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수십년의 군부 통치를 끝내는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문민 정부의 초반은 30년 군 출신 대통령들의 치세에 쌓아올린 모래성들의 붕괴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하면 된다.”와 “잘 살아 보세”의 쌍끌이가 안전을 무시한 속도전과 내실을 저버린 잇속으로 치달았던 오랜 관행이 정신없이 한국인들의 뺨을 때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구포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지고 격포에서는 배가 침몰해 사람들이 바다에 삼켜졌고 구포에서는 기차가 탈선해 승객들을 짓이겼고 성수대교 다리가 끊어졌고 마침내는 백화점이 무너졌다. 그 일련의 재난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사고였다.
1월 7일 새벽 1시 반쯤, 화재 신고가 청주소방서에 접수됐고 요란한 출동 벨이 울렸다. 화재 장소는 상당구 우암동 주상복합건물 우암상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소방관 김기원은 현장을 보자마자 무전기를 들었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반복한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청주 시내 소방관에 총동원령을 내릴 만큼 심각한 화재였다. 주민들은 많이 빠져나왔지만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떨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방화복 단추도 채 잠그지 못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화재 진압 작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두시 십분 경, 소방관들과 옥상의 주민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펑 펑.... 건물 내에 있던 LPG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 불길한 소리에 이어 건물은 숱한 사람들의 비명을 아귀처럼 삼키면서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청주 시내 전 구급차량은 우암 상가로 집결하라는 찢어지는 명령이 떨어졌고 잠깐 동안 넋을 잃었던 소방관들은 다시 무너진 건물 더미로 뛰어들었다. 잠옷 바람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고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꼭 안은 채 콘크리트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어떤 소년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자신의 부모와 두 형이 울부짖다가 건물 더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문제는 단연 부실시공이었다. 상가 건축 당시 자금난 때문에 건축업자가 3번이나 바뀌는 통에 철근은 얇아져 갔고 내화제 또한 줄어들었으며 골재는 불량품 범벅이었다. 더 심한 화재였던 대연각 호텔이나 대아 호텔 등도 건물이 붕괴되지는 않았었는데 불이 난 지 단 1시간도 못되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은 부실시공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안전불감증 또한 심각해서 건물의 안전 담당자는 화재 예방 교육 참가는 커녕, 공사에 다망한 나머지 경비원을 대신 참석시키는 용기를 과시했고 자체 소방 시설 등을 점검하거나 그를 소방서에 제출하는 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부실시공도 안전불감증도 결국은 ‘쩐’의 문제다. 당장 눈 앞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데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으며 까짓거 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으며 철근 좀 줄인다고 무슨 큰일 나겠는가, 공기 맞추면 그만이고 잔금 받으면 그만이고 빨리 입주자 집어넣어 돈 챙겨 잘 살아 보면 그만 아닌가 하는 당시, 또는 지금도 만연한 ‘한국인의 국민자세’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사고 후 또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건축 허가에 책임이 있는 시보다 소방서에 사고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목숨 걸고 불을 껐던 소방관들이 경찰에 연일 불려가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소방관 몇 명은 사표를 던지며 항의하기도 했다. “건물이 무너진 게 우리 책임이라는 겁니까.”
우암동의 옛 이름은 와우동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일제 시대 우암동으로 바뀌어 불려 왔다는 것인데 동네 이름이 그대로였다면 이 우암상가 아파트의 이름도 와우아파트였을 것이다. 와우 아파트 하니 당연히 떠오르는 동명의 이름이 있다. 와우 아파트 참사. 그때도 똑같았다. 불도저같이 하면된다고 밀어붙이고 벌면 된다고 부실시공에 떼먹을 거 다 떼먹고 그러고는 잘 살게 되었다며 아파트 굽어보며 기고만장하던 바로 그 사고(思考)가 와우 아파트를 무너뜨렸고 청주의 우암상가에 결국 대형 사고를 친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간다. 현장에 출동한 장현철 소방관은 콘크리트 더미에 묻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넉 달 동안 팔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었고 1년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노컷뉴스 2007.11.10) 장애등급을 받아야 할 중상이었고 툭하면 뭐가 덮칠 것 같은 공포에 폐쇄공포증까지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소방서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10년간의 내근을 거쳐 2005년부터는 화재 진압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가면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아요. 다른 소방관들도 그럴 거에요. 인명구조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사람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고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런 마음씨는 꺼지지 않는 호롱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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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그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수십년의 군부 통치를 끝내는 ‘문민’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문민 정부의 초반은 30년 군 출신 대통령들의 치세에 쌓아올린 모래성들의 붕괴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하면 된다.”와 “잘 살아 보세”의 쌍끌이가 안전을 무시한 속도전과 내실을 저버린 잇속으로 치달았던 오랜 관행이 정신없이 한국인들의 뺨을 때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구포에서는 비행기가 떨어지고 격포에서는 배가 침몰해 사람들이 바다에 삼켜졌고 구포에서는 기차가 탈선해 승객들을 짓이겼고 성수대교 다리가 끊어졌고 마침내는 백화점이 무너졌다. 그 일련의 재난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 붕괴 사고였다.
1월 7일 새벽 1시 반쯤, 화재 신고가 청주소방서에 접수됐고 요란한 출동 벨이 울렸다. 화재 장소는 상당구 우암동 주상복합건물 우암상가. 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소방관 김기원은 현장을 보자마자 무전기를 들었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반복한다. 전 차량 전 직원 출동 바란다.” 청주 시내 소방관에 총동원령을 내릴 만큼 심각한 화재였다. 주민들은 많이 빠져나왔지만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떨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방화복 단추도 채 잠그지 못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화재 진압 작전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두시 십분 경, 소방관들과 옥상의 주민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펑 펑.... 건물 내에 있던 LPG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 불길한 소리에 이어 건물은 숱한 사람들의 비명을 아귀처럼 삼키면서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청주 시내 전 구급차량은 우암 상가로 집결하라는 찢어지는 명령이 떨어졌고 잠깐 동안 넋을 잃었던 소방관들은 다시 무너진 건물 더미로 뛰어들었다. 잠옷 바람으로 필사의 탈출을 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고 어떤 어머니는 아들을 꼭 안은 채 콘크리트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어떤 소년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창문 밖으로 자신의 부모와 두 형이 울부짖다가 건물 더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문제는 단연 부실시공이었다. 상가 건축 당시 자금난 때문에 건축업자가 3번이나 바뀌는 통에 철근은 얇아져 갔고 내화제 또한 줄어들었으며 골재는 불량품 범벅이었다. 더 심한 화재였던 대연각 호텔이나 대아 호텔 등도 건물이 붕괴되지는 않았었는데 불이 난 지 단 1시간도 못되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은 부실시공 이외에는 답이 없었다. 안전불감증 또한 심각해서 건물의 안전 담당자는 화재 예방 교육 참가는 커녕, 공사에 다망한 나머지 경비원을 대신 참석시키는 용기를 과시했고 자체 소방 시설 등을 점검하거나 그를 소방서에 제출하는 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부실시공도 안전불감증도 결국은 ‘쩐’의 문제다. 당장 눈 앞의 돈이 왔다갔다 하는데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으며 까짓거 해서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으며 철근 좀 줄인다고 무슨 큰일 나겠는가, 공기 맞추면 그만이고 잔금 받으면 그만이고 빨리 입주자 집어넣어 돈 챙겨 잘 살아 보면 그만 아닌가 하는 당시, 또는 지금도 만연한 ‘한국인의 국민자세’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사고 후 또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건축 허가에 책임이 있는 시보다 소방서에 사고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 목숨 걸고 불을 껐던 소방관들이 경찰에 연일 불려가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소방관 몇 명은 사표를 던지며 항의하기도 했다. “건물이 무너진 게 우리 책임이라는 겁니까.”
우암동의 옛 이름은 와우동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일제 시대 우암동으로 바뀌어 불려 왔다는 것인데 동네 이름이 그대로였다면 이 우암상가 아파트의 이름도 와우아파트였을 것이다. 와우 아파트 하니 당연히 떠오르는 동명의 이름이 있다. 와우 아파트 참사. 그때도 똑같았다. 불도저같이 하면된다고 밀어붙이고 벌면 된다고 부실시공에 떼먹을 거 다 떼먹고 그러고는 잘 살게 되었다며 아파트 굽어보며 기고만장하던 바로 그 사고(思考)가 와우 아파트를 무너뜨렸고 청주의 우암상가에 결국 대형 사고를 친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돌아간다. 현장에 출동한 장현철 소방관은 콘크리트 더미에 묻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넉 달 동안 팔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었고 1년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노컷뉴스 2007.11.10) 장애등급을 받아야 할 중상이었고 툭하면 뭐가 덮칠 것 같은 공포에 폐쇄공포증까지 있었던 그였지만 그는 소방서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10년간의 내근을 거쳐 2005년부터는 화재 진압 현장에 다시 뛰어들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가면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아요. 다른 소방관들도 그럴 거에요. 인명구조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사람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고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런 마음씨는 꺼지지 않는 호롱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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