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5년 1월 23일 영원한 상록수 지다
“선생님, 선생님과 영원한 이별을 짓는 이 자리에 이 슬픈 마음을 누를 바 없어 눈물로 이 글을 선생님 영전에 바쳐 고별을 지으려 하는 어린 것들의 심장이 터지려 하나이다.” 추도사를 읽는 아이는 울음이 북받쳐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박박머리 아니면 상고머리의 아이들의 새까만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뒤에 서 있던 어른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물론 수염 허연 할아버지들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오늘날은 안산시 본오3동으로 빽빽한 도시의 일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교육과 문화 혜택이 전무한 오지였던 샘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총출동한 듯 했다. 조문객은 1000여 명, 근자에 보기드문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최용신이라는 나이 스물 여섯의 처녀였다.
그녀는 함경남도 원산 부근의 덕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마마 자국이 선연했던 그녀는 학교 졸업 "조선이 살려면 농촌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생판 찾아와 본 적도 없고 연고도 없는 경기도 안산으로 스며들었다. 당시의 농촌이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찾아와서 애들을 가르치느니 뭘 해 보자느니 하는 모습에 그리 관대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냉대와 오해도 잇달았지만 최용신은 끈덕지게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2008년 구술된 최용신의 옛 제자 이덕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8살 때까지 변화없는 생활을 했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것이다’ 생각했지. 1931년 11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샘골 예배당 강습소를 찾게 됐지. 지금도 그 길이 눈에 선해. 최용신 선생님을 만나고 새 세상이 열렸어. 신식공부를 했어. 노래, 체조, 동화듣기..... 선생님은 언제나 이 말씀을 하셨어. ‘너희들은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꾼이 될 수 있다.’ 어느날 5리정도 떨어진 우리 집에 선생님이 방문하셨어.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초가삼간 흙마당에서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어머니 이 아이는 자라서 크게 됩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 내시고 자랑으로 키우십시오. 곁에 있던 내게 살아 생전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
최용신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샘골을 방문한 교사이자 신학자 김교신은 최용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주 눈물을 보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인과 대화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큰 자취를 남기고 갔는지를 깨닫는다. 김교신이 읽는 그녀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그녀의 활약은 눈이 부시다기보다는 눈을 뜨겁게 한다. 도시 처자가 시골에 와서 뭘 안다고 깝치냐는 흰눈들 앞에서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맸으며 한글강습소를 세우고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가르쳤으며 산수, 수예, 노래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샘골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태극기를 희미하게 그려두고 수업을 하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하니 가히 그녀는 민족과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생각까지도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한때 강습소 학생이 110여명에 이르자 강습소가 잘되는 꼴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 당국이 개입하여 학생 수를 60명으로 제한한다. 그러자 최용신은 여기서 탈락한 아이들을 따로 꾸려 밤에 가르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YWCA의 지원이 끊겼다. 최용신은 강습소 경비를 대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 막대한 과로와 스트레스 속에 그녀는 재충전과 못다한 공부를 위해 고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귀국해서 고향으로 정양을 가 보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누워만 계셔도 좋다.”고 사정하는 통에 다시 샘골로 갔지만 여기서 그는 장협착증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걸려 세상을 뜬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샘골 강습소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진로는 어찌 하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뭘 못해 봤다거나 뭘 얻지 못했다거나 하는 스물 여섯 처녀의 안타까움은 유언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실행에 옮긴 진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이들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사랑하고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망해 버린 나라의 애국자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고향에서부터 정혼한 사이였고 열 여섯 살에 약혼을 한 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는 기간 10년” 후 결혼하기로 한다. 최용신은 마마 자국이 심한 편이었고 미인도 아니었지만 약혼자이자 두 살 연하였던 김학준은 그 사람됨에 반해 끈질긴 구애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10년을 몇 달 남기고 청천벽력 같은 약혼자의 죽음에 접한 김학준은 하늘이 무너지듯 슬퍼했다. 장례식 때 시신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할 만큼. 후일 최용신의 묘를 이장할 때 관 위에는 김학준의 코트가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미 옷감은 거의 삭아 단추 정도만이 남아 있었지만.
김학준은 이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1975년 세상을 떴다. 김학준은 돌아가면서 자신을 옛 약혼자 최용신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부인에게는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심경을 넉넉히 알았던 아내는 남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최용신은 옛 약혼자 김학준과 함께 나란히 누워 한때 그녀의 젊음이 태양처럼 빛났던 곳을 굽어보고 있다. 정말로 찌질하고 입에 담기조차 불쾌한 인간들도 역사의 흐름 속에 허다하게 흩뿌려져 있지만 동시에 쳐다보기조차 어려울 만큼 깨끗하고 눈부신 사람들도 그에 지지 않게 많았다. 최용신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크고 밝은 별이었다.
1935년 1월 23일 영원한 상록수 지다
“선생님, 선생님과 영원한 이별을 짓는 이 자리에 이 슬픈 마음을 누를 바 없어 눈물로 이 글을 선생님 영전에 바쳐 고별을 지으려 하는 어린 것들의 심장이 터지려 하나이다.” 추도사를 읽는 아이는 울음이 북받쳐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박박머리 아니면 상고머리의 아이들의 새까만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됐고 뒤에 서 있던 어른들도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물론 수염 허연 할아버지들도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오늘날은 안산시 본오3동으로 빽빽한 도시의 일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교육과 문화 혜택이 전무한 오지였던 샘골 마을 사람들이 전부 총출동한 듯 했다. 조문객은 1000여 명, 근자에 보기드문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최용신이라는 나이 스물 여섯의 처녀였다.
그녀는 함경남도 원산 부근의 덕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마마 자국이 선연했던 그녀는 학교 졸업 "조선이 살려면 농촌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생판 찾아와 본 적도 없고 연고도 없는 경기도 안산으로 스며들었다. 당시의 농촌이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찾아와서 애들을 가르치느니 뭘 해 보자느니 하는 모습에 그리 관대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냉대와 오해도 잇달았지만 최용신은 끈덕지게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성심으로 가르쳤다. 2008년 구술된 최용신의 옛 제자 이덕선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8살 때까지 변화없는 생활을 했어. ‘사람 사는 게 다 이런 것이다’ 생각했지. 1931년 11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샘골 예배당 강습소를 찾게 됐지. 지금도 그 길이 눈에 선해. 최용신 선생님을 만나고 새 세상이 열렸어. 신식공부를 했어. 노래, 체조, 동화듣기..... 선생님은 언제나 이 말씀을 하셨어. ‘너희들은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꾼이 될 수 있다.’ 어느날 5리정도 떨어진 우리 집에 선생님이 방문하셨어.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초가삼간 흙마당에서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어머니 이 아이는 자라서 크게 됩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 내시고 자랑으로 키우십시오. 곁에 있던 내게 살아 생전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
최용신은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죽은 후 샘골을 방문한 교사이자 신학자 김교신은 최용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주 눈물을 보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인과 대화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큰 자취를 남기고 갔는지를 깨닫는다. 김교신이 읽는 그녀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그녀의 활약은 눈이 부시다기보다는 눈을 뜨겁게 한다. 도시 처자가 시골에 와서 뭘 안다고 깝치냐는 흰눈들 앞에서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맸으며 한글강습소를 세우고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가르쳤으며 산수, 수예, 노래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샘골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태극기를 희미하게 그려두고 수업을 하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고 하니 가히 그녀는 민족과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생각까지도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한때 강습소 학생이 110여명에 이르자 강습소가 잘되는 꼴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 당국이 개입하여 학생 수를 60명으로 제한한다. 그러자 최용신은 여기서 탈락한 아이들을 따로 꾸려 밤에 가르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YWCA의 지원이 끊겼다. 최용신은 강습소 경비를 대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 막대한 과로와 스트레스 속에 그녀는 재충전과 못다한 공부를 위해 고베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귀국해서 고향으로 정양을 가 보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누워만 계셔도 좋다.”고 사정하는 통에 다시 샘골로 갔지만 여기서 그는 장협착증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걸려 세상을 뜬다. 그녀는 죽어가면서도 샘골 강습소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았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진로는 어찌 하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은 하나도 없었다. 뭘 못해 봤다거나 뭘 얻지 못했다거나 하는 스물 여섯 처녀의 안타까움은 유언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실행에 옮긴 진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이들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사랑하고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던 망해 버린 나라의 애국자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고향에서부터 정혼한 사이였고 열 여섯 살에 약혼을 한 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는 기간 10년” 후 결혼하기로 한다. 최용신은 마마 자국이 심한 편이었고 미인도 아니었지만 약혼자이자 두 살 연하였던 김학준은 그 사람됨에 반해 끈질긴 구애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10년을 몇 달 남기고 청천벽력 같은 약혼자의 죽음에 접한 김학준은 하늘이 무너지듯 슬퍼했다. 장례식 때 시신을 끌어안고 놓아주려 들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애를 먹었다고 할 만큼. 후일 최용신의 묘를 이장할 때 관 위에는 김학준의 코트가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미 옷감은 거의 삭아 단추 정도만이 남아 있었지만.
김학준은 이후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1975년 세상을 떴다. 김학준은 돌아가면서 자신을 옛 약혼자 최용신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부인에게는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심경을 넉넉히 알았던 아내는 남편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최용신은 옛 약혼자 김학준과 함께 나란히 누워 한때 그녀의 젊음이 태양처럼 빛났던 곳을 굽어보고 있다. 정말로 찌질하고 입에 담기조차 불쾌한 인간들도 역사의 흐름 속에 허다하게 흩뿌려져 있지만 동시에 쳐다보기조차 어려울 만큼 깨끗하고 눈부신 사람들도 그에 지지 않게 많았다. 최용신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크고 밝은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