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7년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그의 본명은 리일남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었다. 성은 두음법칙을 적용한 이씨가 됐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하라”는 뜻의 한영으로 했다.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사람이었고 1982년 스위스 유학 도중 남한으로 ‘귀순’ (북한도 종종 행했던 ‘납치’라는 사람도 있고 이한영본인은 “미국에 가기 위해 한국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한 뒤 그는 이한영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2월 15일 그의 아파트 계단에서 총을 맞고 죽는다. 범인은 두 명의 괴한이었다. 군사독재의 몇 안되는 은혜로 범죄조직조차 총기를 보유를 할지언정 사용할 경우 조직의 소멸을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일반 탈북자가 아니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것이다. 즉 김정일은 이한영의 이모부였다.
이 사건은 종종 영화 속 모티브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강호와 강동원이 나온 영화 <의형제>에서다. 영화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지만 이한영은 혼자 죽었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다. 아니 무슨 놈의 킬러가 귀신도 모르게 사람을 제거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웃들이 다 알만큼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같은 곳에서 총을 쏜단 말인가. 그리고 이한영이 ‘간첩’이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은 추후 번복됐고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들어진 25구경 권총은 무려 1백여 종류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한영의 행방이 심부름 센터에 의해 알려졌고 그 와중에 돈을 받고 그를 도와 준 경찰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공작원이라면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세상을 아주 잘 활용한 셈이다.
이 사건을 두고 나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의 주장을 들었다. 한 명은 장기수 영감님, 또 한 명은 탈북자, 또 한 명은 보안과 형사였다. 장기수 영감님에 따르면 이한영은 납치됐고 이용만 당하다가 이용 가치가 다하자 안기부가 해치운 것이라고 했고 보안과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북한 공작원이 한 짓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탈북자의 의견은 또 달랐다. “남북이 합작해서 죽여 버린 거임다. 이미 이한영 가는 북이 보기에는 웬수덩어리였고 남쪽에서 보자문 골칫덩어리였지요. 돈 달라 뭐 해 달라 요구조건도 많았고 책 내고 어쩌고 하는 것도 다 돈 벌자는 것이었지요. 북조선에서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정보기관들끼리 내통을 했갔지요. 맘대로 하라. 우리는 개의치 않갔다. 그러니 그리 대담하게 설친 거 아니갔슴까?”
안기부는 후일 체포된 부부간첩을 심문한 결과 이한영을 쏜 것은 ‘최순호’라는 이름의 공작원이 이끄는 공작조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후 최순호인지 누구인지 모를 한 명이 은행 CCTV에 희미하게 잡힌 것을 제외하면 한국 경찰과 정보기관은 사건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그리고 이한영은 길지 않은 생을 마치고 저승길로 떠났다.
그는 북한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었고, 오히려 남에서보다 북에서 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남을 택한 (또는 택함을 강요받은) 후 오히려 기대만큼 화려하지 못한 남한 생활의 팍팍함 속에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었다고 하니까. KBS 국제방송 러시아 담당 PD로 잘 지냈으면 별 일이 없었을 테고 예쁜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왕년에 잘나갔던 로열 패밀리의 버릇은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이한영 자신을 한탕에 눈 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당연히 사업은 연전연패였다. 핀치에 몰린 그가 한 행동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이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같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안기부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결심이었고 그의 바닥이었다.
사람이 바닥을 보이면 그 뒤에 오는 것은 공포다. 그는 북한의 이모부가 자신을 죽일지도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딸의 신변을 우려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기부도 “이런 식이면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식의 경고를 당연히 보냈을 테니 이한영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공포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가기를 열망했다. 북을 등지고 나왔지만 남에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그는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 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출국금지자’였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해외여행 정도는 일도 아니었건만.
그는 항상 북한의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젊은 혈기에 사로잡혀 섣불리 조국을 등져 버린 것도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섣불리 행동하다가 쫄딱 망한 후에야 어머니에게 손을 벌린 못난 아들, 급기야 대놓고 자신의 신분을 떠들어 대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철없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정체 모를 (개인적으로는 북한 공작원이 맞다고 보는데) 누군가의 총에 맞아 그 기구한 삶을 마쳐야 했다. 그는 특별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폼내기 좋아하고 딸을 무진장 사랑했던, 허영 많고 계산 짧은 보통의 한국 남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인생을 가로막았고 때로는 목을 죄었고 결국은 총탄이 되어 그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후일 가족은 법원에 국가가 이한영의 보호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를 제기했고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이한영의 유족에게 9천여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이것은 법원이 인정한 '경감사유‘에 의해 좀 깎인 액수였다. 법원은 국가 책임을 60퍼센트로 인정했고 “국정원의 권고와 만류를 무시하고 스스로 언론기관과 인터뷰하고 수기를 출판하는 등 사건 원인의 한 부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을 40퍼센트로 돌렸다. 6대4. 남과 북을 이한영 피살 사건의 피고로 불러 재판에 세웠을 때에도 비슷한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분단의 희생양이란 도처에, 항상 발생한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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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5일 이한영 피살
그의 본명은 리일남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었다. 성은 두음법칙을 적용한 이씨가 됐고 “한국과 더불어 영원하라”는 뜻의 한영으로 했다.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사람이었고 1982년 스위스 유학 도중 남한으로 ‘귀순’ (북한도 종종 행했던 ‘납치’라는 사람도 있고 이한영본인은 “미국에 가기 위해 한국에 들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한 뒤 그는 이한영으로 살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2월 15일 그의 아파트 계단에서 총을 맞고 죽는다. 범인은 두 명의 괴한이었다. 군사독재의 몇 안되는 은혜로 범죄조직조차 총기를 보유를 할지언정 사용할 경우 조직의 소멸을 각오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권총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일반 탈북자가 아니었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것이다. 즉 김정일은 이한영의 이모부였다.
이 사건은 종종 영화 속 모티브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송강호와 강동원이 나온 영화 <의형제>에서다. 영화에서는 북한 공작원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하지만 이한영은 혼자 죽었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다. 아니 무슨 놈의 킬러가 귀신도 모르게 사람을 제거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웃들이 다 알만큼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 같은 곳에서 총을 쏜단 말인가. 그리고 이한영이 ‘간첩’이라는 말을 했다는 증언은 추후 번복됐고 북한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들어진 25구경 권총은 무려 1백여 종류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한영의 행방이 심부름 센터에 의해 알려졌고 그 와중에 돈을 받고 그를 도와 준 경찰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공작원이라면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 세상을 아주 잘 활용한 셈이다.
이 사건을 두고 나는 각각 다른 세 사람의 주장을 들었다. 한 명은 장기수 영감님, 또 한 명은 탈북자, 또 한 명은 보안과 형사였다. 장기수 영감님에 따르면 이한영은 납치됐고 이용만 당하다가 이용 가치가 다하자 안기부가 해치운 것이라고 했고 보안과 형사는 코웃음을 치며 북한 공작원이 한 짓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탈북자의 의견은 또 달랐다. “남북이 합작해서 죽여 버린 거임다. 이미 이한영 가는 북이 보기에는 웬수덩어리였고 남쪽에서 보자문 골칫덩어리였지요. 돈 달라 뭐 해 달라 요구조건도 많았고 책 내고 어쩌고 하는 것도 다 돈 벌자는 것이었지요. 북조선에서야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고..... 정보기관들끼리 내통을 했갔지요. 맘대로 하라. 우리는 개의치 않갔다. 그러니 그리 대담하게 설친 거 아니갔슴까?”
안기부는 후일 체포된 부부간첩을 심문한 결과 이한영을 쏜 것은 ‘최순호’라는 이름의 공작원이 이끄는 공작조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후 최순호인지 누구인지 모를 한 명이 은행 CCTV에 희미하게 잡힌 것을 제외하면 한국 경찰과 정보기관은 사건의 단서를 잡지 못했다.그리고 이한영은 길지 않은 생을 마치고 저승길로 떠났다.
그는 북한의 최상류층에 속하는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었고, 오히려 남에서보다 북에서 더 부와 권세를 누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는 남을 택한 (또는 택함을 강요받은) 후 오히려 기대만큼 화려하지 못한 남한 생활의 팍팍함 속에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었다고 하니까. KBS 국제방송 러시아 담당 PD로 잘 지냈으면 별 일이 없었을 테고 예쁜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왕년에 잘나갔던 로열 패밀리의 버릇은 돈이면 다 되는 자본주의와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이한영 자신을 한탕에 눈 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당연히 사업은 연전연패였다. 핀치에 몰린 그가 한 행동이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것이었다.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 같은 책을 내고, 방송에도 출연하며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안기부는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결심이었고 그의 바닥이었다.
사람이 바닥을 보이면 그 뒤에 오는 것은 공포다. 그는 북한의 이모부가 자신을 죽일지도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딸의 신변을 우려하여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기부도 “이런 식이면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식의 경고를 당연히 보냈을 테니 이한영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공포와 마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가기를 열망했다. 북을 등지고 나왔지만 남에서도 행복할 수 없었던 그는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 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출국금지자’였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해외여행 정도는 일도 아니었건만.
그는 항상 북한의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젊은 혈기에 사로잡혀 섣불리 조국을 등져 버린 것도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섣불리 행동하다가 쫄딱 망한 후에야 어머니에게 손을 벌린 못난 아들, 급기야 대놓고 자신의 신분을 떠들어 대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철없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정체 모를 (개인적으로는 북한 공작원이 맞다고 보는데) 누군가의 총에 맞아 그 기구한 삶을 마쳐야 했다. 그는 특별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폼내기 좋아하고 딸을 무진장 사랑했던, 허영 많고 계산 짧은 보통의 한국 남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의 인생을 가로막았고 때로는 목을 죄었고 결국은 총탄이 되어 그 머리를 꿰뚫고 말았다.
후일 가족은 법원에 국가가 이한영의 보호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를 제기했고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이한영의 유족에게 9천여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데 이것은 법원이 인정한 '경감사유‘에 의해 좀 깎인 액수였다. 법원은 국가 책임을 60퍼센트로 인정했고 “국정원의 권고와 만류를 무시하고 스스로 언론기관과 인터뷰하고 수기를 출판하는 등 사건 원인의 한 부분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을 40퍼센트로 돌렸다. 6대4. 남과 북을 이한영 피살 사건의 피고로 불러 재판에 세웠을 때에도 비슷한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분단의 희생양이란 도처에, 항상 발생한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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