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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2.6 조지 6세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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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2년 2월 6일 영국왕 조지 6세 서거 

“이혼녀와의 결혼을 동의할 수 없음이라. / 나중에 부적격하다고 판가름날 것이기에
섬나라 왕은 쫓겨나야 할 운명이니 / 엉뚱한 자가 그 대신 옥좌를 차지하도다. ”

만약 정말로 16세기에 노스트라다무스가 이 예언시를 쓴 것이 정녕 맞다면 나는 그의 예지를 인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 예언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이 성취되었기 때문이죠. 1936년 12월 정확히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이유와 배경으로 영국왕 에드워드 8세는 퇴위하고 엉뚱한 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국왕과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영국 국민들과 내각은 용납할 수 없었고 수상은 퇴위 후 결혼이냐 연인과의 결별이냐를 선택하라고 왕에게 상주합니다. 이때 에드워드가 남긴 말 한 마디는 매우 멋드러집니다. 
“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and to discharge my duties as king as I would wish to do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 왕으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더 이상 지탱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노라.) 

이렇게 사랑을 위해 왕관을 내던진 로맨틱 가이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에드워드 8세는 왕가의 골칫덩이였다지요. “백성은 나를 일컬음이라.”고 한 말로 유명한, 책임감 백퍼 충전의 아버지 조지 5세는 이 왕세자를 두고 “이 녀석은 내가 죽으면 단 1년 내에 망가져 버릴 거야!”라고 호언했지요. 나이 마흔 되도록 장가도 안가고 숱한 여자와 염문을 뿌리는 거까진 좋은데 왜 사귀는 사람마다 유부녀 아니면 이혼녀인지 이 엄한 부왕은 환장할 밖에요. 하지만 세월이 가서 조지 5세도 죽습니다. 말썽쟁이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긴 하지만 이내 사단이 나죠. 앞서 말한 심프슨 부인 문제가 터진 겁니다. 그 바람에 벼락치기 왕위에 오른 이가 그의 동생 조지 6세입니다. 작년에 영화 <킹스 스피치>를 보신 분들은 아 그 말더듬이? 라며 킬킬거리시겠죠. 네 바로 그분입니다. 

허우대 멀쩡하고 말도 잘하는 형에 비해 동생은 어려서부터 말더듬이였고 유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 (유모가 정신질환자였다는군요) 위에 병을 얻어 평생 지니고 살았다고 합니다. 왕이 될 생각은 꿈에도 않고 그저 자신이 평생 사랑하리라 맘 먹은 아내와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한세상 보내면 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왕이 된 겁니다. 이 심약한 왕은 아내를 붙들고 펑펑 울었답니다. “내가 와...와....왕이라니! 내....내...가 왕이라니!” 어디 왕 뿐입니까. 1차대전 이후 미국한테 자리를 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황제 폐하인데 말이죠. 어머니에게 달려가 못하겠다고 떼를 쓰기도 한 모양이지만 도리가 있나요. 

하지만 세계는 이 준비 안된 왕이 제대로 국왕 수업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기고만장이 절정에 달한 히틀러는 연신 유럽을 향해 장광설을 퍼부으며 독일인의 ‘레벤스라움’ (생활 영역)을 주창하고 있었지요. 퇴위한 형은 은근 히틀러를 찬양하면서 딴지를 걸고 있었고 전쟁의 시침은 착착 디데이 에이치 아워를 향해 움직여 갔습니다. 그리고 국왕 조지 6세가 말더듬이 교정 훈련을 한창 받고 있었을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서막이 오릅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들을 향해 연설하게 됩니다. 영화 속 그 장면이죠. 

“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이 암울한 시간이 어쩌면 역사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늘 이 땅과 해외에 나가있는 영국 국민들에게 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방문하여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국민 여러분, 멀리 해외에서 듣고 계신 국민 여러분, 마음을 모아 주십시오. 침착하면서도 결연한 자세로 다 함께 고난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영화에서는 완전 불독 형상의 윈스턴 처칠이 명연설이었다고 추켜세우지만 실제 조지는 잘 해 냈습니다. 여유도 있었습니다. 언어치료사 라이오넬의 회고에 나와 영화에도 반영된 얘기지만 “복모음 발음이 좀 이상했습니다 전하.”라고 하자 “나인 줄 알라고 일부러 그랬어.”라고 맞받을만큼 말입니다. 하지만 조지 6세의 역할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그와 왕비는 런던의 반이 잿더미가 되는 나찌 공군의 폭격 속에서도 버킹검 궁을 지켰습니다. 1940년 9월 폭격 때는 버킹검 궁이 직격탄을 맞습니다. "우리가 서로 멍청히 바라보는 순간 폭탄은 우리를 지나 안뜰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왕비 엘리자베드) 그러나 그 경황 중에 부서진 건물 틈 사이로 런던의 이스트엔드가 보이자 왕비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이제 버킹검 궁에서 이스트엔드가 보이네요.” 

관리들이 안달복달을 하며 왕과 왕비의 피신을 권유하지만 둘은 버킹검을 떠나지 않습니다. 버킹검이 폭격을 받은 바로 그날 오후 왕비는 폭격 맞은 이스트엔드를 돌며 집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조지 6세는 곳곳의 전장을 방문하며 군인들을 격려했고 지중해의 영국령 몰타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상공세를 물리치고 끝끝내 섬을 지켜내자 순양함에 올라타고 몰타를 방문하여 몰타 시민 전체에게 성 조지 훈장을 수여합니다. (이 훈장은 지금도 몰타의 국기에 새겨져 있지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열흘 전에는 몸소 진중으로 뛰어들어 병사들과 만나 그들을 격려합니다. 그런 왕이었기에 God save the king으로 시작하는 영국의 국가는 영국군들의 피를 끓게 했고 영국인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전쟁이 끝났을 때 미친 듯 환호하는 영국인들은 버킹검 궁 앞으로 몰려와 We want king!을 연호하게 된 것이겠지요. 

전쟁의 스트레스와 그를 달래려던 흡연은 그의 건강을 허물었지만 그는 역시 허물어져 가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미 인도의 황제는 아니었지만 죽을 때까지 파키스탄의 국가원수로 남아 있었고 영연방의 영수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친선 사절 노릇을 했지요. 남아공에 갔을 때 흑인들의 접촉을 가로막는 백인 경찰들에게 기겁을 하고는 “게슈타포 같은 놈들”이라고 힐난했을 만큼 절도 있고 경우 있는 왕이기도 했고요. 그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나이 쉰 일곱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지요. 하지만 말썽쟁이 형 때문에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는 평을 듣던 왕정을 반석 위에 올려 놨고 그 딸은 60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이 조지 6세의 삶을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왕이 없었을까.” 그러면서 자답하게 됩니다. “뭐 그 백성에 그 왕 아니었겠어.”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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