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9년 1월 22일 원산 총파업 결의
발단은 1928년 9월로 거슬러 오른다.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영국계 석유 회사 Rising Sun의 문평 석유 저장소에서 일본인 관리자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일이 생긴다. 고타마라는 이름의 이 일본인의 손버릇은 이전부터 유명했다. 그는 툭하면 손바닥을 조선인 노동자들의 뺨을 향해 휘둘러 노동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또 다시 구타가 발생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팔뚝을 걷어부쳤다. “고타마를 잘라라. 맞고는 일 아이하겠다!” 문평공장 노동자들은 고타마 해임을 비롯하여 5개 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간다.
함경남도 덕원은 원산과 지척이다. 조선 시대 개항이 이뤄지자마자 지역 유지들이 합심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이 할 ‘원산학사’를 세운 기억도 그렇고,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하여 1921년쯤에는 이미 원산노동회가 결성되었을만큼 원산은 ‘괄괄한’ 고장이었다. 이 원산노동회는 1925년 11월 세포 단체를 직업별로 정리하여 원산노동연합회, 즉 원산노련을 결성해 두고 있었다. 이들은 1927년 6월의 원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경험도 있었다. 이 원산노련이 문평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인 관리자들은 3개월 후에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노라고 약속하지만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고, 두고 보자는 약속 치고 이행되는 법 없다. 석 달 뒤 원산노련이 요구 조건을 다시 정리하여 내밀자 사측은 “우리는 외부세력 개입 없이 우리 직공들과만 얘기하겠다.”는 주장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저 핑계는 그 후 90년 동안 이 땅의 사측에 의해 즐겨 쓰인다) 원산노련은 격노한다. “아니 이 간나새끼드르 우리르 속인 거 아이니?” 또 원산상업회의소, 즉 원산의 기업가들의 조직과 일제 당국은 1월 초 있었던 부두노동자 임금인상 요구에 ‘닥치고 해고’로 답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남은 것은 전면충돌이었다. 마침내 원산노련은 1월 14일을 기해 문평 공장 노동조합에 파업을 명령하고 산하 조직에 문평 관련 작업을 거부할 것을 지시한다. (아! 21세기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산업별 연대) 그리고 1929년 1월 22일 조직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언한다.
두량(斗量)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 23일에는 결복(結卜)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24일에는 원산 중사(仲仕)노동조합·제면노동조합 등이 속속 파업에 참여했다. 원산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노조 소속이 아니었던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면서 함경남도 원산 항구는 완전히 마비된다. ‘총파업’ 우리 역사에서 성취된 적이 거의 드문 단어가 원산 시가지를 뒤덮었고 부두 하역, 화물 운송, 교통 모든 것이 올스톱되고 만다. ‘원산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1929년이라면 만주 사변 직전이다. 즉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향한 침략과 파시즘의 광기를 향하여 보폭을 넓힐 때였고 그들에게 원산의 강력한 노동자 조직은 눈에 가시였고 뽑아야 할 가시였다. 일제 당국은 요즘 말로 하면 용역이나 구사대라 할 ‘자경단’을 조직함은 물론 인근의 19사단 병력까지 출동시켜 노동자들에 맞섰다. 원산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 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떤한 일이 돌발할런지” (동아일보 1929.1.26)
이때 사측이 자행한 행동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말이 절로 나온다. 일단 앞서 말한 공권력의 위압은 기본 사양이었다. 경찰과 군대가 동시에 원산 시내를 쩔그렁거리며 행진했고 사설 폭력배들까지 설치고 다녔다. 노조를 깨기 위해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거나 노노갈등을 부추겨 파업 동력을 약화시키려 들었던 것도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함남노동회’라는 단체였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실로 눈물겹게 싸웠다. 80년 후의 후생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한 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구호 하에 석 달 치의 파업 기금을 마련해 놨으며 규찰대는 폭력배들의 난동과 경찰들의 협박으로부터 본대를 지켜 냈다. 그러나 80여 일 동안 싸움을 계속하면서 전선은 이곳저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노조 간부들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인한 공백 이후 ‘영입’된 서울에서 온 변호사 김태영의 위원장 대리 취임이 결정적이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피해 없이 수습하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김태영의 유화적인 제스처는 노동자들의 어께에서 기를 뺐고 노조를 부수려는 이들의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무 조건 없는 복귀”를 호령하는 일제 당국과 사측에 김태영이 응한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물론 그 싸움을 계속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을까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말했던 바대로 일본은 이 파업을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힘 다해 쓰러지는 것과 힘 다하지 못하고 꺾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법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무리한 수를 쓰게 된다. 지도부에 대한 신뢰도, 승리에 대한 확신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원한이 사무친 함남노동회, 즉 어용 노동 단체를 공격한다. 1929년 4월 1일과 3일.
일본 경찰은 환호를 내지르며 “폭력 불순 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공권력의 촘촘하고도 철저한 노조 와해 공작을 통해 원산노련은 곧 무력해졌고 4월 6일 전설의 원산총파업은 와해된다.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키리라.”고 노래한 적기가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3년 굶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함경도 사람이 아이오! 우리는 각오가 돼 있소!”라고 목청 돋우던 노동자들의 아내들도 쓸쓸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은 어차피 걸림돌이면서 동시에 디딤돌이다. 원산 총파업은 그 패배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80여 일을 끌었던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의 이력 하나만으로도 향후 100년의 역사에 우뚝 서기에 넉넉하다. 뼈아픈 실패는 또 다른 승리를 향한 전진의 깔창이 되고,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는 법이니까. 또 깨지고 또 길을 잃더라도 그만큼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후퇴하더라도 결국은 그 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또한 기억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피를 나누지 않는 유전으로 전해진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이주하도 원산 총파업에 그 정치 사회적 삶의 태를 묻었다. 그 외 원산 총파업을 경험한 이들은 80일의 전설을 간직하고 퍼뜨리면서 그들의 역사적, 개인적 삶들을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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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월 22일 원산 총파업 결의
발단은 1928년 9월로 거슬러 오른다.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영국계 석유 회사 Rising Sun의 문평 석유 저장소에서 일본인 관리자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일이 생긴다. 고타마라는 이름의 이 일본인의 손버릇은 이전부터 유명했다. 그는 툭하면 손바닥을 조선인 노동자들의 뺨을 향해 휘둘러 노동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또 다시 구타가 발생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팔뚝을 걷어부쳤다. “고타마를 잘라라. 맞고는 일 아이하겠다!” 문평공장 노동자들은 고타마 해임을 비롯하여 5개 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간다.
함경남도 덕원은 원산과 지척이다. 조선 시대 개항이 이뤄지자마자 지역 유지들이 합심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이 할 ‘원산학사’를 세운 기억도 그렇고,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하여 1921년쯤에는 이미 원산노동회가 결성되었을만큼 원산은 ‘괄괄한’ 고장이었다. 이 원산노동회는 1925년 11월 세포 단체를 직업별로 정리하여 원산노동연합회, 즉 원산노련을 결성해 두고 있었다. 이들은 1927년 6월의 원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을 통해 승리를 쟁취한 경험도 있었다. 이 원산노련이 문평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인 관리자들은 3개월 후에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노라고 약속하지만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고, 두고 보자는 약속 치고 이행되는 법 없다. 석 달 뒤 원산노련이 요구 조건을 다시 정리하여 내밀자 사측은 “우리는 외부세력 개입 없이 우리 직공들과만 얘기하겠다.”는 주장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저 핑계는 그 후 90년 동안 이 땅의 사측에 의해 즐겨 쓰인다) 원산노련은 격노한다. “아니 이 간나새끼드르 우리르 속인 거 아이니?” 또 원산상업회의소, 즉 원산의 기업가들의 조직과 일제 당국은 1월 초 있었던 부두노동자 임금인상 요구에 ‘닥치고 해고’로 답하며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남은 것은 전면충돌이었다. 마침내 원산노련은 1월 14일을 기해 문평 공장 노동조합에 파업을 명령하고 산하 조직에 문평 관련 작업을 거부할 것을 지시한다. (아! 21세기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산업별 연대) 그리고 1929년 1월 22일 조직 산하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선언한다.
두량(斗量)노동조합·해륙노동조합, 23일에는 결복(結卜)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24일에는 원산 중사(仲仕)노동조합·제면노동조합 등이 속속 파업에 참여했다. 원산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 속에 노조 소속이 아니었던 자유노동자들까지 파업에 참여하면서 함경남도 원산 항구는 완전히 마비된다. ‘총파업’ 우리 역사에서 성취된 적이 거의 드문 단어가 원산 시가지를 뒤덮었고 부두 하역, 화물 운송, 교통 모든 것이 올스톱되고 만다. ‘원산 총파업’의 시작이었다.
1929년이라면 만주 사변 직전이다. 즉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향한 침략과 파시즘의 광기를 향하여 보폭을 넓힐 때였고 그들에게 원산의 강력한 노동자 조직은 눈에 가시였고 뽑아야 할 가시였다. 일제 당국은 요즘 말로 하면 용역이나 구사대라 할 ‘자경단’을 조직함은 물론 인근의 19사단 병력까지 출동시켜 노동자들에 맞섰다. 원산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 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떤한 일이 돌발할런지” (동아일보 1929.1.26)
이때 사측이 자행한 행동들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말이 절로 나온다. 일단 앞서 말한 공권력의 위압은 기본 사양이었다. 경찰과 군대가 동시에 원산 시내를 쩔그렁거리며 행진했고 사설 폭력배들까지 설치고 다녔다. 노조를 깨기 위해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거나 노노갈등을 부추겨 파업 동력을 약화시키려 들었던 것도 비슷하다. 대표적인 것이 ‘함남노동회’라는 단체였다. 하지만 노동자들과 그 가족은 실로 눈물겹게 싸웠다. 80년 후의 후생들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한 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구호 하에 석 달 치의 파업 기금을 마련해 놨으며 규찰대는 폭력배들의 난동과 경찰들의 협박으로부터 본대를 지켜 냈다. 그러나 80여 일 동안 싸움을 계속하면서 전선은 이곳저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것은 노조 간부들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인한 공백 이후 ‘영입’된 서울에서 온 변호사 김태영의 위원장 대리 취임이 결정적이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피해 없이 수습하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김태영의 유화적인 제스처는 노동자들의 어께에서 기를 뺐고 노조를 부수려는 이들의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아무 조건 없는 복귀”를 호령하는 일제 당국과 사측에 김태영이 응한 것은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물론 그 싸움을 계속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을까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말했던 바대로 일본은 이 파업을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힘 다해 쓰러지는 것과 힘 다하지 못하고 꺾이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법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무리한 수를 쓰게 된다. 지도부에 대한 신뢰도, 승리에 대한 확신도 잃어버린 노동자들은 원한이 사무친 함남노동회, 즉 어용 노동 단체를 공격한다. 1929년 4월 1일과 3일.
일본 경찰은 환호를 내지르며 “폭력 불순 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공권력의 촘촘하고도 철저한 노조 와해 공작을 통해 원산노련은 곧 무력해졌고 4월 6일 전설의 원산총파업은 와해된다.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는 붉은 기를 지키리라.”고 노래한 적기가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3년 굶어 보지 않은 사람은 함경도 사람이 아이오! 우리는 각오가 돼 있소!”라고 목청 돋우던 노동자들의 아내들도 쓸쓸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은 어차피 걸림돌이면서 동시에 디딤돌이다. 원산 총파업은 그 패배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80여 일을 끌었던 노동자들의 단결 투쟁의 이력 하나만으로도 향후 100년의 역사에 우뚝 서기에 넉넉하다. 뼈아픈 실패는 또 다른 승리를 향한 전진의 깔창이 되고,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이정표가 되는 법이니까. 또 깨지고 또 길을 잃더라도 그만큼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후퇴하더라도 결국은 그 지점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또한 기억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피를 나누지 않는 유전으로 전해진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이주하도 원산 총파업에 그 정치 사회적 삶의 태를 묻었다. 그 외 원산 총파업을 경험한 이들은 80일의 전설을 간직하고 퍼뜨리면서 그들의 역사적, 개인적 삶들을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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