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 폭탄 그리고 황옥 김시현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 앞에는 ‘안경다리’라고 불리는 니주바시 다리가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살아 있는 신으로서 일본 국민들의 범접할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던 천황이 사는 궁궐로 들어가는 다리. 그 다리에서 궁성을 향하여 폭탄이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4년 1월 5일이었다. 조선인 김지섭. 경상도 안동 출신의 의열단원이었다.
영특하고 배움이 빨라 합방 전 보통학교 교사와 재판소 서기 및 통역 (일본어를 2개월만에 독파했다고)이 되었던 그는 그 이력으로 한세상 잘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합병 이후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전에도 교류가 있던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할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1923년 3월의 폭탄 반입 사건이었다. 모두 36개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와서 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폭파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총독부와 일본 경찰이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이 거사는 사전 탐지되어 김지섭과 의열단장 김원봉 등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황옥, 김시현 등은 체포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이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조선인들이 이를 틈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이성을 잃은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의 조선인 학살을 감행한다. 무려 6천 여명의 조선인이 이국 땅의 원귀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들 또한 격분한다. “이 쪽발이 새끼들을 쳐죽이고 말겠다.” 김지섭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제국 의회가 열려 일본 총리 이하 고관대작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이 들렸고 김지섭은 김원봉에게 달려간다. “기회요. 나보다 일본말 잘하는 사람이 없고 기분은 좀 나쁘지만 생김새도 일본놈 비슷하니 내가 적임자요. 내가 가서 놈들을 때려잡겠소.”
마침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김지섭. 그는 폭탄 세 개를 품고 있었다. 그를 도운 것은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김지섭들은 일본인들의 도움을 못 미더워해다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들은 신의를 지켰다. 남해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양반의 본고장 안동에서 자란 사람답게 김지섭은 유려한 한시를 지어 읊는다. 그는 한학에 능통했다.
“표연히 이 한 몸 만 리 길 떠나갈 때 (萬里飄然一粟身)
배 안엔 모두 원수이니 벗할 이 뉘 있는가 (舟中皆敵有誰親)
(중략)
오늘날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今日潛踪浮海客)
그 몇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을 하였던가 (昔年嘗膽臥薪人)
이미 걸은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此行已決平生志)
다시는 고국을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不向關門更問津)
그러나 석탄 화물선 바닥에 숨어 바다를 건넌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폭탄은 습기를 머금었고 본디 성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지섭은 항해 와중에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제에 일본 천황의 궁성에 폭탄을 던지리라 마음 먹는다. 그래서 1924년 1월 5일 폭탄 세 발을 던지지만 모두 아쉬운 불발에 그치고 그는 체포되고 만다.
재판정에서 그는 재판정을 압도하는 일장연설을 토한다. “이 사건의 예심정에서 판사는 나에 대하여 너희들이 지금 독립이니 무엇이니 떠들고 있으나 만일 지금 독립을 시켜 준다고 하면 과연 너희가 독립하여 살아갈 방도가 있느냐고 했으니 이건 일개 판사의 몸으로 우리 2천만 민중을 모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조선의 독립선언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다..... 조선 민중은 굶어죽고 맞아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선고를 받는 것은 광영이다. 사형 아니면 무죄를 내리라!”
그를 변호한 것은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후세 다쓰시였다. 그는 조선 독립운동의 대의와 인명살상 없음 등을 이유로 무죄를 다투는데 한 대목에서 김지섭의 타박을 받는다. 후세 변호사는 당국이 경찰을 스파이로 활용, 독립운동 단체에 몰래 잠입시키는 이른바 프락치 공작의 부당성을 지적했는데 김지섭은 이를 강하게 부인한다. “황옥을 밀정이라 함은 웃기는 일이다.”
여기서 황옥은 일본 경찰의 경부라는 꽤 높은 지위에 있던 이의 이름이다. 일본 경찰은 실제로 조선인 경찰을 의열단에 위장 가입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엄선된 이가 황옥이었다. 황옥은 이른바 ‘고등계 형사’였다. 그런 일을 한 자체로 친일파 혐의를 벗어나기는 무망하지만 그의 행적은 미스테리하기까지 하다. 고등계 형사로 복무하면서 그는 적잖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고, 앞서 언급한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 때에는 직접 폭탄 반입에 나서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고등계 형사로서 밀정 노릇을 했다고 현재까지도 의심받고 있으며, 의열단에 가입한 뒤에도 이중스파이로 의심받았던 황옥과 굳게 맺어졌던 것은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시현이었다. 둘은 의형제를 맺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황옥은 대담하게 폭탄에 총독부 공용 물건 딱지를 붙여 국경을 통과시켰지만 또 다른 밀정에 의해 정체가 폭로되고 김시현과 함께 체포되는데 막판에 김지섭을 국외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김지섭으로서는 후세 변호사가 황옥을 밀정이라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3명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와 같았다. 김지섭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지만 감옥에서 석연치 않게 옥사한다. 그는 옥중에서 이런 시를 남겼다. “ 한국의 선비들은 푸른하늘만 쳐다보며/ 만사 무심하게 세월만 보내네/ 15년전(1910) 오늘의 원한을 생각하면 / 살아 나라에 보답 못하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해방이 왔을 때 황옥은 반민특위에 나가 그의 상관이었던 악질 친일 경찰 김태석 (강우규 의사를 체포, 고문했던 황옥 자신의 상관)의 죄상을 고발한다. 이때 황옥이 밀반입한 폭탄의 소재를 고발했던 친일경찰 권상호도 함께 고발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뒤 서울에 남아 있던 황옥은 납북되고 “외국군 철수”를 부르짖는 평양 방송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김지섭과 안동 동향이었던 김시현의 경우는 더 기구하다.
의열단원으로서 열혈 행동대원이었던 김시현의 피는 중년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던 것 같다. 김시현은 심문을 받던 중 비밀 누설을 할까 두려워 그 혀를 깨물다가 혀의 일부가 끊겨 나가 평생 혀짧은 소리를 내야 했을만큼 ‘독한’ 사람이었다. 원래 아호는 ‘학우’였는데 취조하던 검사가 ‘도대체 뭘 구하자는 것인가 ’하구‘(何求)라고 해라.’고 타박하자 그예 호를 하구로 바꿔 버리기도 했다. 이 하구 김시현은 해방 이후 김구가 안두희에게 죽는 것을 보고는 “이건 이승만 짓이다. 독립운동을 같이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여버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1952년 의열단 동지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김지섭의 폭탄처럼 그 총도 불발이었고, 김시현은 18년 7개월의 일제 시대 옥살이에 더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10년의 옥살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 암살 기도로 인해 그는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다.
1924년 1월 5일 일본 천황의 궁성을 향해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거친 숨결과 슬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었고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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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5일 김지섭의 폭탄 그리고 황옥 김시현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 앞에는 ‘안경다리’라고 불리는 니주바시 다리가 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살아 있는 신으로서 일본 국민들의 범접할 수 없는 존경의 대상이던 천황이 사는 궁궐로 들어가는 다리. 그 다리에서 궁성을 향하여 폭탄이 날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1924년 1월 5일이었다. 조선인 김지섭. 경상도 안동 출신의 의열단원이었다.
영특하고 배움이 빨라 합방 전 보통학교 교사와 재판소 서기 및 통역 (일본어를 2개월만에 독파했다고)이 되었던 그는 그 이력으로 한세상 잘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합병 이후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전에도 교류가 있던 김원봉이 결성한 의열단원이 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할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1923년 3월의 폭탄 반입 사건이었다. 모두 36개의 폭탄을 중국으로부터 들여와서 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폭파하고자 한 사건이었다. 총독부와 일본 경찰이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던 이 거사는 사전 탐지되어 김지섭과 의열단장 김원봉 등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황옥, 김시현 등은 체포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이후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조선인들이 이를 틈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이성을 잃은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의 조선인 학살을 감행한다. 무려 6천 여명의 조선인이 이국 땅의 원귀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독립운동가들 또한 격분한다. “이 쪽발이 새끼들을 쳐죽이고 말겠다.” 김지섭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제국 의회가 열려 일본 총리 이하 고관대작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소식이 들렸고 김지섭은 김원봉에게 달려간다. “기회요. 나보다 일본말 잘하는 사람이 없고 기분은 좀 나쁘지만 생김새도 일본놈 비슷하니 내가 적임자요. 내가 가서 놈들을 때려잡겠소.”
마침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는 김지섭. 그는 폭탄 세 개를 품고 있었다. 그를 도운 것은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김지섭들은 일본인들의 도움을 못 미더워해다지만 어쩔 수 없었고 그들은 신의를 지켰다. 남해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양반의 본고장 안동에서 자란 사람답게 김지섭은 유려한 한시를 지어 읊는다. 그는 한학에 능통했다.
“표연히 이 한 몸 만 리 길 떠나갈 때 (萬里飄然一粟身)
배 안엔 모두 원수이니 벗할 이 뉘 있는가 (舟中皆敵有誰親)
(중략)
오늘날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今日潛踪浮海客)
그 몇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을 하였던가 (昔年嘗膽臥薪人)
이미 걸은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此行已決平生志)
다시는 고국을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不向關門更問津)
그러나 석탄 화물선 바닥에 숨어 바다를 건넌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폭탄은 습기를 머금었고 본디 성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지섭은 항해 와중에 제국의회가 휴회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제에 일본 천황의 궁성에 폭탄을 던지리라 마음 먹는다. 그래서 1924년 1월 5일 폭탄 세 발을 던지지만 모두 아쉬운 불발에 그치고 그는 체포되고 만다.
재판정에서 그는 재판정을 압도하는 일장연설을 토한다. “이 사건의 예심정에서 판사는 나에 대하여 너희들이 지금 독립이니 무엇이니 떠들고 있으나 만일 지금 독립을 시켜 준다고 하면 과연 너희가 독립하여 살아갈 방도가 있느냐고 했으니 이건 일개 판사의 몸으로 우리 2천만 민중을 모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 조선의 독립선언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다..... 조선 민중은 굶어죽고 맞아죽고 하는 가운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선고를 받는 것은 광영이다. 사형 아니면 무죄를 내리라!”
그를 변호한 것은 인권 변호사로 유명한 후세 다쓰시였다. 그는 조선 독립운동의 대의와 인명살상 없음 등을 이유로 무죄를 다투는데 한 대목에서 김지섭의 타박을 받는다. 후세 변호사는 당국이 경찰을 스파이로 활용, 독립운동 단체에 몰래 잠입시키는 이른바 프락치 공작의 부당성을 지적했는데 김지섭은 이를 강하게 부인한다. “황옥을 밀정이라 함은 웃기는 일이다.”
여기서 황옥은 일본 경찰의 경부라는 꽤 높은 지위에 있던 이의 이름이다. 일본 경찰은 실제로 조선인 경찰을 의열단에 위장 가입시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에서 엄선된 이가 황옥이었다. 황옥은 이른바 ‘고등계 형사’였다. 그런 일을 한 자체로 친일파 혐의를 벗어나기는 무망하지만 그의 행적은 미스테리하기까지 하다. 고등계 형사로 복무하면서 그는 적잖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고, 앞서 언급한 의열단의 폭탄 반입 사건 때에는 직접 폭탄 반입에 나서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고등계 형사로서 밀정 노릇을 했다고 현재까지도 의심받고 있으며, 의열단에 가입한 뒤에도 이중스파이로 의심받았던 황옥과 굳게 맺어졌던 것은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시현이었다. 둘은 의형제를 맺고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황옥은 대담하게 폭탄에 총독부 공용 물건 딱지를 붙여 국경을 통과시켰지만 또 다른 밀정에 의해 정체가 폭로되고 김시현과 함께 체포되는데 막판에 김지섭을 국외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김지섭으로서는 후세 변호사가 황옥을 밀정이라 부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3명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바람에 휘둘리는 갈대와 같았다. 김지섭은 무기징역 선고를 받지만 감옥에서 석연치 않게 옥사한다. 그는 옥중에서 이런 시를 남겼다. “ 한국의 선비들은 푸른하늘만 쳐다보며/ 만사 무심하게 세월만 보내네/ 15년전(1910) 오늘의 원한을 생각하면 / 살아 나라에 보답 못하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해방이 왔을 때 황옥은 반민특위에 나가 그의 상관이었던 악질 친일 경찰 김태석 (강우규 의사를 체포, 고문했던 황옥 자신의 상관)의 죄상을 고발한다. 이때 황옥이 밀반입한 폭탄의 소재를 고발했던 친일경찰 권상호도 함께 고발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진 뒤 서울에 남아 있던 황옥은 납북되고 “외국군 철수”를 부르짖는 평양 방송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김지섭과 안동 동향이었던 김시현의 경우는 더 기구하다.
의열단원으로서 열혈 행동대원이었던 김시현의 피는 중년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던 것 같다. 김시현은 심문을 받던 중 비밀 누설을 할까 두려워 그 혀를 깨물다가 혀의 일부가 끊겨 나가 평생 혀짧은 소리를 내야 했을만큼 ‘독한’ 사람이었다. 원래 아호는 ‘학우’였는데 취조하던 검사가 ‘도대체 뭘 구하자는 것인가 ’하구‘(何求)라고 해라.’고 타박하자 그예 호를 하구로 바꿔 버리기도 했다. 이 하구 김시현은 해방 이후 김구가 안두희에게 죽는 것을 보고는 “이건 이승만 짓이다. 독립운동을 같이 한 처지에 정적이라고 죽여버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1952년 의열단 동지와 함께 이승만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김지섭의 폭탄처럼 그 총도 불발이었고, 김시현은 18년 7개월의 일제 시대 옥살이에 더하여 해방된 조국에서 10년의 옥살이를 더하게 된다. 그리고 이승만 암살 기도로 인해 그는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다.
1924년 1월 5일 일본 천황의 궁성을 향해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거친 숨결과 슬픈 역사가 도사리고 있었고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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