일본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바칩니다. 근데 이 코끼리는 금새 골칫거리가 됩니다. 먹기는 무지막지하게 먹어대어 떠맡는 관청마다 비명을 질렀고 좀 성이 나면 돌보는 사람을 상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유배됐다고 하는 곳이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인데 이곳은 노루섬, 즉 오늘날의 소록도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녹도’라고 불리우기도 한 이 섬은 녹도만호가 관할했는데 이순신이 아꼈던 유능한 장수 정운이 바로 이 녹도만호였지요. 맑은 바다와 온화한 기후를 낀 조용한 섬이었던 녹도, 즉 소록도에 1916년 2월 24일 뜻밖의 운명이 들이닥칩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빈민 치료 기관을 설립하는데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역시 곳곳에 이 자혜의원을 증설하게 됩니다. 조선 사람이 고와서 그랬다기보다는 식민 통치의 긍정성을 선전하고 또 조선에서 생활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 등도 고려한 정책이었지요. 그 와중에 병의 특성상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판단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격리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물 잘 나고 기후 좋고 육지와도 가까운” 소록도였습니다.
소록도 서쪽 일부에 병원 부지가 정해지자 조선 총독부는 직원들을 보내 주민들의 토지 ‘매입’에 나섭니다. 그 매입 과정이 어떤 식이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협박과 회유에 못이긴 사람들이 나간 터에 1916년 2월 24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그 문을 엽니다. 조선총독부령 7호, 조선 땅에 세워진 19번째 ‘자혜의원’이었지요. 그리고 100여명의 환자들이 육지로부터 끌려오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청준의 두꺼운 장편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보신 분들은 그 섬 곳곳에 배어 있는 울음같은 한숨과 토악질같은 울음,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의 한과 설움이 뱉어낸 피비린내를 느껴 보셨을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짝을 이루려면 단종(斷種) 수술을 받아야 했고 소록도의 영주들로 군림한 일본인 원장들의 횡포에 죽을 고생을 다해야 했지요. 일본인 원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단종 수술대에 오른 환자 이동의 시는 사뭇 눈물겹습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를 방문하게 되면 몇 가지 그 역사와 관련한 볼거리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제 시대 세워진 비석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하나이 젠키치 2대 원장의 창덕비(송덕비)도 그 중의 하나죠. 초대 원장은 환자들에게 일본 옷을 입히고 일본식 생활을 강요한 반면 그는 조선 풍습을 존중하고 환자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습니다.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慰安會)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相助會)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라고 창덕비가 기록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조선인 환자들 사이에서 “하나이 원장은 스스로 한센병의 고통을 모르면 환자를 돌볼 수가 없다 하여 환자들 틈에서 자고 몸을 만졌고 그래도 안되자 환자의 피를 수혈하여 환자가 되어 죽었다.”는 좀 말도 안되는 전설까지 창조할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량한 일본인상은 일제 말기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슈호 마사토같은 사람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죠. 의욕적인 성장 정책(?)으로 환자 정원을 수백 명 단위에서 7천명으로 늘려 놓은 그는 환자들을 중노동에 동원하여 소록도 전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가꿉니다. 정원석으로 쓸 돌을 캐고 건물을 짓는데 손가락도 짓무른 환자들이 닥치는 대로 동원됐고 급기야 슈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하는 망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슈호 원장은 자신의 동상 앞에서 도열한 환자들의 사열을 받다가 한 환자의 칼에 찔립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기에 범인은 칼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쇳덩이에 가까웠던 흉기를 손에 묶고 있었지요. 경북 성주 출신이었다는 이춘상이라는 환자는 이렇게 부르짖었답니다. “너는 환자들에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그렇게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역사는 그런 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해방 이후에도 참혹한 사태는 이어졌습니다. 소록도에는 해방이 늦게 왔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고 풍랑으로 육지와의 연결도 늦어 8월 18일에야 알게 됐죠. 한국인 직원들은 일본인 원장에게 병원 이양을 요구했고 일본인들은 그를 수락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 후 의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과 직원들을 축으로 한 그룹이 병원 운영을 놓고 대립하지요.
여기서 말들이 엇갈리지만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에 따르면 병원 직원들은 병원 물자를 빼돌리려고 했고 의사들이 이 사실을 환자들에게 알리자 주민들이 격분하여 직원들을 습격하게 됩니다. 오재석 등 직원들은 환자주민 대표를 뽑아 협상하자고 한 후 그 명단을 확보해서는 고흥에서 치안대를 불러와서 무려 84명의 환자들을 생으로 죽여 버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환자들이 한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며 “어떤 사람은 총 세 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처넣었다”지요. (한겨레21. 2005.8.31자)해방 1주일 뒤에 벌어진 비극이었죠.
소록도를 몇 년 전 들르긴 했는데 업무적으로 간 거라 단 1시간 섬에 있다가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경치와 분위기에 흐는히 젖었던 기억이 나고, 꼭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거기에 서린 굽이굽이 사연들을 재우쳐 돌이킬 기회를 가지겠노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총독부령 7호로 또 다른 운명을 맞았던 남해안의 작은 섬 소록도는 우리 역사의 파도 속에 감춰진 우리들의 ‘게토’였고 때로는 ‘아우슈비츠’였습니다.
1916년 2월 24일 소록도의 비가(悲歌)
조선 태종 때 일본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바칩니다. 근데 이 코끼리는 금새 골칫거리가 됩니다. 먹기는 무지막지하게 먹어대어 떠맡는 관청마다 비명을 질렀고 좀 성이 나면 돌보는 사람을 상하게 만들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유배됐다고 하는 곳이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인데 이곳은 노루섬, 즉 오늘날의 소록도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녹도’라고 불리우기도 한 이 섬은 녹도만호가 관할했는데 이순신이 아꼈던 유능한 장수 정운이 바로 이 녹도만호였지요. 맑은 바다와 온화한 기후를 낀 조용한 섬이었던 녹도, 즉 소록도에 1916년 2월 24일 뜻밖의 운명이 들이닥칩니다.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빈민 치료 기관을 설립하는데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역시 곳곳에 이 자혜의원을 증설하게 됩니다. 조선 사람이 고와서 그랬다기보다는 식민 통치의 긍정성을 선전하고 또 조선에서 생활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 등도 고려한 정책이었지요. 그 와중에 병의 특성상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된다고 판단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격리 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물 잘 나고 기후 좋고 육지와도 가까운” 소록도였습니다.
소록도 서쪽 일부에 병원 부지가 정해지자 조선 총독부는 직원들을 보내 주민들의 토지 ‘매입’에 나섭니다. 그 매입 과정이 어떤 식이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협박과 회유에 못이긴 사람들이 나간 터에 1916년 2월 24일 소록도 자혜의원이 그 문을 엽니다. 조선총독부령 7호, 조선 땅에 세워진 19번째 ‘자혜의원’이었지요. 그리고 100여명의 환자들이 육지로부터 끌려오면서 ‘한센병 환자들의 섬’ 소록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청준의 두꺼운 장편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보신 분들은 그 섬 곳곳에 배어 있는 울음같은 한숨과 토악질같은 울음, 그리고 한센병 환자들의 한과 설움이 뱉어낸 피비린내를 느껴 보셨을 겁니다. 누군가를 사랑하여 짝을 이루려면 단종(斷種) 수술을 받아야 했고 소록도의 영주들로 군림한 일본인 원장들의 횡포에 죽을 고생을 다해야 했지요. 일본인 원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가 단종 수술대에 오른 환자 이동의 시는 사뭇 눈물겹습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소록도를 방문하게 되면 몇 가지 그 역사와 관련한 볼거리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제 시대 세워진 비석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하나이 젠키치 2대 원장의 창덕비(송덕비)도 그 중의 하나죠. 초대 원장은 환자들에게 일본 옷을 입히고 일본식 생활을 강요한 반면 그는 조선 풍습을 존중하고 환자들의 복지를 위해 힘썼습니다.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慰安會)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相助會)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라고 창덕비가 기록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조선인 환자들 사이에서 “하나이 원장은 스스로 한센병의 고통을 모르면 환자를 돌볼 수가 없다 하여 환자들 틈에서 자고 몸을 만졌고 그래도 안되자 환자의 피를 수혈하여 환자가 되어 죽었다.”는 좀 말도 안되는 전설까지 창조할만큼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량한 일본인상은 일제 말기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슈호 마사토같은 사람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죠. 의욕적인 성장 정책(?)으로 환자 정원을 수백 명 단위에서 7천명으로 늘려 놓은 그는 환자들을 중노동에 동원하여 소록도 전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가꿉니다. 정원석으로 쓸 돌을 캐고 건물을 짓는데 손가락도 짓무른 환자들이 닥치는 대로 동원됐고 급기야 슈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게 하는 망동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슈호 원장은 자신의 동상 앞에서 도열한 환자들의 사열을 받다가 한 환자의 칼에 찔립니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기에 범인은 칼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쇳덩이에 가까웠던 흉기를 손에 묶고 있었지요. 경북 성주 출신이었다는 이춘상이라는 환자는 이렇게 부르짖었답니다. “너는 환자들에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그렇게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역사는 그런 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해방 이후에도 참혹한 사태는 이어졌습니다. 소록도에는 해방이 늦게 왔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고 풍랑으로 육지와의 연결도 늦어 8월 18일에야 알게 됐죠. 한국인 직원들은 일본인 원장에게 병원 이양을 요구했고 일본인들은 그를 수락하고 떠나 버립니다. 그 후 의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과 직원들을 축으로 한 그룹이 병원 운영을 놓고 대립하지요.
여기서 말들이 엇갈리지만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에 따르면 병원 직원들은 병원 물자를 빼돌리려고 했고 의사들이 이 사실을 환자들에게 알리자 주민들이 격분하여 직원들을 습격하게 됩니다. 오재석 등 직원들은 환자주민 대표를 뽑아 협상하자고 한 후 그 명단을 확보해서는 고흥에서 치안대를 불러와서 무려 84명의 환자들을 생으로 죽여 버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환자들이 한줄로 줄을 서 총을 맞고 구덩이에 떨어졌다”며 “어떤 사람은 총 세 발을 맞고도 중심을 잃지 않아 사람들이 발로 구덩이에 처넣었다”지요. (한겨레21. 2005.8.31자)해방 1주일 뒤에 벌어진 비극이었죠.
소록도를 몇 년 전 들르긴 했는데 업무적으로 간 거라 단 1시간 섬에 있다가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경치와 분위기에 흐는히 젖었던 기억이 나고, 꼭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거기에 서린 굽이굽이 사연들을 재우쳐 돌이킬 기회를 가지겠노라 생각했는데 아직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 총독부령 7호로 또 다른 운명을 맞았던 남해안의 작은 섬 소록도는 우리 역사의 파도 속에 감춰진 우리들의 ‘게토’였고 때로는 ‘아우슈비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