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1년 1월 4일 1.4 후퇴
조영남이 부른 노래 중에 “내 고향 충청도”라는 노래가 있다. 뭔가 구수한 멜로디에 정이 뚝뚝 떨어지는 가사가 버무려진 노래.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 싶은 곳.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이 정다운 노래의 원 가사는 좀 얼떨떨할 만큼 분위기가 다르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노래의 원곡 가사는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고향 충청도’의 주인공이 충청도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전혀 따사롭지 않다. “내 고향 충청도”의 첫 가사.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내 고향 충청도.” 1.4 후퇴.
1.4 후퇴는 1950년 가을 이후 북진하던 한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한 과정을 총괄하는 단어다. 1951년 1월 4일 일제히 후퇴를 시작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날 서울은 텅 비어 있었고 바로 다음날 중국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이미 12월 초에 시작한 평양 철수, 12월 중순 시작한 흥남 철수 이래 한반도 중부는 피난과 후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경의선을 달리는 열차는 평양 이남의 피난민들을 지붕 위까지 싣고 기적을 울렸고 서울 시민들은 전세가 이상하게 되어 간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 연인 서울역 앞에 장사진을 쳤다.
서울 시민들에게 공식 소개령이 떨어진 건 흥남 철수가 완료되던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그를 전후하여 서울을 탈출한 것은 80여만 명..... 당시 서울 인구 1백만 잡고 8할이 서울을 떠났던 셈이다. 서울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경우 1월 3일쯤 되면 거의 유령도시에 가까웠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은 남부여대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작전에 차질을 빚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후 전쟁에서 “도살 작전”을 펼쳐 중공군을 밀어올리게 되는 이 강골 군인은 “유사시 무기를 써서라도” 피난민을 통제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기우임을 깨닫게 된다. 이미 한국인들은 생존의 방식을 체득하고 질서정연하게 한줄로 서서 혹한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피난 과정을 지켜보고 리지웨이가 남긴 기록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은 천정을 보게 만든다.
“부교의 상하류에는 인류사의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혹한 설풍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채 얼지도 않은 강 위를 미끄러지며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얕은 얼음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는 있었으나 누구 하나 이웃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우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 소리만이 가팔랐고 이따금의 탄식만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1967, Korean War)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군인들만 서로에게 악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채 얼어붙지 않은 강물을 건너는 중 이웃이 살얼음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그를 돕기는 커녕 행여 내 발밑이 꺼질세라 저만치 돌아가야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울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음아 날 살려라 걷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누가 죽는 것 따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1951년 1월 2일 마지막 피난 열차가 서울을 떠났다. 열차 안은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열차 지붕 위에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찼다. 흔들리는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과 맘을 집중했지만 깜빡 하는 사이에 열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그곳이 아마도 시흥역에서 안양역 사이였나 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열차 한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나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수백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먼 곳까지 나둥그러져 있었다. 철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철길을 따라 걸어 온 우리들은 이곳을 피해 갈수는 없었다.
몇몇 다른 피난민들의 말로는 어제 밤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기차에 많은 피난민들이 곳간차(庫間車) 지붕 위까지 수천 명이 매달리며 올라탔는데 이미 적진(敵陣)이 되어 몇 번이고 비행기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이 열차는 이미 적진 안에 있어서 곧 폭격을 하겠다! 피난민 여러분들은 빨리 내려서 걸어 가시요!" 라고 했다는데 일부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그냥 기차에 매달린 채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14세 소년이 겪은 한국전쟁,http://dae6.tistory.com/ 중) 그 후퇴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다.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배우기 위해 자신의 편견과 입장을 극복하여 객관화된 사실 그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도 소중하다. 전쟁을 대하는 자세 또한 그렇고, 그를 겪은 이들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그렇다. 전쟁이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이라는 데에 공감한다면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규명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칠 때 역사는 미래를 향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련이 몰락한 후 소련 측의 비밀 문서까지 몽땅 공개되어 김일성과 박헌영과 스탈린의 대화까지 죄다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6.25가 남침인가 북침인가”의 질문에 명색 진보정당 대표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얼렁뚱땅 무식을 폭로하는 형국이라면 그 진보가 과연 1.4를 경험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전쟁 반대’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 반대를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면서도, 당장 전쟁의 방아쇠가 될 민간인 거주 구역 포격에 대해서는 “포격을 하게 만든 책임”을 먼저 묻는 진보가 1.4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까. 전쟁을 겪은 세대, 이후의 냉전을 가장 처절하게 경험한 세대가 가장 강경하고 완고하게 후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진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들을 꼴통으로 치부해 버리면 되나?
전철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잔뜩 얼었다가 풀리는 한강물을 보았다. 1951년 얼어붙은 한강 위를 필사적으로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 위에 오버랩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비극은 다시 없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지난 5년은 그 비극으로 어떻게 하면 더 근접할까 치달아왔던 세월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 모두의 정권이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5년은 어떨 것이며, 어때야 할까. 그리고 자칭 ‘진보’의 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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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4일 1.4 후퇴
조영남이 부른 노래 중에 “내 고향 충청도”라는 노래가 있다. 뭔가 구수한 멜로디에 정이 뚝뚝 떨어지는 가사가 버무려진 노래.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 싶은 곳. 논과 밭 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이 정다운 노래의 원 가사는 좀 얼떨떨할 만큼 분위기가 다르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노래의 원곡 가사는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고향 충청도’의 주인공이 충청도에 정착하게 된 이유도 전혀 따사롭지 않다. “내 고향 충청도”의 첫 가사.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내 고향 충청도.” 1.4 후퇴.
1.4 후퇴는 1950년 가을 이후 북진하던 한국군과 UN군이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후퇴한 과정을 총괄하는 단어다. 1951년 1월 4일 일제히 후퇴를 시작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날 서울은 텅 비어 있었고 바로 다음날 중국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이미 12월 초에 시작한 평양 철수, 12월 중순 시작한 흥남 철수 이래 한반도 중부는 피난과 후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경의선을 달리는 열차는 평양 이남의 피난민들을 지붕 위까지 싣고 기적을 울렸고 서울 시민들은 전세가 이상하게 되어 간다는 소문이 퍼진 이후 연인 서울역 앞에 장사진을 쳤다.
서울 시민들에게 공식 소개령이 떨어진 건 흥남 철수가 완료되던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그를 전후하여 서울을 탈출한 것은 80여만 명..... 당시 서울 인구 1백만 잡고 8할이 서울을 떠났던 셈이다. 서울 인근도 마찬가지였다. 인천의 경우 1월 3일쯤 되면 거의 유령도시에 가까웠다고 한다. 서울 시민들은 남부여대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넜다.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작전에 차질을 빚을 것을 두려워했다. 이후 전쟁에서 “도살 작전”을 펼쳐 중공군을 밀어올리게 되는 이 강골 군인은 “유사시 무기를 써서라도” 피난민을 통제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기우임을 깨닫게 된다. 이미 한국인들은 생존의 방식을 체득하고 질서정연하게 한줄로 서서 혹한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피난 과정을 지켜보고 리지웨이가 남긴 기록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은 천정을 보게 만든다.
“부교의 상하류에는 인류사의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혹한 설풍 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채 얼지도 않은 강 위를 미끄러지며 넘어지면서 건너고 있었다. 얕은 얼음에 빠지거나 넘어져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는 있었으나 누구 하나 이웃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우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밟는 신발 소리만이 가팔랐고 이따금의 탄식만을 남긴 채 피난민들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1967, Korean War)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군인들만 서로에게 악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채 얼어붙지 않은 강물을 건너는 중 이웃이 살얼음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그를 돕기는 커녕 행여 내 발밑이 꺼질세라 저만치 돌아가야 하고, 그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거나 흐느껴 울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음아 날 살려라 걷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구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누가 죽는 것 따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1951년 1월 2일 마지막 피난 열차가 서울을 떠났다. 열차 안은 콩나물 시루 같았고 열차 지붕 위에까지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찼다. 흔들리는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과 맘을 집중했지만 깜빡 하는 사이에 열차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그곳이 아마도 시흥역에서 안양역 사이였나 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열차 한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나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수백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먼 곳까지 나둥그러져 있었다. 철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철길을 따라 걸어 온 우리들은 이곳을 피해 갈수는 없었다.
몇몇 다른 피난민들의 말로는 어제 밤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기차에 많은 피난민들이 곳간차(庫間車) 지붕 위까지 수천 명이 매달리며 올라탔는데 이미 적진(敵陣)이 되어 몇 번이고 비행기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이 열차는 이미 적진 안에 있어서 곧 폭격을 하겠다! 피난민 여러분들은 빨리 내려서 걸어 가시요!" 라고 했다는데 일부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그냥 기차에 매달린 채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14세 소년이 겪은 한국전쟁,http://dae6.tistory.com/ 중) 그 후퇴 과정에서 죽은 사람들,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한맺힌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다.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배우기 위해 자신의 편견과 입장을 극복하여 객관화된 사실 그 자체를 탐구하는 작업도 소중하다. 전쟁을 대하는 자세 또한 그렇고, 그를 겪은 이들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그렇다. 전쟁이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일이라는 데에 공감한다면 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규명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을 거칠 때 역사는 미래를 향한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련이 몰락한 후 소련 측의 비밀 문서까지 몽땅 공개되어 김일성과 박헌영과 스탈린의 대화까지 죄다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6.25가 남침인가 북침인가”의 질문에 명색 진보정당 대표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얼렁뚱땅 무식을 폭로하는 형국이라면 그 진보가 과연 1.4를 경험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전쟁 반대’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 반대를 목이 쉬도록 부르짖으면서도, 당장 전쟁의 방아쇠가 될 민간인 거주 구역 포격에 대해서는 “포격을 하게 만든 책임”을 먼저 묻는 진보가 1.4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을까. 전쟁을 겪은 세대, 이후의 냉전을 가장 처절하게 경험한 세대가 가장 강경하고 완고하게 후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진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들을 꼴통으로 치부해 버리면 되나?
전철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서 잔뜩 얼었다가 풀리는 한강물을 보았다. 1951년 얼어붙은 한강 위를 필사적으로 건너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 위에 오버랩되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비극은 다시 없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지난 5년은 그 비극으로 어떻게 하면 더 근접할까 치달아왔던 세월이었다. 그것은 남과 북 모두의 정권이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5년은 어떨 것이며, 어때야 할까. 그리고 자칭 ‘진보’의 할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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