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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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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3 한국의 발자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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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2년 1월 3일 한국의 발자크 사망 

문학에 문외한임을 전제로, 더구나 시의 세계와는 서울과 샌프란시스코와의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문외한도 무식쟁이도 언론의 자유가 있는 (있다고 말해지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감히 궁금증 하나를 토로한다면 저는 왜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 후보로 그렇게 운위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 비해 그리 빼어난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만인보’는 문학적인 성취보다는 20세기 한국의 일종의 단체 인물화(?)로서 역사에 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만인보 가운데 하나를 꼽아보면 이렇습니다.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를 멜로물로 그리는 사람 /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를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 /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과거 / 언제나 현실이되 / 현실인양/ 비현실적인 회한의 반동이었다. "

고은이 그다지 친절하다고는 볼 수 없는 단어들을 동원하여 묘사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작가 이병주입니다. <알렉산드리아> <관부연락선> <행복어 사전> 등등 열거하기 어려운 저서와 수많은 글들을 남긴 소설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지리산>으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고은 시인이 왜 저런 냉담한 평가를 내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지리산>으로만 비추어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저는 거기에 반대하지만 말이죠. 

저는 고등학교 때 <지리산>을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빨치산’ 또는 ‘파르티잔’이라는 단어가 시민권을 얻기 전이었고 저는 지리산 ‘공비’들이 누구였는가를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요. 즉 북한 괴뢰 집단이 파견한 피도 눈물도 없는 짐승들, 종간나 새끼들 부르짖으며 따발총 휘두르던 무장집단이 아니라 나와 익숙한 사투리를 쓰고 북쪽과는 별 관련도 없는 이들이 자신의 이념에 따라, 또는 떠밀리듯 어쩔 수 없이 자처해야 했던 이름이 ‘빨치산’이라는 걸 말이죠. 아울러 저는 <지리산>이 <태백산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실 <태백산맥>은 7권 이후 급격히 작가의 시점이 변화하는 걸 느꼈고 주요인물들의 입체감이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주인공 김범우도 그렇고 나약한 지식인 손승호도 그랬고 귀추가 주목되던 심재모같은 정상적인(?) 군인도 곁가지로 빠져 버리고 갑자기 이태식이나 조원제가 주인공이 되는 빨치산 전기(?)같이 되어 버려서 이거 뭐지?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반해, <지리산>은 해방 전 진주 중학의 일본인 교장부터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사형을 감수하는 순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여자 순이, 때로 정의감에 불타지만 그 정의감을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생각이 많은 박태영 등 등장인물들의 하나 하나의 재질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만져질 정도로 생생했었거든요. 

물론 동지들 고맙소 하면서 수류탄으로 부하들과 함께 자결하는 염상진의 무덤 앞에 하대치가 이끄는 빨치산들이 투쟁을 다짐한 뒤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태백산맥>이 80년대 정서에는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을까’라고 쓴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된 감정으로 넋을 잃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던” 박태영에 더 공감이 갔으니까요. 이병주가 <지리산> 연재를 시작하면서 한 말을 들으면 그 공감은 배가 됩니다. “나는 ‘지리산’을 실패할 각오로 쓴다. 민족의 거창한 좌절을 실패 없이 묘사할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내게는 없다. … 최선을 다해 나의 문학적 신념을 지리산에 순교할 각오다." 그리고 더 역사의 묵직함을 알려주는 사실 하나. 그가 <지리산> 연재를 시작한 것은 1972년 9월 유신 직전이었습니다. 

일찍이 5.16 쿠데타 이후 “내게는 조국이 없다. 산하(山河)가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의 논설을 썼다가 미운털이 박혀서 자그마치 10년 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동안씩이나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그는 공화국의 죽음이라 할 유신 앞에서 폭음하면서 “내가 사마천이 되어 소설로 이를 비판하겠다.”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나는 이 대목에서 그의 지점이랄까 한계랄까 그 스스로 설치한 영역이랄까 하여간 뭐 그 비슷한 것을 느낍니다. 사마천은 그가 꺼낼 수 있는 분노의 최대치였다는 것이죠. 그는 사마천이 될지언정 결코 진시황을 노린 형가는 될 수 없었고, 그 자신 평생 부끄러워했던 일본군 학병이 되는 동안 지리산으로 숨어 버리고 저항을 꿈꾼 하준규 (실명 하준수)는 되지 못했을 거라는 거죠. 

사실 그게 범인(凡人)에게는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만, 그에게는 평생 짐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우익에게는 좌익분자로, 좌익에게는 악질 반공분자로 종종 몰리면서 살았습니다. 대학 시절 이병주의 <지리산>을 들먹이는 제가 묘한 눈빛을 보냈던 선배들에게 무안했던 기억은 후자를 대변할 것이고 문단의 후배가 “선배님 빨치산이셨죠?”라고 물어오자 격노하여 술잔을 내던지며 주먹을 휘둘렀던 이병주 본인의 오버는 전자를 설명할 수 있을 겝니다. 그래서일까요 그가 각혈하듯 내뱉은 한 마디는 제 가슴을 공감과 지지의 북과 종소리로 크게 울려 댑니다.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으로 되는 것이라야 한다.” <삐에로와 국화> 중

그가 별세한 이후 그의 기념사업회가 성립됐을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 늘어선 사람들의 구성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일단 공동위원장은 제 대학 시절과 맞닿아 있는 6공화국의 서슬퍼랬던 검찰총장 정구영, 그리고 김윤식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원들의 명단에는 임현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리영희 교수와 더불어 저 유명한 5공의 실세 허문도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 이름들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러모을 수 있었던 사람. 하지만 어떤 진보적인 평론가에게는 “문학사적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혹평까지 들었다는 작가 이병주가 1992년 1월 3일 죽었습니다. “나폴레옹 앞에 알프스가 있었듯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고 했던 유려한 문체의 작가가 수많은 유작을 남긴 채 평생 어지러웠던 나라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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