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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6 단양 적성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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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8년 1월 6일 단양 적성비 발견 

과거는 어차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천지를 뒤흔든 사건도, 수만 명의 가슴을 찢어놓았던 슬픔도 몇 대를 지나치면 대개는 새털처럼 가벼운 과거가 되어 끝도 없고 바닥도 없는 시간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죠. 인간은 그를 방지하고자 기록을 하고 전설로 만들고 신화로 꾸미지만 남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은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역사는 동화에 나오는 페르시아 미녀처럼 꽁공 감싸고 있던 베일을 내던진 과거의 민낯을 우리에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1만 8천년 전의 황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줬고 투탄카멘 왕의 무덤은 3천년만에 열렸고 우리 무령왕릉은 1500년 뒤의 후손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 굵직굵직한 건수들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의 유물이 나와 수백 수천년전의 사람들의 숨결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기적같은 일이 종종 발생하지요. 이를테면 중국 집안시 즉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근처의 도로공사 중 한 돌비석의 깨진 파편이 발견됩니다. 그건 고구려 정벌을 기념하는 기공비였어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국내성을 함락하고 ‘불내성’(不耐城), 즉 견뎌내지 못할 성이라는 멸시 섞인 이름을 붙인 후 그 공을 찬미하는 비를 세웠는데 그 일부였지요. 관구검 기공비라고 불리우긴 하는데 관구검 이름은 나오지 않는 걸로 보아 그에 동원된 오환족 선우의 공을 기념하는 비석 같기도 하지요. 어쨌든 긍지 높은 고구려인들이 그걸 가만 뒀을 리가 없죠. 산산조각을 내서 땅에 파묻었을 텐데 그 일부가 발견된 겁니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에는 삼국 시대 산성이 있습니다. 그리 높은 산자락은 아니지만 병풍 같은 소백산맥 뒤로 하고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임을 짐작할만한 곳이죠. 성도 꽤 튼튼하게 쌓아져서 삼국 시대가 끝난 뒤 전략적 가치를 상실하고 버려진 성 치고는 그 자취가 오래도록 선연하게 남아 있었지요. 개국 이래 소백산맥을 넘어 한반도 중부로 진출하는 것이 국가적 소망이었던 신라가 마침내 죽령을 넘어 확보한 교두보 격이니 정성스레 쌓았겠지요. 성에 올라서면 단양의 또 하나의 전설의 무대 온달산성 성벽이 아득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서로 호응해 가면서 이 일대를 지켰겠지요. 1978년 1월 엄동설한의 겨울 단양 적성에 운명의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그저 버려진 성이었던 적성 안에는 토기와 기왓장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조사단장이었던 정양호 교수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을 찾으면 맥주 한 병을 준다는 현상금(?)을 내걸고 성 안 조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 글자면 세 병! 뭐 이런 식이었겠지요. 간밤에 왔던 눈 때문에 성 안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조사단원들의 신발도 온통 흙투성이가 됐지요. 그런데 아침에 올라올 때 봤던 삐죽이 튀어나온 돌덩이, 그래서 옛 건물의 주초석인가 싶은 돌덩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정양호 단장은 등산객들이 등산화 흙을 털기에 딱 좋았던 그 돌덩이에 손을 댔지요. 진흙을 털고 얼음을 헤친 순간 그는 기절할 정도로 놀랍니다.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큰 대 (大)

조사단은 그야말로 흥분에 빠집니다. 그 뒤에 나타난 단어는 亞官, 대아관(大亞官), 즉 신라의 관등명이었습니다. 신라비다! 장갑들 벗어! 손으로 한다! 주위 학생들에 따르면 정양호 교수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고 하지요. 하기가 1500년의 인연이 자기와 맺어진 셈이니 역사학자로서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할 정도의 행운이었겠죠. 날이 어두워 일단 나뭇가지로 비석을 덮고 내려온 조사단은 다음날 다시 올라가 발굴을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날밤 정양호 교수 이하 조사단의 심경과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어땠을까요 부어라 마셔라였을까요 쥐죽은 뒤 목욕재계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을까요. 

어쨌든 등산객의 신발을 털어주던 그 돌덩이는 신라의 진흥왕이 세운 척경비, 즉 국경 개척을 기념한 비임이 밝혀집니다. 거기에는 ‘독도는 우리 땅’의 가사에 등장하여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이름 신라 장군 이사부도 출몰하고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도 그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퀴퀴한 종이에만 의지하던 우리 고대사의 일부가 돌고래처럼 역사의 수면 위를 박차고 오른 겁니다. 정식 한문체가 아니어서 해독도 쉽지 않았고 비석 윗부분은 끝내 발견되지 않은 일부의 비였지만 그래도 그 비석 하나로 고대사 교과서는 다시 쓰여지게 됩니다. 경향신문에 연재된 <고고학자 조유전과 함께 떠나는 한국사 여행> 적성비편에 따르면 이 발견으로 가장 크게 낭패를 본 사람은 일본인 사학자 미이케 겐이치였다고 합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이가 진평왕 때(재위 579∼632년) 관등제도가 성립됐다고 주장해왔던 일본학자 미이케 켄이치(三池賢一)일 거야. 한때 그의 학설은 너무도 정연해서 누구라도 부인하기 어려웠는데, 비문이 발견되면서 단번에 허물어졌으니….”(이기동 교수) 그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했다고 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게 아니었고 진평왕 때에야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적성비에는 버젓이 신라의 관등제 중 15위인 ‘대오’(大烏)나 외직(外職)의 최하위 품계인 아척(阿尺) 등이 등장해 있었던 거죠.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고대사는 기실 풍부한 사료 분석과 풍성한 유물을 통해 확립한 역사라기보다는 빈약한 사료와 유물을 근거로 얼키설키 엮고 꿰맨 성긴 그물 같은 것입니다. 그 틈 사이로 어떤 사실들이 새고 있는지, 전혀 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뭔가가 남아 있는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것이죠. 그 진위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화랑세기>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신라 귀족 사회의 ‘상식’과는 아예 패러다임이 다르거든요. 누군가 18대 대통령을 선덕여왕에 비유하던데 남편들을 태연하게 갈아치우는 화랑세기 속 선덕여왕을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발견되지 않은 사료, 땅 속에 묻힌 유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런데 건설회사 있는 친구 말 들어보면 좀 으스스해집니다. 땅 파다가 뭔가 나왔다 하면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기보다는 그냥 묻어 버리는 것이 ‘상식’이라는 거지요. 

단양 적성비도 버려진 성 안에 묻혀 있었기에 그 아래쪽이나마 살아남았겠지만 중앙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발견됐더라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르고, 콘도미니엄을 짓다가 그 기초공사 중에 나왔다면 아마 사우나탕 지하 깊숙이 박혀 버렸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백제의 5백년 도읍지 하남 위례성의 태반은 그렇게 아파트 단지 지하에 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크지요. 4월쯤까지 ‘오늘의 역사’를 계속한다면 그때쯤 중원 고구려비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중원 고구려비는 아주머니들이 빨랫감을 놓고 두들기는 빨랫돌 역할을 했었다지요. 고대사에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그렇게 과거를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우리에게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 돌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단양은 볼 것 많고 경치 좋은 고장입니다. 단양 들르게 되면 관광 코스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지만 단양 적성 한 번 올라가 보세요. 그리고 그 앞의 단양 적성비 (물론 모조품이겠지만)도 들여다보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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