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6년 2월 22일 홍도야 울지 마라 역사 속으로
요즘은 그런 곳이 거의 없지만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뽕짝을 합창하던 추억은 언제 떠올려도 슬몃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두만강만 강이냐 소양강도 강이다로 시작해서 전국의 강이란 강은 죄다 섭렵하고 천동산 박달재부터 연락선 돌아드는 오륙도까지 헤집고 나면 목들이 잔뜩 쉬어 있곤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중의 하나 “홍도야 울지 마라.” 홍도오오야아아 울지 마아라아아아아 오빠아아아가 이이이이이이있다.... 누군가 이 익숙한 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면 백코러스랍시고 오빠가 있다~~ 오빠가 있다~~ 누군가 깝쳐서 깔깔대게 했던 노래. 그 노래의 가수 김영춘씨가 2006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여든 여덟살. 장수도 하셨고 가수 생활도 오래 했지만 그는 천상 “홍도야 울지 마라”의 가수였다. 이로써 “홍도야 울지 마라”와 연이 얽혔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우선 배구자라는 여자. 그는 구한말 유명했던 팜므 파탈 배정자의 조카였다. 무용가로서 입신하여 꽤 잘 나갔는데 최승희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하자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후 그녀는 흥행의 귀재였던 홍순언과 함께 악극단을 조직해서 성공을 거두고 동양극장이라는 극장을 설립하게 된다. 회전무대까지 갖춰진 본격 연극용 극장이었다. 1936년 여름 ‘단종애사’ 같은 작품을 띄웠다가 이왕직 즉 구 조선 왕실측의 요청으로 일찍 간판을 내린 후 무슨 연극을 올려 볼까 고민하던 연출자 박진 앞에 홍순언이 대본 하나를 내민다.
“이거 한 번 고려해 보라우.” 그는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연출가 박진이 보아하니 얼마 전 입단한 배우 겸 작가 임선규가 자신에게 보였던 대본이었다. 신파란 신파는 다 들어가 있는 유치찬란에다가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이었던지라 고개를 크게 내저었지만 홍순언도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 했다. “기럼 이케 극장을 공으로 돌릴 거가. 함 해 보자마.”예나 지금이나 사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고용인의 도리. 하지만 제목만큼은 도무지 참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은 이렇게 바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용은 그야말로 신파였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 오빠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 광호는 집에서 정해 준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홍도를 사랑한다. 둘의 사랑을 인정한 시아버지 덕분에 홍도는 광호와 결혼하게 되지만 시어머니 자리와 약혼자를 빼앗긴 옛 약혼녀 혜숙은 홍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남편 광호가 유학을 간 틈을 타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혜숙은 온갖 방법으로 둘을 이간질하고 부정한 아내로 몰아부친다. 마침내 돌아온 남편도 홍도를 외면하자 홍도는 분노를 못이겨 혜숙을 비녀로 찌른다. 아 이때 홍도의 뒷바라지로 순사가 되어 있던 오빠가 그 앞에 나타나고 혜숙은 손을 내밀며 울부짖는다. “오빠 어서 나를 잡아가시우”
여주인공은 스물 갓 넘은 차홍녀가 맡았고 오빠 역은 황철이 맡았다. 연극은 대성황을 이뤘다. 뭣보다 기생들이 떼로 몰려와서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오빠와 남동생 또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에게 홍도의 슬픔은 너무나도 쉽게 공유됐고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건달들도 기생들 따라 왔다가 꺼이꺼이 울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 들었다. “현금만 받음” 팻말을 붙여 놨어도 보리 한 주머니 들고 와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이도 있었고 급기야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출동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질서를 잡기도 했다.
이 흥행을 계기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차홍녀가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세출의 명곡 하나가 주제가로 스크린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아는 “홍도야 울지 마라”였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서구가 작사하고 가수 김영춘이 부른 그 노래. 이 주제가가 또 빅 히트를 하면서 다시 연극 흥행에 불이 붙었다. 무대에서 오빠가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부르면 온 관객이 다 따라 불렀다. 그러면서 누구나 홍도가 되고 그 오빠가 되어 펑펑 울다가 눈두덩이 부푼 채로 극장을 나갔다. 가수 김영춘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으뜸 가수로 우뚝 섰다.
여배우 차홍녀도 스타가 됐다. 홍도 한 번 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든 장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배역처럼 불운했다. 북부 지역 순회 공연을 마쳤을 때 무대 뒤에서 쓰러질만큼 지쳐 있었던 그녀는 철원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엎드리고 있는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유달리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는 그 짧은 접촉으로 천연두를 옮고 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키운 연출가 박진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녀는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거지들이 훌쩍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저 고운 배우가 우리 같은 사람 돕다가 저렇게 됐다고.
남자 배우 황철과 극작가 임선규는 해방 공간에서 이북을 택했다. 황철은 1948년 월북했고 전쟁 중에는 팔을 잃었다. 의수를 하고서 계속 연기 생활을 했고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이 홍도의 오빠가 죽었을 때 북한 정권은 사회장으로 그를 예우한다. 극작가 임선규의 경우는 좀 기구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역시 테러와 체포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함께 월북을 택한다. 아내의 이름이 인민여배우로 이름 높은 문예봉이었다. 하지만 수십년 간 만인의 여동생인 홍도를 만들어낸 이 신파극 작가는 살벌한 혁명과 생경한 구호를 그 예술적 기질에 담아내기에는 무리였던지 아내에 비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
‘홍도야 우지 마라’에 얽힌 사람들 가운데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었던 사람이 영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 김영춘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홍도야 우지 마라’를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홍도야 우지 마라>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작사가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이었다. 그의 말년은 지극히 쓸쓸했다고 전한다. 하루 하루 지리할만큼 긴 하루를 깎아 나가면서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러 대스타로 두둥실 떠오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그때 조우했을 차홍녀의 앳된 얼굴, 폐병쟁이 임선규의 허연 얼굴, 귀공자 스타일의 황철 등등의 면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2월 22일 김영춘을 마지막으로 홍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06년 2월 22일 홍도야 울지 마라 역사 속으로
요즘은 그런 곳이 거의 없지만 낡은 나무 테이블 위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뽕짝을 합창하던 추억은 언제 떠올려도 슬몃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두만강만 강이냐 소양강도 강이다로 시작해서 전국의 강이란 강은 죄다 섭렵하고 천동산 박달재부터 연락선 돌아드는 오륙도까지 헤집고 나면 목들이 잔뜩 쉬어 있곤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중의 하나 “홍도야 울지 마라.” 홍도오오야아아 울지 마아라아아아아 오빠아아아가 이이이이이이있다.... 누군가 이 익숙한 가락을 구성지게 부르면 백코러스랍시고 오빠가 있다~~ 오빠가 있다~~ 누군가 깝쳐서 깔깔대게 했던 노래. 그 노래의 가수 김영춘씨가 2006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여든 여덟살. 장수도 하셨고 가수 생활도 오래 했지만 그는 천상 “홍도야 울지 마라”의 가수였다. 이로써 “홍도야 울지 마라”와 연이 얽혔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우선 배구자라는 여자. 그는 구한말 유명했던 팜므 파탈 배정자의 조카였다. 무용가로서 입신하여 꽤 잘 나갔는데 최승희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등장하자 그만 기가 꺾이고 만다. 이후 그녀는 흥행의 귀재였던 홍순언과 함께 악극단을 조직해서 성공을 거두고 동양극장이라는 극장을 설립하게 된다. 회전무대까지 갖춰진 본격 연극용 극장이었다. 1936년 여름 ‘단종애사’ 같은 작품을 띄웠다가 이왕직 즉 구 조선 왕실측의 요청으로 일찍 간판을 내린 후 무슨 연극을 올려 볼까 고민하던 연출자 박진 앞에 홍순언이 대본 하나를 내민다.
“이거 한 번 고려해 보라우.” 그는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연출가 박진이 보아하니 얼마 전 입단한 배우 겸 작가 임선규가 자신에게 보였던 대본이었다. 신파란 신파는 다 들어가 있는 유치찬란에다가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요즘 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용이었던지라 고개를 크게 내저었지만 홍순언도 뭔가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 했다. “기럼 이케 극장을 공으로 돌릴 거가. 함 해 보자마.”예나 지금이나 사장이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고용인의 도리. 하지만 제목만큼은 도무지 참아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목은 이렇게 바뀐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내용은 그야말로 신파였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 오빠의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 광호는 집에서 정해 준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홍도를 사랑한다. 둘의 사랑을 인정한 시아버지 덕분에 홍도는 광호와 결혼하게 되지만 시어머니 자리와 약혼자를 빼앗긴 옛 약혼녀 혜숙은 홍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남편 광호가 유학을 간 틈을 타서 시어머니와 시누이, 혜숙은 온갖 방법으로 둘을 이간질하고 부정한 아내로 몰아부친다. 마침내 돌아온 남편도 홍도를 외면하자 홍도는 분노를 못이겨 혜숙을 비녀로 찌른다. 아 이때 홍도의 뒷바라지로 순사가 되어 있던 오빠가 그 앞에 나타나고 혜숙은 손을 내밀며 울부짖는다. “오빠 어서 나를 잡아가시우”
여주인공은 스물 갓 넘은 차홍녀가 맡았고 오빠 역은 황철이 맡았다. 연극은 대성황을 이뤘다. 뭣보다 기생들이 떼로 몰려와서 보고 또 보고 울고 또 울었다. 오빠와 남동생 또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웃음을 팔고 술을 따라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녀들에게 홍도의 슬픔은 너무나도 쉽게 공유됐고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건달들도 기생들 따라 왔다가 꺼이꺼이 울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 들었다. “현금만 받음” 팻말을 붙여 놨어도 보리 한 주머니 들고 와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는 이도 있었고 급기야 서대문경찰서 형사들이 출동해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질서를 잡기도 했다.
이 흥행을 계기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역시 차홍녀가 주연을 맡았지만 영화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불세출의 명곡 하나가 주제가로 스크린을 흐른다. 바로 우리가 아는 “홍도야 울지 마라”였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이서구가 작사하고 가수 김영춘이 부른 그 노래. 이 주제가가 또 빅 히트를 하면서 다시 연극 흥행에 불이 붙었다. 무대에서 오빠가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부르면 온 관객이 다 따라 불렀다. 그러면서 누구나 홍도가 되고 그 오빠가 되어 펑펑 울다가 눈두덩이 부푼 채로 극장을 나갔다. 가수 김영춘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의 으뜸 가수로 우뚝 섰다.
여배우 차홍녀도 스타가 됐다. 홍도 한 번 보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든 장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배역처럼 불운했다. 북부 지역 순회 공연을 마쳤을 때 무대 뒤에서 쓰러질만큼 지쳐 있었던 그녀는 철원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엎드리고 있는 한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 유달리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는 그 짧은 접촉으로 천연두를 옮고 만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를 키운 연출가 박진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녀는 스물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많은 거지들이 훌쩍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한다. 저 고운 배우가 우리 같은 사람 돕다가 저렇게 됐다고.
남자 배우 황철과 극작가 임선규는 해방 공간에서 이북을 택했다. 황철은 1948년 월북했고 전쟁 중에는 팔을 잃었다. 의수를 하고서 계속 연기 생활을 했고 북한 최초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이 홍도의 오빠가 죽었을 때 북한 정권은 사회장으로 그를 예우한다. 극작가 임선규의 경우는 좀 기구했다. 해방 후 친일행각 때문에 수세에 몰려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남로당 활동을 하면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역시 테러와 체포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아내와 함께 월북을 택한다. 아내의 이름이 인민여배우로 이름 높은 문예봉이었다. 하지만 수십년 간 만인의 여동생인 홍도를 만들어낸 이 신파극 작가는 살벌한 혁명과 생경한 구호를 그 예술적 기질에 담아내기에는 무리였던지 아내에 비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다가 죽었다.
‘홍도야 우지 마라’에 얽힌 사람들 가운데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었던 사람이 영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 김영춘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홍도야 우지 마라’를 능가하는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홍도야 우지 마라>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그의 고향이 아니라 작사가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이었다. 그의 말년은 지극히 쓸쓸했다고 전한다. 하루 하루 지리할만큼 긴 하루를 깎아 나가면서 그는 “홍도야 울지 마라”를 불러 대스타로 두둥실 떠오르던 시절을 추억하고, 그때 조우했을 차홍녀의 앳된 얼굴, 폐병쟁이 임선규의 허연 얼굴, 귀공자 스타일의 황철 등등의 면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2006년 2월 22일 김영춘을 마지막으로 홍도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