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9년 1월 8일 1.8 테러와 제임스 리
1989년 1월 8일의 기나긴 겨울밤이었다. 석남사 산장에서는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열띤 토론이 오간 끝에 밥 먹고 하자는 말도 나오고 술이 빠지지도 않았으리라. 뻗을 사람은 뻗고 질긴 사람들은 두런두런 남은 얘기를 하던 새벽녘, 갑자기 복면을 한 괴한들이 산장을 덮쳤다. 무전기로 서로 교신하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함을 보인 그들은 추호도 사정을 돌보지 않고 각목을 휘둘러댔다.
무려 50여명이 넘는 괴한들의 몽둥이질에 조합원들은 속절없이 두들겨 맞았다. 한바탕 몽둥이 찜질이 끝난 후 괴한들은 신속하게 철수하여 다음 목표물을 찾아갔다. 다음 목표물은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이었다. 아직은 동트기 전의 어두운 시간, 그곳에 있던 23명의 노동자들은 때아닌 매타작에 혼이 나가고 말았다.
후일 뉴라이트로 선회하여 온갖 욕을 다 들어먹었지만 끝내 들어먹은 욕만큼 장수하지는 못한 87년 ‘울산의 바웬사’ 권용목도 그곳에 있었지만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바람같이 나타나 몽둥이를 휘두른 뒤 바람처럼 사라진 그 괴한들은 현대그룹 차원에서 조직한 일종의 ‘구사대’였다. 그 책임을 지고 현대그룹의 전무까지 구속되는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사실은 그 전무조차 일종의 총알받이였을 뿐 최종 결정자는 정씨 로열 페밀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불도저같은 기업 문화답게 현대그룹은 노조와의 대결에서도 ‘화끈’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앞뒤 가리지 않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의 한복판에 앉아서 조종간을 쥐었던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1.8 테러의 기획자였고 그 이전부터 노조 활동에 대한 비난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에게 반노조 의식을 불어넣으려고 기를 쓰던 노조 파괴자였다. 그 이름이 제임스 리다. 본명 이윤섭. 1990년 7월 1일 시사저널 보도에 나타난 이윤섭의 행적은 사뭇 흥미롭다.
1950년생인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빈털터리로 미국에 이민갔다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보고 노동운동에 의욕이 생겨 미국내 한인 노동 단체에 가입한다. 그런데 막상 그 단체 조직원들에게 제임스 리는 자신이 미는 사람이 대표에 당선되지 않자 조직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광분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노동운동의 ABC와 재야의 논리를 익힌 그는 귀국 후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기업주들에게 일종의 자본 부흥사 역할을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논리는 유구하게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많거니와 “No work, No pay!" 즉 무노동 무임금이나 "파업하는 노동자에게는 폐업으로 대처하라.”는 지침 등은 세월을 넘어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유력한 무기가 되고 있으니 87년의 그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제임스 리’의 명성은 높아갈 수 밖에 없었다. 수원지역 삼성계열사(삼성전관,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안국화재,용인 한일전장, 선경마그네틱(주), 대우전자 인천공장, 풍산금속 안강공장 등등의 유수한 기업체들이 그를 다투어 모셔서 고견을 들었다.
제임스 리는 보통 인물이 아니어서 그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재야의 인사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논리에 계속 접하면서 그 대응 논리를 개발해 나가는 한편, 그를 행동으로 옮긴다. “노조가 빨갱이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정에서” 1.8 테러를 기획하고 현대그룹과의 밀접한 협조와 공권력의 친절한 무관심 하에 실행에 나선 것이다. 태반이 현대그룹의 노동자들이었다는 괴한들을 시켜서.
제임스 리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곧 풀려난 뒤 이번에는 울산과 맞먹는 노동운동의 메카라 할 인천에 나타났다. 새인천병원에서는 인사부장을 자처했고 콜트악기에서는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음해공작을 폈고 명성전기에서는 아예 교섭의 사측 대표로 나서면서 그는 그 악명을 노동운동계 전역에 떨쳤다. 오죽하면 그의 행적이 사라진 요즘도 노조 파괴자의 대명사로 ‘제임스 리’가 종종 회자될까.
그는 자본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선구적인 (?) 인간이었다. 앞서 언급한 무노동 무임금 전술과 위장 폐업 전술은 자본의 금과옥조가 되었거니와 그는 테러 4일 전 현대중공업의 일부 노조대의원 60여 명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를 한다. “구사대를 조직하라. 그들은 여러분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즉 노동자들끼리의 싸움을 유발시키고자 했고 싸우려는 이들을 고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자본은 제임스 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성과를 거둔다. 한때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로서 노동운동의 점화대 노릇을 했던 현대 그룹의 정규직 노조원들은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발휘하며 철탑 위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제 새끼들마저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데 우선권을 달라는 단체협약을 하고 앉은 노동귀족이 된 지 오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돌아보면 차라리 노동자를 두들겨 패고 협박이나 하면서 노조 파괴공작을 하던 제임스 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저놈들은 빨갱이다!”고 소리지를 줄이나 알았던 제임스 리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130억이 넘는 ‘손배가압류’를 걸어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임스 리가 두들겨 팬 그 노동자들의 후배들이 거들먹거리는 노동 귀족이 되어 “누가 비정규직 되랬냐? 시끄럽긴......” 하면서 침을 찍 뱉는 제임스 리 보기에 매우 건전하고 아름다운 노동자가 될 줄은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은 돌고 돈다지만 죽지 않았다면 환갑을 넘긴 나이로 미국 아니면 한국 어디에선가 여생을 보내고 있을 제임스 리로서는 참 기가 막히게 돌아나가는 게 세상사라는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참 기가 막히게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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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8일 1.8 테러와 제임스 리
1989년 1월 8일의 기나긴 겨울밤이었다. 석남사 산장에서는 현대중전기 조합원들이 수련회를 하고 있었다. 열띤 토론이 오간 끝에 밥 먹고 하자는 말도 나오고 술이 빠지지도 않았으리라. 뻗을 사람은 뻗고 질긴 사람들은 두런두런 남은 얘기를 하던 새벽녘, 갑자기 복면을 한 괴한들이 산장을 덮쳤다. 무전기로 서로 교신하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함을 보인 그들은 추호도 사정을 돌보지 않고 각목을 휘둘러댔다.
무려 50여명이 넘는 괴한들의 몽둥이질에 조합원들은 속절없이 두들겨 맞았다. 한바탕 몽둥이 찜질이 끝난 후 괴한들은 신속하게 철수하여 다음 목표물을 찾아갔다. 다음 목표물은 울산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사무실이었다. 아직은 동트기 전의 어두운 시간, 그곳에 있던 23명의 노동자들은 때아닌 매타작에 혼이 나가고 말았다.
후일 뉴라이트로 선회하여 온갖 욕을 다 들어먹었지만 끝내 들어먹은 욕만큼 장수하지는 못한 87년 ‘울산의 바웬사’ 권용목도 그곳에 있었지만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바람같이 나타나 몽둥이를 휘두른 뒤 바람처럼 사라진 그 괴한들은 현대그룹 차원에서 조직한 일종의 ‘구사대’였다. 그 책임을 지고 현대그룹의 전무까지 구속되는 지경이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사실은 그 전무조차 일종의 총알받이였을 뿐 최종 결정자는 정씨 로열 페밀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불도저같은 기업 문화답게 현대그룹은 노조와의 대결에서도 ‘화끈’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앞뒤 가리지 않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움직임의 한복판에 앉아서 조종간을 쥐었던 사람 하나가 있었다. 그는 1.8 테러의 기획자였고 그 이전부터 노조 활동에 대한 비난을 일삼으며 노동자들에게 반노조 의식을 불어넣으려고 기를 쓰던 노조 파괴자였다. 그 이름이 제임스 리다. 본명 이윤섭. 1990년 7월 1일 시사저널 보도에 나타난 이윤섭의 행적은 사뭇 흥미롭다.
1950년생인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빈털터리로 미국에 이민갔다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보고 노동운동에 의욕이 생겨 미국내 한인 노동 단체에 가입한다. 그런데 막상 그 단체 조직원들에게 제임스 리는 자신이 미는 사람이 대표에 당선되지 않자 조직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며 광분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노동운동의 ABC와 재야의 논리를 익힌 그는 귀국 후 19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기업주들에게 일종의 자본 부흥사 역할을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논리는 유구하게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많거니와 “No work, No pay!" 즉 무노동 무임금이나 "파업하는 노동자에게는 폐업으로 대처하라.”는 지침 등은 세월을 넘어 노동자들의 피를 말리는 유력한 무기가 되고 있으니 87년의 그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제임스 리’의 명성은 높아갈 수 밖에 없었다. 수원지역 삼성계열사(삼성전관,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안국화재,용인 한일전장, 선경마그네틱(주), 대우전자 인천공장, 풍산금속 안강공장 등등의 유수한 기업체들이 그를 다투어 모셔서 고견을 들었다.
제임스 리는 보통 인물이 아니어서 그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재야의 인사들과 접촉하여 그들의 논리에 계속 접하면서 그 대응 논리를 개발해 나가는 한편, 그를 행동으로 옮긴다. “노조가 빨갱이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충정에서” 1.8 테러를 기획하고 현대그룹과의 밀접한 협조와 공권력의 친절한 무관심 하에 실행에 나선 것이다. 태반이 현대그룹의 노동자들이었다는 괴한들을 시켜서.
제임스 리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지만 곧 풀려난 뒤 이번에는 울산과 맞먹는 노동운동의 메카라 할 인천에 나타났다. 새인천병원에서는 인사부장을 자처했고 콜트악기에서는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음해공작을 폈고 명성전기에서는 아예 교섭의 사측 대표로 나서면서 그는 그 악명을 노동운동계 전역에 떨쳤다. 오죽하면 그의 행적이 사라진 요즘도 노조 파괴자의 대명사로 ‘제임스 리’가 종종 회자될까.
그는 자본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선구적인 (?) 인간이었다. 앞서 언급한 무노동 무임금 전술과 위장 폐업 전술은 자본의 금과옥조가 되었거니와 그는 테러 4일 전 현대중공업의 일부 노조대의원 60여 명을 모아놓고 이런 얘기를 한다. “구사대를 조직하라. 그들은 여러분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다.” 즉 노동자들끼리의 싸움을 유발시키고자 했고 싸우려는 이들을 고립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자본은 제임스 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성과를 거둔다. 한때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로서 노동운동의 점화대 노릇을 했던 현대 그룹의 정규직 노조원들은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는 특권의식을 발휘하며 철탑 위의 비정규직을 외면하고 제 새끼들마저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데 우선권을 달라는 단체협약을 하고 앉은 노동귀족이 된 지 오래가 된 것이다.
오늘날 돌아보면 차라리 노동자를 두들겨 패고 협박이나 하면서 노조 파괴공작을 하던 제임스 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저놈들은 빨갱이다!”고 소리지를 줄이나 알았던 제임스 리는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130억이 넘는 ‘손배가압류’를 걸어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임스 리가 두들겨 팬 그 노동자들의 후배들이 거들먹거리는 노동 귀족이 되어 “누가 비정규직 되랬냐? 시끄럽긴......” 하면서 침을 찍 뱉는 제임스 리 보기에 매우 건전하고 아름다운 노동자가 될 줄은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은 돌고 돈다지만 죽지 않았다면 환갑을 넘긴 나이로 미국 아니면 한국 어디에선가 여생을 보내고 있을 제임스 리로서는 참 기가 막히게 돌아나가는 게 세상사라는 탄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참 기가 막히게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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