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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2.18 대대장 사단장 사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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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2월 18일 대대장 사단장 사살하다 

육군 28사단은 무적태풍부대라고 불리우는 전방 부대입니다. 휴전선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태풍 전망대를 운용 중이며 임진강이 최초로 남쪽으로 유입되는 지점을 맡고 있어서 간첩도 여럿 잡아 표창도 많이 받은 부대죠. 그런데 이 28사단은 불시에 사단장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대입니다. 6.25의 그 난리통을 치르면서도 사단장이 계급장 떼고 도망간 적은 있어도 총에 맞아 죽은 적은 없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이 전사했지만정상적인 부대를 이끌고 있지 않았었고 김백일 소장이나 이용문 준장은 비행기 사고로 죽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된 1959년 육군 태풍부대 사단장이 총을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범인은 인민군 특공대도 아닌 예하 1대대장이었습니다. 1959년 2월 18일의 일이고, 그 해 10대 뉴스로 선정된 사건이었죠. 

사연인즉슨 상관인 6군단장 백인엽 (어 재수없는 이름이죠.... 백선엽의 악명높은 동생)이 정찰 훈련을 참관하겠다는 지시를 내려서 사단장 서정철 준장은 대대정찰 시범을 실시한다고 예하부대에 명령하지요. 그 정찰 시범이 실시되기 전날 서정철 준장은 1대대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형태로 훈련이 진행 중이었고 이에 시정 지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대대장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이의를 제기했고 사단장은 이에 뚜껑이 열립니다. 


까라면 까는 거지 말이 많아부터 빠져 가지고 등등의 멘트가 당연히 튀어나왔겠죠. 할아버지를 전 법무부 장관으로 두고 일본군 학병 출신으로 군사 경험이 많았던 군인이었으니 이런 식의 부하의 항명을 더더욱 용납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휘봉으로 배를 콱콱 쑤시면서 몰아붙이는데 1대대장 정구헌 중령 역시 소문난 엘리트 군인으로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처지여서 그랬는지, 곱게 관등성명 외치면서 시정하겠습니다 하면 될 것을 “이건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맞대응을 합니다. 그러자 사단장의 주먹이 득달같이 날아갔죠. 


사실 요즘 군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한국군 현실로 보면 꼭 불가능했던 것도 아닌 것이 그때 사단장 나이는 서른 아홉, 대대장 나이는 서른 넷의 새파란(?) 나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훈련을 지시한 백인엽 군단장은 서른 여섯이었지요. 고만고만한 나이에 별이다 무궁화다 갈리고 계급이 깡패라고 조인트 까이고 두들겨 맞으니 눈에 불이 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대충 끝냈으면 되는데 연대장이 뜯어말려 사단장이 대대장실로 들어가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 중령은 대대장실로 들어가기 전 사단장이 권총을 장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들었다라고 주장합니다). 사단장이 아예 나에게 총을 쏘려는구나 생각한 정 중령이 대대장실에 들어가자 사단장은 “꼴도 보기 싫으니 뒷문으로 나가라.”라고 소리를 지르죠. 이때 정중령은 뒷걸음질쳐서 문을 나갔다고 하니 이미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나가면거 그는 자신의 권총에 장탄을 했고 따라나오는 사단장에게 총알을 퍼붓습니다. 사단장은 비명도 못지르고 죽고 말지요. 

당연히 정 중령은 초유의 하극상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동료들에 따르면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이면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군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하사관 요원의 확보였습니다. 군대의 등뼈라고 말은 하지만 처우도 불량하고 사병들한테 치받히고 장교들한테 짓밟히기 일쑤였던 하사관, 즉 장기복무 (전문용어로 말뚝)를 지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요. 그래서 부대별로 부대장들은 예하 장교들에게 어떻게든 하사관 자원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온갖 회유와 협박, 심지어 가정방문(!)까지 해 가며 하사관 지원을 받으려고 발버둥쳤다고 합니다. 28사단 역시 상급부대인 6군단으로부터 무진장한 압박을 받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구헌 중령은 대대장직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지망하지 않은 사람을 양심상 도저히 반강제적으로 지망케 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합니다. 당연히 1대대의 하사관 지망율은 사단 꼴찌였구요. 군단장에게 시달릴대로 시달린 사단장은 이를 못마땅해했고 결국은 그 갈등이 작전 상의 이견다툼으로 불거져 나와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둘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정구헌 중령은 부사단장이 쌀을 상납하라는 요구를 거절할만큼 강직한 사람이었고 사단장 서정철 준장도 사병들에 대한 ‘정량 급식’을 이행하지 않은 이들만큼은 용서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군인이었다지요. 하지만 이 둘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죽이게 됩니다. 

<노병의 증언>에 나오는 당시 작전참모의 말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6군단장은 절대 하사관 지원자 확보문제에 대해서 사단에 강요한 적이 없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나섰다. 정 대대장이 연대장과 함께 동행하여 군단에 자수할 단계에서나 재판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은 군의 명예와 군단장의 책임문제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 것을 염려하여 문제를 축소 조작한 것으로 본다.” 결국 백인엽 군단장 이하 대한민국 군대는 사건의 핵심을 비껴서 한 혈기넘치는 대대장의 또라이짓 정도로 이 사건을 축소했고 그렇게 유야뮤야 한 사람의 총살로 문제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정구헌 중령은 “밝히지 않은 진실”이 있다고 말하면서 담담하게 죽어갑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70노모와 처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는것이 미안하며, 앞으로 자신의 개인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구타하거나 혹사시키는 군대 악습이 없어지길 빈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양심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 자부한다. 깨끗이 죽는다.” 그런데 그 악습은 50년이 지나도록 근절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언에서 말한 구타와 혹사의 악습은도 그렇거니와 두루뭉술한 사고처리와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 그리고 '안되는 일 되게 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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