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년 1월 15일 붉은 로자 지다.
유태인들에 대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 정부같은 악당들을 제외하면 어떤 편견도 없고, 그들을 특별히 우수한 존재로 치부하는 고려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유태인 출신들의 인물들을 보자면 적어도 그 인구에 비해서 특출한 인물들이 꽤 많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게 된다. 이른바 빨갱이들의 역사만 봐도 마르크스가 유태인이었고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무력의 조직자 트로츠키도 유태인이었고 레닌 사후 잠깐 당을 이끌었던 지노비에프도 그랬고 카메네프도 유태인이었으며 1919년 1월 15일 권총에 맞아 운하 속으로 던져진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로자 룩셈부르크도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면서 폴란드인이었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여성이었던, 즉 유럽 사회에서 차별받고 괄시받고 권리주장 못할 모든 조건을 갖췄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혁명가였다. 독일 시민권 획득을 위해 생면부지의 남자와 위장결혼을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여성이었고 혁명이 폴란드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격하되는 것에 열렬히 반대했으며 유태인은 커녕 열렬한 독일인으로서 전쟁에 반대하고 그 변혁을 꿈꿨다. 그렇다고 그녀는 많은 지식인들처럼 러시아에서의 성공에 경도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혹독한 비판의 창끝은 즐겨 레닌을 향하고 있었다.
“레닌은 방법론에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압류, 체포, 공장 책임자들의 독재적 권한, 가혹한 처벌, 테러를 통한 지배, 공포 정치.....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는 볼세비키를 거세게 비난했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차 그녀의 비판은 예언과 같은 성격을 띠어간다. 그것은 소련의 미래이기도 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적 생활이 그토록 빈곤하고, 그토록 도식적이며, 그토록 메마르게 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부와 지적 진보의 풍요로운 원천들을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전쟁의 광기에 그 스스로를 내맡겼다. 정부의 전쟁 예산을 승인한 것이다. 이로써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연대”는 라인 강의 오리알이 되고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됐다. 수천만의 젊은이들이 기관총과 독가스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전쟁 속에서 로사 룩셈부르크는 혁명만이 살육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사회민주당내 분파 가운데 가장 왼쪽에 위치한 인자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한다. 1918년 절망적인 명령에 저항한 독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시작한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황제는 퇴위하고 제정은 끝장났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 우파는 오히려 제정의 시스템을 옹호했고 그에 의지하여 안정을 찾으려 들었다. 그 시기에 붉은 로자라는 이름의 장미는 그 인생에서 최대의 붉은 빛을 발휘한다.
1918년 가을 출소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사 룩셈부르크는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독일의 현실을 비판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논설을 매일 매일 써서 유포하는 한편 이미 개량화하고 오히려 지배 체제의 일원이 되어 버린 사회민주당에서 벗어나 새로운 당을 창당하기로 하고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봉기자들은 사회민주당 본부와 관공서를 일시 장악하지만 한때 로자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1월 15일 마지막 논설을 써서 넘긴 직후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그들을 죽일 것을 작심하고 온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들의 손에 세상을 떠난다. 군인들은 그 날카로운 글과 선동을 짜내던 머리가 미웠던 모양이다. “군인들은 로자를 에워싸고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로자의 시신을 란트베르카날의 다리 위에서 던져 버렸다.”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그렇게 강철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동시에 인간성을 삼키는 혁명을 원치 않았던 공산주의자였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던 로자의 목소리는 그녀의 어떤 정치적 연설보다도 감동적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녀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결국은 나아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이행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저울은 주어진 조건을 파하여 더 큰 자유를 찾자고 일어선 그녀의 머리를 부쉈고 운하 속 수중고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가 평생을 걸고 사랑했으며 그 앞에서는 그야말로 연약한 여자가 되어 버렸던,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처형됐던 레오 요기헤스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를 읽으며 혁명가가 아닌 한 남자를 무진장 사랑했고 그와 행복한 일상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기일을 기념해 둔다.
“정말 그 아이를 안고 그대로 뛰고만 싶었어요. 오, 디오디오 (자신이 붙인 요기헤스의 별칭) 우리 아기는 가질 수 없는 건가요? 그리고 집에서는 절대로 다투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죠. 우리 집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예요..... 지구상의 어느 부부도 우리처럼 완벽한 쌍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요..... 오, 디오디오! 제발 빨리 여기로 와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요...... 디오디오, 당신이 날 번쩍 안아 올려 주길 바라지만 당신은 늘 내가 너무 무겁다는 핑계를 대지요."
1919년 1월 15일 붉은 로자 지다.
유태인들에 대해서 오늘날의 이스라엘 정부같은 악당들을 제외하면 어떤 편견도 없고, 그들을 특별히 우수한 존재로 치부하는 고려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유태인 출신들의 인물들을 보자면 적어도 그 인구에 비해서 특출한 인물들이 꽤 많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게 된다. 이른바 빨갱이들의 역사만 봐도 마르크스가 유태인이었고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끈 무력의 조직자 트로츠키도 유태인이었고 레닌 사후 잠깐 당을 이끌었던 지노비에프도 그랬고 카메네프도 유태인이었으며 1919년 1월 15일 권총에 맞아 운하 속으로 던져진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로자 룩셈부르크도 유태인이었다.
유태인이면서 폴란드인이었고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고 여성이었던, 즉 유럽 사회에서 차별받고 괄시받고 권리주장 못할 모든 조건을 갖췄던 로자 룩셈부르크.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혁명가였다. 독일 시민권 획득을 위해 생면부지의 남자와 위장결혼을 하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여성이었고 혁명이 폴란드 독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격하되는 것에 열렬히 반대했으며 유태인은 커녕 열렬한 독일인으로서 전쟁에 반대하고 그 변혁을 꿈꿨다. 그렇다고 그녀는 많은 지식인들처럼 러시아에서의 성공에 경도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혹독한 비판의 창끝은 즐겨 레닌을 향하고 있었다.
“레닌은 방법론에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압류, 체포, 공장 책임자들의 독재적 권한, 가혹한 처벌, 테러를 통한 지배, 공포 정치.....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녀는 선거 결과를 무시하는 볼세비키를 거세게 비난했고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차 그녀의 비판은 예언과 같은 성격을 띠어간다. 그것은 소련의 미래이기도 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적 생활이 그토록 빈곤하고, 그토록 도식적이며, 그토록 메마르게 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부와 지적 진보의 풍요로운 원천들을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전쟁의 광기에 그 스스로를 내맡겼다. 정부의 전쟁 예산을 승인한 것이다. 이로써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연대”는 라인 강의 오리알이 되고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됐다. 수천만의 젊은이들이 기관총과 독가스의 밥이 되어 죽어가는 전쟁 속에서 로사 룩셈부르크는 혁명만이 살육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사회민주당내 분파 가운데 가장 왼쪽에 위치한 인자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한다. 1918년 절망적인 명령에 저항한 독일 수병들의 반란으로 시작한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황제는 퇴위하고 제정은 끝장났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사회민주당 우파는 오히려 제정의 시스템을 옹호했고 그에 의지하여 안정을 찾으려 들었다. 그 시기에 붉은 로자라는 이름의 장미는 그 인생에서 최대의 붉은 빛을 발휘한다.
1918년 가을 출소한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사 룩셈부르크는 ‘적기'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독일의 현실을 비판하고 혁명을 선동하는 논설을 매일 매일 써서 유포하는 한편 이미 개량화하고 오히려 지배 체제의 일원이 되어 버린 사회민주당에서 벗어나 새로운 당을 창당하기로 하고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유명한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봉기자들은 사회민주당 본부와 관공서를 일시 장악하지만 한때 로자가 몸담았던 사회민주당 정부군에 의해 진압된다. 1월 15일 마지막 논설을 써서 넘긴 직후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그들을 죽일 것을 작심하고 온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들의 손에 세상을 떠난다. 군인들은 그 날카로운 글과 선동을 짜내던 머리가 미웠던 모양이다. “군인들은 로자를 에워싸고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로자의 시신을 란트베르카날의 다리 위에서 던져 버렸다.” (막스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그렇게 강철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동시에 인간성을 삼키는 혁명을 원치 않았던 공산주의자였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릅니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던 로자의 목소리는 그녀의 어떤 정치적 연설보다도 감동적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그녀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결국은 나아가야 할 길을 나아갈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봤다. “인간다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것은 확고하고 명쾌하며 명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래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랑하다는 것을요. 흐느끼는 것은 약하다는 표시예요. 인간답다는 것은, 꼭 그래야 한다면 자신의 전 삶을 운명의 거대한 저울에 기꺼이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이행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저울은 주어진 조건을 파하여 더 큰 자유를 찾자고 일어선 그녀의 머리를 부쉈고 운하 속 수중고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가 평생을 걸고 사랑했으며 그 앞에서는 그야말로 연약한 여자가 되어 버렸던,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처형됐던 레오 요기헤스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를 읽으며 혁명가가 아닌 한 남자를 무진장 사랑했고 그와 행복한 일상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기일을 기념해 둔다.
“정말 그 아이를 안고 그대로 뛰고만 싶었어요. 오, 디오디오 (자신이 붙인 요기헤스의 별칭) 우리 아기는 가질 수 없는 건가요? 그리고 집에서는 절대로 다투지 않을 거예요. 그럴 거죠. 우리 집은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예요..... 지구상의 어느 부부도 우리처럼 완벽한 쌍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요..... 오, 디오디오! 제발 빨리 여기로 와요!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요...... 디오디오, 당신이 날 번쩍 안아 올려 주길 바라지만 당신은 늘 내가 너무 무겁다는 핑계를 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