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사라는 건 변덕이 심합니다. 때론 급류지만 때론 아주 완만한 곡류를 흘러 땅을 감아돌고 그러다가 폭포를 이루어 모든 것을 쓸어내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폭포 다음에는 대개 넓디넓고 단조로운 장강을 이루기도 하구요. 거슬러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정치 체제를 결정한 건 87년의 6월 항쟁입니다. 밉든 곱든 좋든 싫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을 규정하는 건 87년 6월 항쟁이고 그 뒤에 이뤄진 9차개헌이고 그를 통해 이뤄진 제 6 공화국입니다.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참여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결국은 5년 단임제에 충실한 6공화국에 속합니다. 우리가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도 대략 4월에 총선을 치르는 것도 결국은 그 꼬리에 닿는 것이죠
하필이면 그 추운 12월에 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전두환의 퇴임 임기에 맞추기 위해섭니다. 전두환이 1981년 2월 25일 제 12대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이에요. 말끝마다 자기는 7년만 하겠다고 했으니 1988년 2월 25일에는 퇴임해야 했고 최소 그 두 달 전에는 다음 정권의 임자가 정해져야 했던 거죠. 그래서 부랴부랴 선거가 치러진 거고요.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권 교체 세레모니는 항상 2월 25일에 이뤄지게 된 겁니다. 그건 올해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과거는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퇴장합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전에 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시 우리 역사의 한 전환점이었습니다. 85년이면 대학가에서 세 명만 모여도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던 83년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고 신군부가 사형 선고를 내린 김대중이 미국에 갔다가 귀국했으며 그와 김영삼이 손을 잡고 만든 신당의 태풍이 밀어닥칠 때였죠. 법률상 국회의원 선거일은 꽃 피고 새 우는 3월 중순에 치러도 충분했습니다. 임기 만료 20일전까지만 치르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정부는 엄동설한 중이라 할 2월 12일로 선거일을 발표했습니다. 구정 전에 선거를 치러 과열과 혼탁을 막겠다고 했지만 진짜 목적은 한창 세를 불리며 바람을 일으키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당이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전에 선거를 치르려는 데에 있었겠죠. 거기다가 정치 규제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로서는 당시 송원영 후보 말모냥 “100미터 경주를 하는데 자기들은 80미터 지점에서 뛰겠다는 것”이었죠.
그때만 해도 ‘합동연설회’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트럭 개조한 차 타고 다니며 짬날 때마다 사람 모이는 곳마다 열변을 토하는 게 아니라 모일 모시에 모 학교 운동장에 모여 그 지역구의 선량들의 ‘합동 연설’을 들었던 겁니다. 당시 부산진구의 합동 유세가 제 모교인 양정초등학교에서 열렸고 고등학생이 되기 직전의 까까머리를 한 저는 그 유세에 참여했었습니다. 물론 구경꾼으로서죠.
2.12 총선을 앞둔 분위기는 가히 만석보 터진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부산진구 신민당 후보였고 후일 보사부장관을 지내는 김정수의 열변은 당시까지도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던 초보 고딩을 패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5.16 쿠데타가 결국 5.17 전국 계엄령을 낳았고 그는 5.18 광주로 이어졌다.” 그의 선거 캠프가 뿌린 유인물의 왼쪽 첫머리는 저 유명한 사진, 즉 고개를 숙인 대학생의 멱살을 잡고 곤봉을 내리치려는 공수부대의 얼굴을 시커멓게 가린 그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5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들었습니다. 간첩들이 횡행하고 복면을 한 괴한들이 국군과 싸운 아수라장 무법 천지의 야차들이 다름아닌 공수부대였다는 것도 말입니다.
많은 이름들이 등장했던 선거였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사형수 이철이 성북구에 출마했고 한때 한나라당 대표로서 그 빛나는 매부리코를 수시로 들이밀었던 강삼재도 마산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부산 시장 후보로 나왔던 김정길은 몇 번 미역국을 마신 끝에 “이번에도 저 김정길을 영도 다리 울며 건너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외치며 부산 중 동 영도에 출마했었지요. 서울 동작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헌병대장 출신의 허청일 후보에게 “군 출신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암모니아를 퍼붓기도 했고, 대학생들은 신당 후보를 따라다니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지요.
그 해 2월 11일,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놀아 보겠다고 마구 쏘다니던 즈음 어둑어둑한 양정로터리 부근에서 대여섯 명의 청년과 아주머니들이 손팻말을 들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기권만은 하지 맙시다. 부정선거에 이용됩니다.” “누구를 찍든 기권은 하지 맙시다.” 기권을 하게 되면 그 명부를 이용한 대리투표를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누구를 지지하자도 아니고 부정선거에 이용될 수도 있으니 기권만은 말아 달라는 그들의 호소는 투표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게도 찡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그 거리를 지나던 많은 이들 역시 그랬을 겁니다. 투표율은 이승만 축출 이후 최고였습니다. 84.6 퍼센트. 1985년 2월 12일은 엄동설한 중이었지만 동토를 뚫고 분출하는 물줄기가 터진 날이었고 군홧발에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스스로의 힘과 의기를 확인했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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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사라는 건 변덕이 심합니다. 때론 급류지만 때론 아주 완만한 곡류를 흘러 땅을 감아돌고 그러다가 폭포를 이루어 모든 것을 쓸어내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폭포 다음에는 대개 넓디넓고 단조로운 장강을 이루기도 하구요. 거슬러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정치 체제를 결정한 건 87년의 6월 항쟁입니다. 밉든 곱든 좋든 싫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을 규정하는 건 87년 6월 항쟁이고 그 뒤에 이뤄진 9차개헌이고 그를 통해 이뤄진 제 6 공화국입니다.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도 참여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결국은 5년 단임제에 충실한 6공화국에 속합니다. 우리가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것도 대략 4월에 총선을 치르는 것도 결국은 그 꼬리에 닿는 것이죠
하필이면 그 추운 12월에 선거를 치르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전두환의 퇴임 임기에 맞추기 위해섭니다. 전두환이 1981년 2월 25일 제 12대 대통령에 올랐기 때문이에요. 말끝마다 자기는 7년만 하겠다고 했으니 1988년 2월 25일에는 퇴임해야 했고 최소 그 두 달 전에는 다음 정권의 임자가 정해져야 했던 거죠. 그래서 부랴부랴 선거가 치러진 거고요. 동시에 대한민국의 정권 교체 세레모니는 항상 2월 25일에 이뤄지게 된 겁니다. 그건 올해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과거는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퇴장합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전에 1985년 2월 12일, 2.12 총선 역시 우리 역사의 한 전환점이었습니다. 85년이면 대학가에서 세 명만 모여도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던 83년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유화국면으로 접어들었을 때고 신군부가 사형 선고를 내린 김대중이 미국에 갔다가 귀국했으며 그와 김영삼이 손을 잡고 만든 신당의 태풍이 밀어닥칠 때였죠. 법률상 국회의원 선거일은 꽃 피고 새 우는 3월 중순에 치러도 충분했습니다. 임기 만료 20일전까지만 치르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정부는 엄동설한 중이라 할 2월 12일로 선거일을 발표했습니다. 구정 전에 선거를 치러 과열과 혼탁을 막겠다고 했지만 진짜 목적은 한창 세를 불리며 바람을 일으키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당이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전에 선거를 치르려는 데에 있었겠죠. 거기다가 정치 규제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로서는 당시 송원영 후보 말모냥 “100미터 경주를 하는데 자기들은 80미터 지점에서 뛰겠다는 것”이었죠.
그때만 해도 ‘합동연설회’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트럭 개조한 차 타고 다니며 짬날 때마다 사람 모이는 곳마다 열변을 토하는 게 아니라 모일 모시에 모 학교 운동장에 모여 그 지역구의 선량들의 ‘합동 연설’을 들었던 겁니다. 당시 부산진구의 합동 유세가 제 모교인 양정초등학교에서 열렸고 고등학생이 되기 직전의 까까머리를 한 저는 그 유세에 참여했었습니다. 물론 구경꾼으로서죠.
2.12 총선을 앞둔 분위기는 가히 만석보 터진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 부산진구 신민당 후보였고 후일 보사부장관을 지내는 김정수의 열변은 당시까지도 대통령 각하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던 초보 고딩을 패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5.16 쿠데타가 결국 5.17 전국 계엄령을 낳았고 그는 5.18 광주로 이어졌다.” 그의 선거 캠프가 뿌린 유인물의 왼쪽 첫머리는 저 유명한 사진, 즉 고개를 숙인 대학생의 멱살을 잡고 곤봉을 내리치려는 공수부대의 얼굴을 시커멓게 가린 그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5년만에 처음으로 다시 들었습니다. 간첩들이 횡행하고 복면을 한 괴한들이 국군과 싸운 아수라장 무법 천지의 야차들이 다름아닌 공수부대였다는 것도 말입니다.
많은 이름들이 등장했던 선거였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의 사형수 이철이 성북구에 출마했고 한때 한나라당 대표로서 그 빛나는 매부리코를 수시로 들이밀었던 강삼재도 마산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부산 시장 후보로 나왔던 김정길은 몇 번 미역국을 마신 끝에 “이번에도 저 김정길을 영도 다리 울며 건너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외치며 부산 중 동 영도에 출마했었지요. 서울 동작구에서는 대학생들이 헌병대장 출신의 허청일 후보에게 “군 출신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암모니아를 퍼붓기도 했고, 대학생들은 신당 후보를 따라다니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지요.
그 해 2월 11일,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놀아 보겠다고 마구 쏘다니던 즈음 어둑어둑한 양정로터리 부근에서 대여섯 명의 청년과 아주머니들이 손팻말을 들고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었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기권만은 하지 맙시다. 부정선거에 이용됩니다.” “누구를 찍든 기권은 하지 맙시다.” 기권을 하게 되면 그 명부를 이용한 대리투표를 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지요. 누구를 지지하자도 아니고 부정선거에 이용될 수도 있으니 기권만은 말아 달라는 그들의 호소는 투표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제게도 찡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 그 거리를 지나던 많은 이들 역시 그랬을 겁니다. 투표율은 이승만 축출 이후 최고였습니다. 84.6 퍼센트. 1985년 2월 12일은 엄동설한 중이었지만 동토를 뚫고 분출하는 물줄기가 터진 날이었고 군홧발에 숨죽이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스스로의 힘과 의기를 확인했던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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