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4년 2월 14일 어느 고독한 기타맨의 죽음
젊어서 한번쯤 기타에 홀려보지 않은 사람이 그리 흔할까마는, 이 사람의 경우는 좀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틈만 나면 기타를 잡고 흥얼거렸고 그렇고 그런 동료들과 어울려 음악을 한답시고 여러 밤을 지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후 들어오신 새어머니, 그리고 완고한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즐거움은 기타 밖에 없었다. 공부 잘 해서 명문대학을 간 학생들도 대학가요제 나간다고 기타 연습하다가 머리통에 기타가 떨어지곤 했다는데 공부든 돈이든 일생에 유용한 곳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젊은이의 부모가 그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고 물 보듯 투명하다. 거기다 그는 사고 목록의 맨 끄트머리이자 하이라이트인 사고마저 달성한다. 어느 여자와의 사이에서 덜커덕 애를 낳은 것이다.
여자 고르는 안목도 좋지 않았던지 여자는 애를 낳은 후 이내 남편과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래도 기타를 놓지 않고 뚱땅거리는 남자에게 그 부모는 인내심을 잃었다. “썩 나가 없어져라. 이 밥버러지야. 그놈의 기타 들고 어서 없어져 버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집을 남자는 허위허위 나와야 했다. 딸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딸을 데리고 나갈 엄두는 꿈에도 나지 않았다. 딸은 할아버지의 호적에 등재되어 자랐다.
“너는 아버지랑 사냐 할아버지랑 사냐.”는 놀림을 받으며 자란 딸을 만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집에 와서 멋들어지게 기타를 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딸은 오랜 동안 가슴에 새겨 넣어 두었다. 그 뒤 열일곱이 됐을 때 딸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라한 추억 속의 멋진 기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초라한 밤무대의 싸구려 악사였다. 어린 날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딸은 모질게 마음 먹는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버릴 거야.”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 남은 딸은 다시 아버지를 찾는다. 이미 여러 해 연락이 끊긴 터라 자신의 힘으로 찾기 어려웠는지 딸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의뢰하여 그 주인공이 된다. 이제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버지와 스물 여섯의 딸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딸을 만난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기구한 삶을 꾸려온 아버지가 그 딸을 만나 어깨를 어루만지며 눈물 짓고 딸이 차려주는 밥상을 앞에 하고 가슴을 쳤던 것은 2003년 말이었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살았던가. 이미 늙어버려 손도 둔해지고 음악적 성취도 무망해진 그는 기타를 놓아 버리고 현대중공업 하청공장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역시 술 마시면 기타 잡고 노래 구성지게 불러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던 그는 싸구려 악단의 악사로 일하면서 세상의 쓴맛단맛 다 본 처지였지만, 하청업체에서 발생하는 기상천외한 불평등과 불공정에 분노했다. 현장 소장에게 두들겨 맞고 민주노총에 가서 하소연한 것은 자갈처럼 널린 사연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청업체 사장이 월급 소급분을 빼돌린 것을 알고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고 ‘하루 일당을 제끼는’ 작업 거부를 조직, 소급분을 토해 내게 만든 일은 그 인생에서 흔치 않았던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마음회’라는 사내 모임을 만들어 하청 노동자들의 슬픔과 애환을 모아 목소리를 내고 힘을 키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싸구려 악단의 기타리스트는 그렇게 하청 공장의 조직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하청업체 뿐이 아니라 현대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이었고 또 하나, 왕년의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화석이 되어 버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그의 해고 사유가 된 유인물에서 그는 여실히 드러난다. "자칭 세계1등 조선소 현대 조선소에게, 인터기업 사장은 각오하라, 최윤석 집행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현대조선소, 인터기업, 그리고 최윤석 집행부. 그가 외친 주장을 들어 보자. 여기에는 ‘임금 인상’조차 없다. "연말 성과금, 설,휴가, 하기휴기비 지급, 일당(상용일급제)직의 주차, 월차, 연차, 연장근로가산임금, 예비군훈련 법정 근로시간 인정" 뿐이었다. 다 빼놓고 ‘주차’ 한 단어가 눈에 띈다. 정규직들에게 주어진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대지 못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와야 하는 사람들. 그걸 보고도 무심한 ‘노동조합’에게 하청 노동자가 된 기타리스트는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2003년 말은 그에게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임한 시기였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딸을 만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동시에 2003년 12월 31일 현대 측은 하루 아침에 그의 전산 기록을 말소하여 출입을 통제했다. 즉 쉽게 말하면 해고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아무데도 발디딜 데 없는 허공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2004년 2월 14일 평생 고독한 기타맨이었고 외로운 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는 현대중공업 내 4, 5도크 뒤 선실생산부 사무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그 죽음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의 유서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는 시신을 앞에 두고 농성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된 56일간의 ‘장례 투쟁’에 감히 눈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초콜렛이 산처럼 쌓인 가게들을 지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딸을 그리며 쓸쓸히 죽음을 향해 걸었던 한 남자, 박일수가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유서같은 편지를 일부 옮긴다.
“너도 알다시피 전산처리 해서 삭제된 거 때문에 장기적인 것은 실현이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해. 'KBS추적60분'에 경위서 및 자료, 유서 등을 소포로 보냈다. 내 목숨 귀한 것 나도 알아, 그런데 주어진 눈앞에 보여진 상황이 노동에 관련한... 현대중공업 하청문제의 곪고 썩어있는 것들이 모두가 껍데기뿐이니, 법에 호소해야 그리고 신고하면, 법적으로 처리해주는 형식적인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니냐. 이것은 아니다 싶다. 갖고 있던 생각, 보고 느낀 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나 한계에 부딪치는 것에 대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다는 못 바꾸더라도 20-30%라도 바꿔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의 죽음으로 사회가 개혁되길 바란다. 그냥 살아봐야 쥐새끼 같을 뿐이다.
(중략)
하청노동자 고통줘서 쥐어짜서 주면 피해자는 누구냐 이거야. 자기 논 팔아서 자기가 하느냐 이거야. 지 챙길거 다 챙겨가고는 썩게 하느냐 이거야. 비정규직 문제 구체적인 해결은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안된다. 힘을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고 이론인 듯 싶다. 나도 희망이 왜 없겠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
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이면서 박일수라는 한 고독했던 사람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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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14일 어느 고독한 기타맨의 죽음
젊어서 한번쯤 기타에 홀려보지 않은 사람이 그리 흔할까마는, 이 사람의 경우는 좀 정도가 심했던 모양이다. 틈만 나면 기타를 잡고 흥얼거렸고 그렇고 그런 동료들과 어울려 음악을 한답시고 여러 밤을 지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후 들어오신 새어머니, 그리고 완고한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즐거움은 기타 밖에 없었다. 공부 잘 해서 명문대학을 간 학생들도 대학가요제 나간다고 기타 연습하다가 머리통에 기타가 떨어지곤 했다는데 공부든 돈이든 일생에 유용한 곳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젊은이의 부모가 그 젊은이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고 물 보듯 투명하다. 거기다 그는 사고 목록의 맨 끄트머리이자 하이라이트인 사고마저 달성한다. 어느 여자와의 사이에서 덜커덕 애를 낳은 것이다.
여자 고르는 안목도 좋지 않았던지 여자는 애를 낳은 후 이내 남편과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래도 기타를 놓지 않고 뚱땅거리는 남자에게 그 부모는 인내심을 잃었다. “썩 나가 없어져라. 이 밥버러지야. 그놈의 기타 들고 어서 없어져 버려!”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집을 남자는 허위허위 나와야 했다. 딸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딸을 데리고 나갈 엄두는 꿈에도 나지 않았다. 딸은 할아버지의 호적에 등재되어 자랐다.
“너는 아버지랑 사냐 할아버지랑 사냐.”는 놀림을 받으며 자란 딸을 만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집에 와서 멋들어지게 기타를 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딸은 오랜 동안 가슴에 새겨 넣어 두었다. 그 뒤 열일곱이 됐을 때 딸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하지만 아스라한 추억 속의 멋진 기타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초라한 밤무대의 싸구려 악사였다. 어린 날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딸은 모질게 마음 먹는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버릴 거야.”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 남은 딸은 다시 아버지를 찾는다. 이미 여러 해 연락이 끊긴 터라 자신의 힘으로 찾기 어려웠는지 딸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의뢰하여 그 주인공이 된다. 이제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버지와 스물 여섯의 딸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딸을 만난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기구한 삶을 꾸려온 아버지가 그 딸을 만나 어깨를 어루만지며 눈물 짓고 딸이 차려주는 밥상을 앞에 하고 가슴을 쳤던 것은 2003년 말이었다.
그럼 남자는 어떻게 살았던가. 이미 늙어버려 손도 둔해지고 음악적 성취도 무망해진 그는 기타를 놓아 버리고 현대중공업 하청공장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역시 술 마시면 기타 잡고 노래 구성지게 불러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던 그는 싸구려 악단의 악사로 일하면서 세상의 쓴맛단맛 다 본 처지였지만, 하청업체에서 발생하는 기상천외한 불평등과 불공정에 분노했다. 현장 소장에게 두들겨 맞고 민주노총에 가서 하소연한 것은 자갈처럼 널린 사연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하청업체 사장이 월급 소급분을 빼돌린 것을 알고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고 ‘하루 일당을 제끼는’ 작업 거부를 조직, 소급분을 토해 내게 만든 일은 그 인생에서 흔치 않았던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한마음회’라는 사내 모임을 만들어 하청 노동자들의 슬픔과 애환을 모아 목소리를 내고 힘을 키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싸구려 악단의 기타리스트는 그렇게 하청 공장의 조직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하청업체 뿐이 아니라 현대중공업이라는 대기업이었고 또 하나, 왕년의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이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화석이 되어 버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었다. 그의 해고 사유가 된 유인물에서 그는 여실히 드러난다. "자칭 세계1등 조선소 현대 조선소에게, 인터기업 사장은 각오하라, 최윤석 집행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현대조선소, 인터기업, 그리고 최윤석 집행부. 그가 외친 주장을 들어 보자. 여기에는 ‘임금 인상’조차 없다. "연말 성과금, 설,휴가, 하기휴기비 지급, 일당(상용일급제)직의 주차, 월차, 연차, 연장근로가산임금, 예비군훈련 법정 근로시간 인정" 뿐이었다. 다 빼놓고 ‘주차’ 한 단어가 눈에 띈다. 정규직들에게 주어진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대지 못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와야 하는 사람들. 그걸 보고도 무심한 ‘노동조합’에게 하청 노동자가 된 기타리스트는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2003년 말은 그에게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임한 시기였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딸을 만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동시에 2003년 12월 31일 현대 측은 하루 아침에 그의 전산 기록을 말소하여 출입을 통제했다. 즉 쉽게 말하면 해고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아무데도 발디딜 데 없는 허공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2004년 2월 14일 평생 고독한 기타맨이었고 외로운 하청 노동자였던 박일수는 현대중공업 내 4, 5도크 뒤 선실생산부 사무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그 죽음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의 유서 앞에서 그 말을 꺼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는 시신을 앞에 두고 농성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시작된 56일간의 ‘장례 투쟁’에 감히 눈길도 주지 못할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초콜렛이 산처럼 쌓인 가게들을 지나, 평생 몇 번 보지 못한 딸을 그리며 쓸쓸히 죽음을 향해 걸었던 한 남자, 박일수가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보낸 유서같은 편지를 일부 옮긴다.
“너도 알다시피 전산처리 해서 삭제된 거 때문에 장기적인 것은 실현이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해. 'KBS추적60분'에 경위서 및 자료, 유서 등을 소포로 보냈다. 내 목숨 귀한 것 나도 알아, 그런데 주어진 눈앞에 보여진 상황이 노동에 관련한... 현대중공업 하청문제의 곪고 썩어있는 것들이 모두가 껍데기뿐이니, 법에 호소해야 그리고 신고하면, 법적으로 처리해주는 형식적인 것이 지금의 현실 아니냐. 이것은 아니다 싶다. 갖고 있던 생각, 보고 느낀 것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으나 한계에 부딪치는 것에 대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다는 못 바꾸더라도 20-30%라도 바꿔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나의 죽음으로 사회가 개혁되길 바란다. 그냥 살아봐야 쥐새끼 같을 뿐이다.
(중략)
하청노동자 고통줘서 쥐어짜서 주면 피해자는 누구냐 이거야. 자기 논 팔아서 자기가 하느냐 이거야. 지 챙길거 다 챙겨가고는 썩게 하느냐 이거야. 비정규직 문제 구체적인 해결은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안된다. 힘을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고 이론인 듯 싶다. 나도 희망이 왜 없겠어.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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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귀족노동자 하청노동자로 태어나지 않았고 어떡하다보니 직영노동자,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로 살 뿐인데 직영노동자라 하여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만하고 멸시할 자격은 없다. 이런 현대 개좃같은 풍토가 개선되어야 한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이면서 박일수라는 한 고독했던 사람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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