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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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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24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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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1년 1월 24일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남다 

남북한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손으로 꼽는다고 한다. 일단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기본으로 하고 “아리랑” 정도는 함께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 레파토리는 뚝 끊길 것이다. 북한에서 한국 방송 좀 본 사람들은 남한 대중 가요를 흉내낼 수도 있겠고 일부 남한 사람들도 ‘휘파람’이나 ‘반갑습니다’ 정도는 어설프게 부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예는 못된다. 그런데 남북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하나 더 있다. ‘ 고향의 봄’이다. 이미 해방되기 오래 전에 사람들의 입에 들러붙었던 이 노래의 작사자는 이원수다. 그리고 그가 이 노래를 지은 것은 무려 열 다섯 살 때였다. 소파 방정환이 운영하던 잡지 <어린이> 동요 가사 부문에 응모했는데 거기에 덜컥 당선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이원수의 회고다. 이 노래 가사가 태어난 배경은 진달래꽃 예쁘기로 이름난 창원 천주산이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으로 고향을 떠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 ‘고향’은 전국 방방곡곡에 다 있었고 ‘고향의 봄’은 그들 모두의 울음보를 자극하는 단어였다. 여기에 홍난파가 붙인 처연한 가락까지 곁들여졌을 때 그 노래를 끝까지 제대로 부를 수 있었던 조선인과 한국인은 드물었을 것이다. 

15세에 이런 노래를 지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에게는 더 신기한 선배(?) 하나가 있었다. 그건 이원수보다 1년 앞서서 <어린이> 잡지에 동시 부문에서 떡하니 입선작을 낸 최순애였는데 입선 당시 최순애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오빠 생각’ “듬뿍 듬뿍 듬뿍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1920년대는 흡사 1980년대와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3.1항쟁으로 폭발한 민족적 열기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고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황해 바다를 넘어 침략자에 저항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몸을 던졌다. 유독 슬픈 이별이 많았던 시대, 아직 칭얼대며 조르는 동생에게 어느 오빠는 “서울 가서 비단구두 사오마.”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설랑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길을 떠났던 풍경 그대로가 이 ‘오빠 생각’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기럭기럭 기러기는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는 슬피 울건만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돌아오지 못하는 혈육을 둔 사람 조선 팔도에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열 여섯 이원수는 열 둘 최순애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 잡지에 등단한 인연으로 그들은 펜팔 친구가 됐고 꾸준히 편지가 오가며 그 속에서는 연정이 싹텄다. 그리고 둘은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결혼을 청하고 그를 응낙한다. 원조 접속 커플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둘이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 날, 이원수는 경부선 기차를 타고 최순애가 기다리는 수원으로 향했다. 무슨 색 옷을 입고 갈 것이라는 007 미팅 식의 약속까지 철석같이 한 상황. 그런데 목을 학처럼 늘이고 기다리던 최순애 앞에 이원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제 시간 열차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최순애는 플랫폼을 떠나지 못했다. 아 이 원수같은 원수. 그러나 그녀에게 날아든 것은 또 하나의 청천벽력이었다. 이원수가 독서회를 통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원수는 그로부터 거의 1년간 옥에 갇히게 되는데 최순애의 집에서는 ‘빵잽이’ 사위를 달가와하지 않았고 최순애에게 다른 혼처를 제시하지만 최순애는 완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출감 후 이원수는 최순애의 집에서 몸을 회복했고 이윽고 결혼식을 올린다. 이원수는 ‘오빠’가 되었고 최순애는 이원수 평생의 ‘봄’이 되었다. 

‘고향의 봄’이라는 축복을 안겨 준 이원수였지만 그의 일생은 그에 걸맞는 영예만으로 차 있지는 않았다. 그는 동심을 노래했지만 그저 맑고 파랗고 티없는 동심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알고 배고픔이 있고 눈물이 맺힌 아이들의 멍든 가슴을 오히려 더 절절하게 노래했다. 이 동시를 보면 노래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달밝은 밤 귀뚜라미 쓸쓸한 소리 / 겨울 온다 눈 온다 처량한 소리 / 마른 잎이 바수수 떨어집니다. 여보시오 벌레님 울지 말아요. / 마른 잎이 달래면서 한 숨 질 때에 / 파란 달도 가만히 눈물집니다”「가을밤」(1926년 어린이) 그리고 그 노래는 몇 년 뒤에 나온 이원수의 시도 흡수한다. “찔레꽃 하얗게 피었다오 /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찔레꽃」(1930년 신소년) 

그는 카프 계열의 경향주의적 문인들과 꾸준히 관계를 유지했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좌익이라는 딱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그는 월북했다가 돌아왔다고도 하고 혐의를 벗기는 하지만 전쟁 후 좌익으로 몰려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동안 외국으로 나가 볼 기회를 지닐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힘없는 아이들에 대해 끊임없이 따뜻한 시선을 던졌고 때로는 그들의 아픔을 칼날같이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 그는 친일파라는 딱지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일제 말기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용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 (半島の光)‘에 발표한 것이 드러나면서 친일파 명단에 등재된 것이다. 그는 동시에서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지원병을 위해 후방에서 병역봉공을 다해야 한다고 표현했으며, 수필에서는 편지글 형식을 써서 어린이들이 하루바삐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이 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노력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를 ‘친일파’라고 규정할 자신은 없다. 그의 수많은 업적과 문필에 비추어 그가 어떻게 썼는지 모를 친일 글 몇 편으로 그를 친일파로 단죄하는 것에 약간의 회의를 느낀다. 그의 친일 행적이 밝혀진 뒤 ‘고향의 봄’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친일파였다고 해서 고향의 봄을 부르지 말아야 하는지,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을 부르며 어두운 밤하늘과 숲길을 헤치고 나가던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외면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남과 북의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노래인 ‘고향의 봄’을 굳이 치지도외할 이유까지는 없을 것이다. 그를 굳이 친일파로 규정하여 우리 기억에서 삭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81년 1월 24일 한국 아동문학의 전설이라 할 이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원한 고향의 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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