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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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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2.16 마릴린 먼로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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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2월 16일 마릴린 먼로 한국에 오다 

그녀가 죽은 지도 반 세기가 지났지만 그래도 ‘세기의 섹스 심벌’이라면 그 이름이 빠지지 않으며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날리는 치마를 부여잡으며 웃는 그 장면은 지금은 하나의 전 설적인 순간이 되어 남아 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몇 편 본 적 없고 그녀가 죽고 한참 뒤에야 세상 빛을 본 처지이지만 마릴린 먼로의 이름은 까마득한 옛날 여배우 아닌 바로 그저께 돌아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밤에 무엇을 입고 자느냐는 질문에 ‘샤넬 넘버 파이브’라고 대답하여 질문하는 기자의 넋을 빼놨던 에피소드나 빨갱이로 몰린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여 남편이 양심을 걸고 매카시즘과 맞설 때 그 옆에 있었던 일이나, 케네디 형제들과의 염문이나 뭐 하여간 무궁무진한 사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4년 2월 16일에는 그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됐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프고 버려진 땅 중의 하나였던 한국에 그녀의 화려한 미소가 등장한 것이다. 

마릴린 먼로가 공식적으로 행했던 세 번의 결혼 가운데 첫 상대는 평범한 공장 노동자였던 제임스 도어티였다. 그때는 마릴린 먼로도 아니었다. 노마 진 베이커라는 이름의 열 여섯 살 소녀였을 뿐.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했지만 노마 진 베이커의 팔자는 그렇게 공장 노동자의 아내로 아이 낳고 남편 월급 아끼며 살아갈 깜냥이 아니었다. 배우를 꿈꾸던 그녀는 헐리웃으로 갔고 선원으로 바다에 나가 있던 남편과는 이혼했다. 마릴린 먼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그녀는 일약 세기의 섹스 심벌로 두둥실 떠올랐고 두 번째 신랑은 첫 번째 신랑과는 대기권과 땅의 차이가 있는 전설적인 스타를 고른다. 메이저 리그의 스타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고 메이저 리그 MVP를 세 번씩이나 차지했으며 헤밍웨이의 고전 <노인과 바다>에도 등장하는 불세출의 스타. <노인과 바다>에서 “돌아오면 야구 얘기나 들려 주세요” 하는 꼬마에게 노인은 “양키즈가 이기게 마련이지.”라고 대답하고 꼬마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즈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라고 맞받자 노인은 “양키즈에는 대(大) 디마지오가 있지.”라고 호언을 하는 것이다. 하여간 뉴욕 양키즈가 자랑하는 스타 군단 가운데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정도를 제외하면 상석을 양보하지 않을 대단한 사나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마릴린 먼로와 결혼한 순간 대스타 디마지오보다는 “먼로의 남편” 취급을 감수해야 했다. 별이란 더 밝은 별 앞에서는 그 빛꼬리를 내리는 법 

그들은 1954년 1월 14일 결혼했는데 “우리 결혼했어요”를 꼬리표에 매단 이 스타 부부가 신혼여행지로 택한 것은 일본이었다. 초청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이었다고 한다. 미국과 사생결단을 치른지 10년도 안됐지만 일본은 이 거물 스타 커플의 일본 방문에 전국이 들썩였다. 그야말로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신혼을 즐기는 이 커플 앞에 미군 장교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조 디마지오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지금도 한국에는 많은 미군들이 고생을 하면서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오신 김에 한국을 방문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디마지오는 정중히 거절의 멘트를 날렸는데 이때 미군 장교의 반응은 불세출의 야구 스타를 한없는 엄지왕자로 만들고 말았다. “저는 부인께 말씀을 드린 겁니다만.” ‘조 디마지오 부인’ 보다는 자신을 보면 자지러지며 환성을 내지를 병사들 앞의 마릴린 먼로를 더 선호했던 탓일까. 마릴린 먼로는 신혼여행지에 남편을 남겨 두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 마릴린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이건 사실이 아닌 것 같지만)

1954년 2월 16일 흡사 오늘날의 아프간 비슷했을 한국에 마릴린 먼로가 왔다. 국내 최고의 여배우 최은희와 백성희가 나가 마중을 했고 미군의 하늘같은 장성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그녀가 왔다. 이후 그녀가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왔을 때 풍경을 보자. “미모의 여왕을 직접 눈앞에 보고자 비행장에 모여든 약 6백여명에 달하는 사병들의 흥분된 모습은 근래에 보기 드문 장관을 이루었다. 군복을 입었으나 와이셔츠 단추를 절반이나 끼지 않고 젖가슴이 보일랑말랑 하는 것이 사병들의 흥분을 더욱 돋우는 것 같았다. ”마릴린 먼로 ‘여사’가 전선으로 가가 위하여 미리 준비된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기대에 어그러진 사병들은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오느냐"고 묻자 "곧 돌아오겠다"고 마치 어머니가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이 애교를 부렸다. 먼로 여사는 앞으로 4일간 한국에 체류할 것이다.” (1954년 2월 18일자 조선일보) 

그녀는 10여 차례 공연을 통해 미군 병사들을 만났다. 어느 공연 때에는 미친 듯이 환호하는 병사들 위로 저공비행을 요청하여 손 키스를 보내는 짜릿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수천 명의 남자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어 헬기 조종사는 “당장 기수를 올려라! 먼로가 다치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안된다.”는 호통을 들어야 했다. 엄동설한.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훤히 드러낸 드레스 차림으로 공연을 했다. 섹시 스타의 열정으로, 그리고 때로는 고향에 두고 온 병사들의 애인처럼 달콤하게. 평생을 환호 속에서 살았던 그녀이지만 그렇게 극적이고 그렇게 열정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은 드물었을 것이다. 신혼의 남편까지 독수공방시키고 등장한 한국의 무대에서 그녀는 흡사 하나의 여신이었다. 그 기억이 그녀가 “가장 인상깊었던 방문지는 한국”이라고 회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난 아주 따뜻했어요. 마치 햇살이 비추는 것처럼. 그때까지는 청중이 두려웠어요. 어떤 청중도 말이죠.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머리가 멍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쩔까 불안했어요. 그런데 내리는 눈 속에서 환호하는 군인들 앞에 섰을 때 난 처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그저 행복할 뿐이었어요.” (마릴린 먼로의 회고 - 광기와 우연의 역사 2 - 자작나무 중) 

그녀에게 청중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무대가 주는 행복감을 만끽한 한국 공연은 그녀 자신에게는 그렇게 유익하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신혼여행 중 아내에게 버림받은(?)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은 274일 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헌신적이고 고전적인 아내상을 바랐던 디마지오와 무대의 참맛을 알아버린 먼로의 결혼 생활이 안정적일 수는 없었겠지만 디마지오가 평생을 혼자 살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먼로 뿐이었다고 되뇐 것에 비하면 아쉬운 이별이었다. 1954년 2월 16일 마릴린 먼로는 그 일생에서 가장 기쁜 4일을 엉뚱한 땅에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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