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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2.11 최초의 야구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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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5년 2월 11일 최초의 야구 경기 

20세기가 채 밝아오기 전의 1899년 15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모여 기독교 청년 운동 조직의 필요성을 천명하고 그를 도와 줄 것을 국내외에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의 바람은 곧 응답을 받았다.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기독교 학생회 YMCA 조직이 결성됐고 해외에서도 한국의 기독교 청년 조직 YMCA를 일으켜 세우려는 노력이 잇따랐다. 나이 서른의 열정적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건너온 것은 바로 이 한국 YMCA 창설의 임무를 띠고서였다. 

고참 선교사 언더우드에 따르면 “매우 젊고 정력적이며 열정적인 청년”이었고 역시 선교사 게일도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인재가 왜 이런 오지에 와서 고생을 하는지 정말 대견스러운 일”이라고 찬미할 정도로 반듯한 젊은이였던 그가 우선 노력한 것은 바로 한국말 익히기였다고 한다. 선교를 하려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는 한국인 청년과 어울려 등산을 다니며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그럴듯한 한글 이름도 지었다. ‘길례태’가 그의 한국 이름이었다. 그는 1901년 황성 YMCA 간사가 됐고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종로 YMCA 회관을 건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는 YMCA의 산파 이외에도 한국 스포츠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더우드가 말한바 유달리 ‘정력적’이었던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스포츠를 통해 조선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테니스를 치는 외국 외교관들더러 “왜 그 힘든 것을 하인 시키지 않고 직접 하느냐?”고 물었다는 대한제국 관료들과는 달리 한국의 청년들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다. YMCA가 임시로 들어 있던 종로 태화관 앞에서 미국 공사관을 경비하던 미군들이 캐치볼을 하며 놀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질레트는 무릎을 쳤다. “요걸로 한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자.” 질레트는 즉시 야구용품을 미국에 주문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야 배트와 글러브 등이 사상 최초로 한국에 등장했다. 

골대 두 개 세우고 거기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는 룰을 지닌 축구와는 달리 야구는 매우 복잡한 룰에 둘러싸인 경기였고 그 규칙 하나 하나를 습득시키기 위해 질레트는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수비수를 방해하거나 심지어 밀쳐 버리는 주자가 없나, 태그당하지 않겠다고 저 멀리 달아나 버리는 주자가 없나, 파울을 치고도 번개처럼 베이스를 도는 이가 없나 하여간 질레트는 수십 수백 번이나 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래도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배트가 없으면 곡괭이 자루를 휘둘렀고 글러브가 없으면 가죽으로 손을 싸서 받으며 한국인들은 야구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초기의 혼란상을 극복하고 마침내 1905년 2월 11일 공식적인 첫 야구 경기가 열린다. YMCA 대 한성 덕어학교 (독일어학교) 학생들의 대결. 

우리가 봤던 영화 <YMCA 야구단>의 모습 그대로라고 해도 무방한 풍경이 펼쳐졌다. 단발한 개화 신사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상투를 틀고 배트라고 하기엔 민망한 나무 방망이를 휘둘렀고 땋은 머리 휘날리며 홈으로 달리는 소년 주자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엉망진창이었던 황성 YMCA 야구단은 곧 국내 최강의 야구팀이 됐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후발 약팀들은 “타도 황성”의 기치를 내세우며 칼을 갈았다. 질레트는 이 조선 최강팀을 거느리고 평양 원정에 나서는 등 야구 보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조선 최강이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케 했던 사건도 있었다. 보무도 당당히 일본 원정에 나선 YMCA 야구단이 와세다 대학에게 23대 0으로 코가 깨지는 등의 참사를 당한 뒤 동포들의 원망이 두려워 비밀리에 귀국했던 것이 그 예가 되겠다. 

질레트는 야구를 도입한 사람이면서 농구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의 일은 점차 스포츠보다는 사회적인 영역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양심적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YMCA의 책임자로서 그는 불온 사상의 온상으로 지목되던 기독교 청년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 총독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조작 사건을 통해 민족운동가들을 굴비 두름 엮듯 끌고 갔던 이른바 105인 사건을 보면서 질레트는 격노했다. 특히 YMCA 부회장인 윤치호가 잡혀간 것은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105인 사건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서신을 영국 에딘버러 기독교 선교협회에 보냈고 이게 중국 언론에 보도됨으로서 일제의 눈의 가시가 되고 말았다. 

일제는 그를 조선에서 내보내려고 기를 썼고 결국 중국으로 간 질레트에게 “조선의 사회운동에 개입하지 않으면 귀국하여 계속 YMCA를 맡아도 좋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죄없는 윤치호를 즉각 석방하라 그러면 돌아가겠다.”고 맞섰다. 그 뒤 질레트는 중국에서 활동하면서도 계속 한국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었고 상해 임시 정부에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한 그의 다짐은 일제의 농간에 막혀 이뤄지지 못했으나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딸을 잃었고 그 딸은 지금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그 딸의 태를 묻고 시신을 묻은 한국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벌어지는 야구의 향연을 보면서 그는 108년 전의 그날을 그리면서 싱긋 웃어 볼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그 석방을 귀국 조건으로까지 내걸었던 옛 동료 윤치호에게는 서툰 한국 말로 이렇게 묻지는 아니했을까 “미스터 윤. 당신 나랑 일할 때 당신은 똑똑하고 열정적인 한국 청년이었는데 어쩌다가 당신의 일생을 그렇게 낭비한 거지요?” 질레트가 선교 활동 와중에 조선 독립 운동을 후원하는 동안 윤치호는 “독립만세는 바보짓”이라며 냉소를 흘리면서 되지 않을 일에 피 쏟고 땀 빼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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