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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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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1 1.21 사태와 김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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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수도 한양을 둘러쌌던 우람한 성벽은 오랫 동안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서울 사람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조가 몰락하고 서울의 주인이 서너 번씩 바뀌는 와중에 성곽의 많은 부분은 잘려 나가고 허물어지고 때론 민가의 담장으로 전이되어 우리 목전에서 사라져 갔어요. 그래도 "산등성이에 눈 내린 자욱을 보고 쌓았다“는 전설대로 북악을 감아돌며 쌓아올린 성곽은 꽤 온전히 남아 있었건만 언제부턴가 그 길은 언감생심 염두에 두면 안되는 길이 되었더랬죠. 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까러“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이후 수십 년 동안 민간인은 얼씬도 할 수 없는 흡사 전시(戰時)의 성곽이 되어 초병들의 발걸음만 부산했으니 말이에요.



31명의 인민군 124군 부대원은 1968년 1월 18일 미군 2사단 경계지역이었던 고랑포를 낮은포복으로 통과한 후 맹렬히 서울을 향해 내달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뜻밖의 일로 노출되고 맙니다 산에 나무하러 온 나무꾼 4형제와 맞닥뜨리고 만 거죠. 나무꾼들은 국군 복장의 그들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124군부대원들은 나무꾼을 잡아놓고 죽일 것인지 살려보낼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자신들이 노출된 사실을 평양에 보고합니다. 하지만 무전 상태 불량으로 답을 받지 못하자 자신들이 결정을 내려야 했죠.

"이 사람들도 소작농이고 우리 닌민입네다 함부로 죽일 수는 없디요." "동무들은 경험이 없어 기러는 건데 안됐지만 죽여야 하오. 내려가서 신고 않는다는 보장이 어드메 있음둥." "네 명이 동시에 사라지문 수색이 있을 거이구 숨길라면 땅을 파 묻어야 되는데 기걸 어캅니까." 결국 그들은 투표를 실시합니다. 결론은 살려주자였죠. 역시 살려주자에 표를 던진 대장 김종웅은 나무꾼들에게 신고하면 자식까지 죽인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편 세이코 시계를 선물하며 나무꾼들을 놓아 보냅니다. 

그때까지는 "인민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는 유격대 정신이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살아내려간 나무꾼들은 당연히 신고했고 그 때문에 산통이 깨졌다고 생각한 북한은 이후 침투시키는 유격대들에게는 가차없는 행동을 지시하게 되죠. 어쨌든. 

124군 부대는 정말로 상상을 초월한 특수부대였습니다. 신고를 받은 군경이 포위망을 치면 그 뒤통수에서 서울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코앞 세검정에서 종로경찰서의 검문을 받게 됩니다. 경찰의 검문에 그들은 남한에서 끗발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방첩대를 사칭합니다. 하지만 이미 뭔가 수상한 낌새를 챈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신분을 확인하려들자 31명 중 대장 김종웅이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최서장을 쓰러뜨리면서 피비린내나는 서울의 1.21이 시작됩니다. 


124군 부대원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기관단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집니다. 여러 시민들이 버스 안에 던져진 수류탄에 희생된 한 학생의 가방에는 생일선물로 줄 초콜렛이 들어 있었다지요 평온한 일상을 지내던 시민들에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동생이 며칠 후 졸업식에 고인을 대신해 나타나자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왔지만 호랑이를 잡지는 못하고 깨우기만 했던 31명의 인민군들은 하나 둘 피를 쏟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오늘날의 한양 성곽길 마루까지 진출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여 소나무에 총탄의 상처를 남깁니다. 오늘날도 성곽길 탐방 중 볼 수 있는 김신조 소나무가 그것입니다. 그걸 쏜 사람이 김신조는 아닙니다만. 


31명의 대장이었던 김종웅, 유난히 키가 훤칠했고 침투 도중 마주친 나뭇꾼들을 살려 보내기로 결정했던 그는 매복에 걸려 걸레짝이 되어 죽습니다. 유탄발사기로 한쪽 팔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수류탄을 들고 돌진하다 일제사격으로 죽었다지요. 

원래 생포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김춘식과 김신조. 세검정 앞에서 청와대로 돌진하려던 부대원들 앞을 최규식 총경이 막아서기 전, 종로서 종로경찰서 형사 두 명이 정체모를 괴한들의 출현에 의심을 품고 따라붙고 있었죠. 말을 걸고 입씨름도 하며 그들의 발걸음을 늦추던 경찰관 두 명은 저 앞에서 최규식 총경이 쓰러지자 지금까지 말을 섞던 공비 김춘식을 돌로 찍어 실신시키지만 한 명은 총을 맞고 맙니다. 이 김춘식의 옷을 벗기던 도중 셔츠에 연결된 수류탄이 터지면서 김춘식도 죽고 말죠. 또 하나가 김신조였습니다 수류탄을 터뜨리려 했지만 불발돼 초병에 의해 체포된 그는 1월 22일 기자들 앞에 나타나 살기띤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박정희 멱을 따러 왔수다." 그는 유일한 생포자 및 전향자로 남습니다. 

그렇게 포위망을 치고 소탕전을 전개했지만 한 명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뚫고 철조망 뜯고 올라갔을리는 없으며 어디선가 굶어죽거나 얼어죽었을 것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수십년 뒤 김신조는 북한에서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송이버섯 선물을 들고 남한에 온 인민군 장성을 보고 기함을 하게 됩니다. 박재경. 그가 68년 1월 21일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북한도 참 심술궂지 않습니까. 송이버섯 배달자로 하필이면 그를 지목하다니. 마치 동무들 이 사람이 누군지 아오?라고 묻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서른 한 명의 북한 특공대 중 스물 아홉명은 죽어서 남쪽 땅에 묻혔고 한 명은 남에서 한 명은 북에서 그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중 김신조의 경우를 봅시다. 저는 죽어간 그의 동료들은 물론, 그의 동료들이 죽인 최규식 총경 이하 군인들과 경찰 그리고 민간인들과 더불어 김신조를 분단의 희생양이라고 봅니다. 그 역시 결국 적의 궁을 기습하려던 장기판의 말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이곳에서 온 것도 이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것도 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칼기 858편 폭파범 김현희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우리가 해 왔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런 분단의 희생자들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 일일 겁니다. 그러자면 김신조든 김현희든 그들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광고판으로 삼고 그들의 아픔을 헤집는 일부터 중단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신조나 김현희를 내려보낸 북한 정권에 경각심을 갖는 건 좋으나 그 적대감만을 확대재생산할 때 1.21 사태가 언제 재림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1.21은 6.25같은 오해에 싸여 있습니다. 6.25가 평온한 일요일 새벽 별안간 터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치열한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듯 1.21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67년 휴전선은 거의 전시 상황이었습니다. 인민군은 무시로 넘어와 미군과 국군을 죽였고 인민군 100여명이 대거 휴전선을 넘어온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 육군 7사단은 포탄 수백 발을 북녘 땅에 쏘아부칩니다.... 그리고 68년 신년벽두 1.21이 왔던 겁니다

이거 보면서 무슨 영화같은 이야기라고 하실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화였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주인공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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