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6년 1월 30일 어느 열심히 살았던 인간의 최후
1956년 1월 30일 원효로 1가. 지프차 한 대가 옥인동 육군 특무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별 두 개를 어깨에 매단 작달막한 장군이 앉아 있었다. 별안간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좁디 좁은 길에서 차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운전병은 차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한 치라도 주저하다간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지금 운전병이 모시고 있는 이는 별 넷 짜리가 떼를 지어 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군부 내의 실세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었다. 운전병이 득달같이 달려가는 찰나 근처에 숨어 있던 괴한들이 차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있던 김창룡에게 권총을 쏘았다. 나이 서른 여섯 (실제 나이 마흔)의 특무대장은 아이쿠 소리를 내며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양치성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구걸을 일삼다가 동냥을 베풀어 주는 일본인들로부터 일본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고 일본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되고 조선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일본에 대한 충성과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이들에 대한 적의로 풀었던 일본군 밀정. 이는 김창룡의 인생 경로와 유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영흥잠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측량 기사를 했다고 하니 성실하고 머리도 좋았던 것 같다. 일본어는 기본으로 하고 중국어도 유창했던 그는 만주철도회사 (만철)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역무원으로 근무하는데, 여기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이근면하고 머리 잘 돌아가는 조센징을 어여삐 여긴 일본인 역장이 그의 등을 떠밀어 관동군 헌병학교에 입대하도록 한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밀정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한다. 중국의 비밀 공산당원이었던 식당 주인의 조직을 염탐하기 위해 그 점원으로 들어가 성실히 일하고 심지어 영하 40도의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 밥을 해 바쳐 가며 충성을 다한 사례는 유명하다. 그렇게 신임을 얻은 후 그는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조직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를 무력화시킨 공로로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오장이 된다. 영화 <아리랑>의 양치성이 일본을 다녀온 이후 “일본은 대궐 조선은 헛간”이라고 자조하고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에 충성했던 것처럼, 김창룡 또한 오장 계급장을 달았을 때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조선 천지에서 그만큼 ‘열심히’ 산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데 덜컥 일본이 패망했다. 김창룡이 충성을 다한 관동군도 패잔병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들은 해방됐다고 난리였지만 김창룡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에 남을 수도 없었던 그는 떨떠름하게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지만 왕년의 관동군 오장, 악명높은 밀정의 이력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철원에서는 왕년의 관동군 동료가 그를 고발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고 이번에는 사촌형제의 밀고로 잡혀서 두 번째로 사형 선고를 받지만 또 몸을 빼어 삼팔선 이남으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설 땅을 잃은 그는 남한에 와서 또 한 번 그의 재주를 ‘열심으로’ 발휘할 자리를 얻는다. 그에게 남은 것은 관동군 밀정으로 얻은 정보원으로서의 재주와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명을 다해 그 두 가지를 모두 발휘한다.
“여자들 붉은 치마만 봐도 경기를 한다.”는 쑥덕거림이 있을만큼 ‘빨갱이’에 민감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사적인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즉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은 죄다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이 “전기고문으로 지져 버리면 아무 말이든 불지 않을 놈이 어디 있느냐? 이 버러지같은 놈아!”라고 일갈했던 것은 그 단면의 하나다. 국방부 전사에서조차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서 희생된 장병들 가운데 억울한 이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총살대 위에서도 대한민국 만세와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짖으며 죽어갔음을 증언하고 있으니 김창룡이라는 이의 빨갱이 사냥이 얼마나 혹독했으며 동시에 얼척 없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번은 공군 장교 40여명 전원을 잡아들였는데 (여기에는 후일의 공군 참모총장도 끼어 있었다) 놀란 김정렬 대령 (6월 항쟁 이후 5공 정권의 총리를 맡았던 그 사람이며, 한국 공군의 원로)이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온 김창룡의 대답은 공안당국 어록의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아직까지 증거는 없으나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서.”
처음 한국군 경비대에 들어갈 때 그는 면접에서 “일본군대에서 배운 좋은 것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에 몸 바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징그러울 만큼 열심히 그 ‘몸’을 바쳤다. 사후 그 부하들이 증언한 조작 사건들 제목만 읊어도 그날 해는 저물 정도로.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으나 공 앞에서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은 용공으로 몰았다.”
이 김창룡이 성공적으로 숙군을 치러 내 6.25 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국군의 내부 이반이 없었고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았다며 김창룡을 떠받드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고자 한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그 사람은 그 가치와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유령은 좀체 저승으로 가지 않은 채 한반도 위를 떠돌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멀쩡한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아무나 보고 종북거리는 전직 아나운서나 자기 맘에 거스르면 다 종북인 양 설치는 전직 진보 논객이나 다 그 빙의의 희생양 같으니 말이다.
김구가 죽었을 때 문상조차 가지 않았던 이승만은 몇 번씩이나 빈소를 찾았고 전군의 가무음곡을 금하고 조기를 내걸라는 지시를 내리며 그 심복의 최후를 기렸다. “대한민국이 망했구나.”가 김창룡의 죽음을 접한 휘 일성이었다고 하니 그 충격과 슬픔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을 망친 혐의는 김창룡을 죽인 사람들이 아니라 김창룡 자신에게 더 크게 돌아갈 듯 싶다. 그의 삶도 그러했지만 당장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4.19 때 이승만 정권이 그리 맥없이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분분한 것이다.
김창룡의 비문을 쓴 것은 한국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였다. 그냥 감상해 보자. 모든 기록은 뒤집어서도 읽어야 한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추서)은 4289년(1956년-필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 아 -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김창룡은 지금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호국의 신으로서
tag : 산하의오역
1956년 1월 30일 어느 열심히 살았던 인간의 최후
1956년 1월 30일 원효로 1가. 지프차 한 대가 옥인동 육군 특무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별 두 개를 어깨에 매단 작달막한 장군이 앉아 있었다. 별안간 운전병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좁디 좁은 길에서 차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운전병은 차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한 치라도 주저하다간 대번에 불호령이 떨어질 터였다. 지금 운전병이 모시고 있는 이는 별 넷 짜리가 떼를 지어 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군부 내의 실세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었다. 운전병이 득달같이 달려가는 찰나 근처에 숨어 있던 괴한들이 차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있던 김창룡에게 권총을 쏘았다. 나이 서른 여섯 (실제 나이 마흔)의 특무대장은 아이쿠 소리를 내며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보면 양치성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구걸을 일삼다가 동냥을 베풀어 주는 일본인들로부터 일본어를 조금씩 익히게 되고 일본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되고 조선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일본에 대한 충성과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이들에 대한 적의로 풀었던 일본군 밀정. 이는 김창룡의 인생 경로와 유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영흥잠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측량 기사를 했다고 하니 성실하고 머리도 좋았던 것 같다. 일본어는 기본으로 하고 중국어도 유창했던 그는 만주철도회사 (만철)에 시험을 보아 합격하고 역무원으로 근무하는데, 여기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이근면하고 머리 잘 돌아가는 조센징을 어여삐 여긴 일본인 역장이 그의 등을 떠밀어 관동군 헌병학교에 입대하도록 한다.
이후 그는 물 만난 고기였다. 그는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밀정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과시한다. 중국의 비밀 공산당원이었던 식당 주인의 조직을 염탐하기 위해 그 점원으로 들어가 성실히 일하고 심지어 영하 40도의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 밥을 해 바쳐 가며 충성을 다한 사례는 유명하다. 그렇게 신임을 얻은 후 그는 ‘간첩단’을 일망타진했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조직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를 무력화시킨 공로로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오장이 된다. 영화 <아리랑>의 양치성이 일본을 다녀온 이후 “일본은 대궐 조선은 헛간”이라고 자조하고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에 충성했던 것처럼, 김창룡 또한 오장 계급장을 달았을 때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조선 천지에서 그만큼 ‘열심히’ 산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데 덜컥 일본이 패망했다. 김창룡이 충성을 다한 관동군도 패잔병이 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인들은 해방됐다고 난리였지만 김창룡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에 남을 수도 없었던 그는 떨떠름하게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지만 왕년의 관동군 오장, 악명높은 밀정의 이력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철원에서는 왕년의 관동군 동료가 그를 고발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출했고 이번에는 사촌형제의 밀고로 잡혀서 두 번째로 사형 선고를 받지만 또 몸을 빼어 삼팔선 이남으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설 땅을 잃은 그는 남한에 와서 또 한 번 그의 재주를 ‘열심으로’ 발휘할 자리를 얻는다. 그에게 남은 것은 관동군 밀정으로 얻은 정보원으로서의 재주와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명을 다해 그 두 가지를 모두 발휘한다.
“여자들 붉은 치마만 봐도 경기를 한다.”는 쑥덕거림이 있을만큼 ‘빨갱이’에 민감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사적인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즉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은 죄다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별 짓을 다했다.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이 “전기고문으로 지져 버리면 아무 말이든 불지 않을 놈이 어디 있느냐? 이 버러지같은 놈아!”라고 일갈했던 것은 그 단면의 하나다. 국방부 전사에서조차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에서 희생된 장병들 가운데 억울한 이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총살대 위에서도 대한민국 만세와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짖으며 죽어갔음을 증언하고 있으니 김창룡이라는 이의 빨갱이 사냥이 얼마나 혹독했으며 동시에 얼척 없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번은 공군 장교 40여명 전원을 잡아들였는데 (여기에는 후일의 공군 참모총장도 끼어 있었다) 놀란 김정렬 대령 (6월 항쟁 이후 5공 정권의 총리를 맡았던 그 사람이며, 한국 공군의 원로)이 이유를 물었을 때 나온 김창룡의 대답은 공안당국 어록의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아직까지 증거는 없으나 접촉할 가능성이 있어서.”
처음 한국군 경비대에 들어갈 때 그는 면접에서 “일본군대에서 배운 좋은 것을 가지고 조국의 군대에 몸 바치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가 생각한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징그러울 만큼 열심히 그 ‘몸’을 바쳤다. 사후 그 부하들이 증언한 조작 사건들 제목만 읊어도 그날 해는 저물 정도로. “일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으나 공 앞에서 전우가 없었고, 이해가 상반되는 사람은 용공으로 몰았다.”
이 김창룡이 성공적으로 숙군을 치러 내 6.25 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국군의 내부 이반이 없었고 그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았다며 김창룡을 떠받드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고자 한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라면 적어도 그 사람은 그 가치와는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유령은 좀체 저승으로 가지 않은 채 한반도 위를 떠돌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멀쩡한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아무나 보고 종북거리는 전직 아나운서나 자기 맘에 거스르면 다 종북인 양 설치는 전직 진보 논객이나 다 그 빙의의 희생양 같으니 말이다.
김구가 죽었을 때 문상조차 가지 않았던 이승만은 몇 번씩이나 빈소를 찾았고 전군의 가무음곡을 금하고 조기를 내걸라는 지시를 내리며 그 심복의 최후를 기렸다. “대한민국이 망했구나.”가 김창룡의 죽음을 접한 휘 일성이었다고 하니 그 충격과 슬픔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을 망친 혐의는 김창룡을 죽인 사람들이 아니라 김창룡 자신에게 더 크게 돌아갈 듯 싶다. 그의 삶도 그러했지만 당장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4.19 때 이승만 정권이 그리 맥없이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분분한 것이다.
김창룡의 비문을 쓴 것은 한국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였다. 그냥 감상해 보자. 모든 기록은 뒤집어서도 읽어야 한다.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중장(추서)은 4289년(1956년-필자주)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어 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가.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 아 -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김창룡은 지금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호국의 신으로서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