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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17 중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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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2월 17일 중월전쟁 

중국은 사방의 이민족과 국가들을 오랑캐라 불렀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 그리고 자신들을 중화라 일컬으며 사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 들었고 힘이 넘치면 그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그 주변 나라들도 때로는 각을 세우기도 하고 충돌도 불사하면서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현실적 힘으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동이에 해당하는 우리나 남만에 해당하는 베트남이나 비슷했다. 두 나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득한 춘추전국 시대나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중국 또는 그 대륙의 지배자에 맞서서 아득바득 싸웠고 때로는 물리치고 대개는 너 잘났다 숙여 주면서 독자적인 국가와 문화적, 언어적 공동체를 꾸려 온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당나라의 침략 이후 그 군대에 의해 영토가 병합된 적은 없었지만 베트남은 한나라 때부터 청나라때까지 수시로 중국 또는 그 지배자의 직접 지배 하에 들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언제나 침략자들을 물리쳐 왔다. 영화 <하얀 전쟁>에서 베트남 노인이 뇌까리는 것처럼 중국인들이 왔다가 물러갔고 프랑스인들이 왔다가 갔고 미군들, 그리고 따이한들도 왔다가 (쫓겨) 갈 뿐이었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나라 미국도 베트남에서 쓴맛을 봤고 베트남은 통일됐다. 여기에는 중국의 지원도 꽤 컸다. 호지명이 모택동과 파안대소하며 회담하는 사진에서 보듯 그들은 사회주의의 형제들처럼 보였고 기실 호지명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신뢰를 받고 또 그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호지명조차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중국에 먹히느니 프랑스에게 굽실거리는 게 낫다.” 그런데 중국도 사실 다른 마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발해를 교묘하게 이간질하면서 (한 해는 신라 사신을 상석에 앉히고 다음 해에는 발해 사신을 상석에 앉히는 식으로) 끝까지 두 나라가 서먹함을 풀지 못하게 한 것처럼, 중국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면서도 통일 베트남의 등장을 은근히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이 남베트남 패망 직전 남베트남 정부에게 제시한 대안 중의 하나는 일종의 친중국 세력 연합이었다.) 

‘베트남 해방’이 성사된 이후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들을 호되게 때리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는 대탈주를 감행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반공 교육 소재로 즐겨 활용된 ‘보트 피플’도 그 단면의 하나다. 또 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소련편을 들었고 이런 일련의 사태는 중국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중국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면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대해서 그랬다. 베트남은 동남 아시아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편이었고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늘상 줘 터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중국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킬링필드’로 대변되는 학정을 자행할 제 크메르 루즈는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피의 보복을 감행한다. 

미군을 물리친 긍지 높은 베트남군은 1978년 크리스마스날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베트남군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크메르 루즈를 축출한다. 베트남 역시 인도차이나에 베트남을 정점으로 한 일종의 대 베트남 블록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 당했던 대로의 식민 통치 방식을 캄보디아에 적용한다. 베트남 인들의 대량이주라든가 양국민의 통혼(通婚) 장려라든가. 각설하고 이 침략은 중국을 자극했다. 아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해방전쟁 때 그렇게 도와 줬는데 이번엔 우리 발밑을 판단 말이야? 양국 관계는 극도로 험악해졌고 ‘불굴의 오뚜기’ (不倒翁) 등소평은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꼬마 녀석을 혼내 줘야겠소.” 미국이야 아플 것이 없었다. “뭐 그러시든가.”가 기본 입장이었으리라. 베트남이 한 번 혼나는 것이야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1979년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대군은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조금 이상한 전쟁이었다. 6.25 때 중공군은 38선 이남까지 치고 내려왔고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겠다는 기세까지 보였지만 이때는 “한 수 가르치는 전쟁” 정도의 제한전을 일찌감치 표방했다. 베트남 북부 지역을 장악한 뒤 수도 하노이의 목을 죄어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철수시키는 정도에서 마무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실상 베트남 정규군은 거의 캄보디아에 투입돼 있었고 베트남 북부 지역의 수비군의 주력은 민병대였다. 

하지만 이 민병대는 보통 민병대가 아니라 해방전쟁에서 질리도록 미군과 싸우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문화혁명 뒤끝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군에게 매운 맛을 보여 준다. 그들은 중국이 지원했던 무기로 중국 탱크를 때려부쉈고 미군을 처리한 그 수법으로 중국군을 골탕먹였다. 주요 거점에서는 전멸을 불사하고 항전하면서도 중국군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혔다. 중국은 격렬한 소모전을 펼쳐 국경선 일대의 소도시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뿐이었다. 어차피 베트남을 먹자고 시작한 전쟁은 아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을 끌어내는 데에도 실패했지만 중국군은 “하노이로 가는 길을 뚫었다”면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끝냈다. 물론 철수하는 도중의 베트남 영토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국이 베트남의 정예 민병대에 창피를 당한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실상 사망자와 피해는 베트남에 더 많았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피해 규모를 밝힌 바 없다) 어차피 베트남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국경분쟁은 그로부터 10년을 더 끌었고 수많은 양국 군인들이 국경의 산악지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등소평은 중월전쟁을 계기로 낙후된 중국 군대에 충격을 받았고 군 현대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더욱 강력해진 중국은 지금 남지나 해 전체가 자기네 바다라는 식의 억지로 베트남은 물론 필리핀과도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 베트남 정부 수뇌부는 베트남 전 종료 이후 처음으로 동원령을 시사하기도 했다. “중국이 바다에서 까불면 우리는 육로로 베이징으로 간다.”고 호언하면서. 

중월전쟁이 터진 날 중국을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이미 중국이 북한 유사시 두 시간 내에 평양에 입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놨다는 보도도 있거니와 여전히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면서도 결코 통일된 한반도를 바라지 않는 심사를 가지고 있고, 중월전쟁 당시 망신을 당한 엉성한 군사력과는 차원이 다른 군비 증강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 수 가르치는’ 식의 중국식 개입은 옛날 옛날 한옛날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웃 치고는 너무도 비대한 이웃 중국의, 하필이면 그 정치적 중심부에 지척으로 붙어 있어서 그 민감함의 정도가 베트남에 비하면 댈것도 아닌 나라의 국민으로서, 더군다나 분단된 나라의 한쪽이 핵무기를 가졌다면서 호언하는 국면을 맞아 어찌 소회가 없을 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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