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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23 노동자 이옥순 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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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2월 23일 노동자 이옥순 영면

80년대 후반 “나 이제 주인되어”라는 수기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은 원풍모방노동조합 총무였던 이옥순이 쓴 책이었죠., 원풍모방노동조합이라면 지금 북한의 김정은 체제와 맞먹는 독재체제였던 유신 시절도 버텨냈던, 저 냉혹했던 70년대를 버텨낸 몇 안되는 민주노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노동자가 되고 그 현실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조직 노동자가 되고 그 간부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 후의 삶에 이르기까지를 담담하게 쓴 책이었어요. 그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장면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이렇습니다.

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그런 고민을 토로합니다. “곗돈을 타게 되는데 이걸 동생 학비로 쓸 건지 결혼비용으로 쓸 건지 모르겠어.,” 그런데 이옥순은 동료들의 반응에 놀랍니다. 거의 모두가 결혼 비용쪽에 손을 든 거죠. 이유는 “지 공부는 지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러다 처녀귀신 되면 어쩌려고?”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자기 앞가림을 하고 싶었던 거고,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하지만 이옥순은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놀러갔다 돌아오면 분명 동생 학비로 쓰일 것”이라고요. 이옥순을 비롯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은 자신들의 앞가림을 하기에는 그 앞을 가려 줘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지요. 본의 아니게 그들은 오지랖이 넓을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가운데 오지랖이 더 넓었던 사람들은 곗돈 타서 동생 학비 대는 오지랖에 그치지 않고 왜 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과연 여기서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는 없는지, 왜 법에 보장된 권리를 고스란히 포기하고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이옥순은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80년 전두환이 그 군홧발자국을 남한 전체에 찍은 후 위원장이 수배되고 노조 간부 4명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는 상황 하에서도 원풍모방은 버티고 있었고 이옥순은 그 간부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 가을 최후의 날이 옵니다.

추석을 앞두고 별안간 노조 간부들에 대한 해고 통보가 나붙었고 회사는 이 게시판에 철망을 치고 경비까지 세웁니다. 회사의 정면 도발이었지요. 찌질한 남성들은 전부 빠져 나가 회사 편에 붙은 상황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부를 지키고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들이닥치는 깡패들의 허벅지를 물어뜯고 경찰의 방패에 매달리면서 마치 늑대들로부터 새끼들을 보호하는 어미들처럼 몸을 내던집니다. 이옥순이 “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지” 울부짖도록 말이죠. 아마 그녀들에게 평소에 “경찰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으면 열이면 열 “세상에 어떻게 경찰한테 개겨? 말도 안돼.”라고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옥순은, 그리고 그녀의 동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곗돈을 결혼자금으로 쓸 것”이라고 호언하면서도 결국은 동생 학비에 쏟아부어야 했던 그녀들의 현실처럼 말입니다. 닷새간의 공방. 서울 대림동을 마비시켰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최후는 참혹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5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경찰의 몽둥이에 쫓겨 맨발로 6차선 도로를 달리며 울부짖어야 했으니까요.

그 끔찍한 세월이 끝나고 감옥과 수배를 왔다갔다 하며 청춘을 다 보냈던 이옥순 앞에 사랑이 찾아옵니다. 1990년 비전향장기수 후원 기관인 ‘나눔의 집’에서 자원 봉사를 하다가 통혁당 사건 관련자로 18년 동안의 옥고를 치른 권낙기라는 사람을 만난 거지요. 마흔 셋의 노총각과 서른 여섯의 노처녀의 만남.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이옥순은 비전향장기수들 사이에서 “우리 며느리”로 불리웠고 노동운동가에 이어 ‘통일운동가’의 직함을 갖게 되지요.

남들은 권태기에 접어들 나이에 그들은 그제야 단란한 가정의 행복감을 알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키우는 재미를 알게 됩니다. 한약 도매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은평구에 집도 하나 장만했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도 눈을 떼지 않고 살던 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 하나가 닥칩니다. 잔기침이 멈추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을 맞은 겁니다. 그 몇 달 후 비전향장기수들 수십 명이 북한으로 송환되는데 그 장기수들은 이옥순에게 남한에서 번 돈을 억지로 쥐어 주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녀를 북한으로 초청하는데 장기수들과 북한 당국은 이옥순에게 북한 특산이라는 암 치료제까지 건네죠. 하지만 역시 이옥순은 이옥순이었습니다. 귀국해서 어떤 여성 운동가가 암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약을 뚝 떼서 줘 버립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태에서 말이죠

나는 말년의 이옥순 부부가 헌신한 통일운동의 대의에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 남편이 어느 강연에선가 신문지상에선가 “장기수들은 간첩이 아니라 통일사업을 하러 왔다가 잡힌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접하면서는 코웃음을 친 적도 있지요. 북파공작원들에게 통일운동가라는 직함을 붙일 자신이 없는 이상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 거니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교활하게 어리숙한 사람들 속여 잇속차리려고 그 운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일 겁니다. 실제로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은평구에 마련했던 그 집을 팔려고 하는데 부동산업자는 그 집을 와 보고 손을 내저었다고 합니다. 세들어 사는 가구들이 있었는데 그 세가 너무 터무니없이 낮아 그를 용인할 새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던 거죠. 어떻게든 해 보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권낙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런 말 못하네.” 그 아내에 그 남편이었던 겁니다.

2001년 2월 이옥순은 뉴스 플러스 잡지와 인터뷰를 합니다. 그녀가 죽기 달포쯤 전이었지요. 병세는 완연했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게 대답하던 그녀는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렇게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은 눈물겹고 처량하고 인간적입니다. “어떻게 얻은 행복인데… 투옥, 고문, 도피,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된 우리 두 사람의 40년 세월이 너무 한스러워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남편, 세상이 너무 고맙습니다. 그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잡지가 나온 2주 후 그녀는모진 꿈으로 점철됐던 세상을 뒤로 하고, 목숨처럼 아꼈던 두 딸과 남편을 남겨 두고 떠나갑니다. 2001년 2월 23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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