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3년 1월 9일 다대포 앞바다의 비극
영호남을 이어주는 교통편은 오랫 동안 불편했다. 지금은 그나마 고속도로들이 이어져 있지만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영호남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편은 해상 교통이었다. 그리고 그 물길은 부산항에 이르기 전 다대포 앞바다를 통과한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한 뒤 물러나는 길도 다대포를 거쳤을 것이고, 거기서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 정운이 전사했고 그의 전몰지는 ‘몰운대’ (정운이 죽은 곳)로 명명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때 조선 수군도 그 험한 물길 때문에 고생이 자심했다고 하거니와 다대포 앞바다는 유난히 사고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3년 1월 9일 밤 일어났다.
1월 9일 오후 두 시 창경호라는 이름의 배가 여수항을 떠났다. 전쟁 중이라지만 그래도 설은 쇠야 했기에 임시수도 부산으로 향하는 창경호에는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난 쌀 450가마와 수산물 50가마가 배에 그득히 실렸다. 다도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통영항에 입항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인 6시경.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경호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구정 대목을 노려 부산에 가서 물건을 떼 오려는 상인들이었다. 그렇게 올라탄 것이 수백 명.
원래 일본 화물선 천신환이었던 창경호는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것을 대충 고쳐서 다시 바다에 띄운 허약한 배였다. 만들어진 지는 20년이 지났고 배 자체도 불안정했다. 여기에 쌀 수백 가마와 정원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찬 것이다. 거기에 남해 바다에는 불길한 요소 하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육지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파도가 맞물려 기습적으로 솟구치는 삼각파도가 그것이었다. 1월 9일 그렇지 않아도 파도가 드높은 겨울 바다였다. 통영을 떠나 부산의 목전인 다대포 앞바다에 이른 창경호에는 연신 파도가 부딪혀 공포스런 포말로 부서졌다. 흡사 피난선처럼 사람들이 들어찬 창경호 곳곳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파도를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던 중 커다란 파도가 창경호의 옆구리를 들이쳤고 순식간에 배는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다른 파도가 배를 때렸고 창경호는 순식간에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그 배에 탄 사람은 236명이었지만 실상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236명 사망자 가운데 229명이 엄동설한의 겨울 바다의 원혼이 됐다. 생존자는 단 7명. 창경호에는 구명장비가 전혀 없었다. 구명장비는 ‘도난’을 우려해서 배가 아니라 회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장비보다 사람의 목숨을 소홀히 한 댓가를 창경호는 처절하게 치르고 말았다. 부산일보가 호외를 뿌렸고 부산 시민들은 다대포를 향해 달려갔다. 구조 작업이 시작됐지만 기적은 드물었다. 많은 이들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겨울 바다를 헤엄쳐 섬에 상륙하긴 했지만 얼어 죽기도 했고, 많은 시신들이 줄을 엮은 것 같이 줄줄이 손을 잡고 죽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 교통부 장관이란 이의 망언이 유족들과 국민들의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창경호 사건은 풍랑 탓”이라며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사고로 규정했던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라면 그는 창경호 선주와 인척 관계였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로는 배의 소유주가 ‘장관의 영식’ 즉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여객선 개조, 정원 초과, 안전 장비 미비 등 모든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불법적이었던 창경호 사건을 불가항력으로 규정한 교통부 장관은 분노한 국민들 앞에 사표를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창경호 침몰은 탐욕을 부리는 이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보였지만 창경호의 마(魔)는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1967년 진해 가덕도 앞바다에서 역시 여수와 부산을 오가던 여객선 한일호가 구축함 충남함에 부딪쳐 침몰하여 90명이 넘는 이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그 배의 엔진은 바로 14년 전 침몰한 창경호의 엔진이었던 것이다. 인양한 배에서 엔진을 떼내어 자기 배에 달고 운항하던 한일호 역시 구명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그를 점검해야 할 공무원도 사바사바에 눈을 감았으며 결국 그 많은 생명을 물 속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창경호의 저주라고 해야 하나.
폭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배 천신환은 그 배조차 귀하던 시절 덕에 창경호로 살아났고 그 엔진은 한일호까지 이어져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돈 몇 푼에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악습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캄캄한 겨울바다 위에서 살려달라 악을 쓰다가 물 속으로 사라져간 원혼들의 포한은 쉽사리 이해가 간다. 구조대는 몇 시간 동안이나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고, 외로운 희생자들은 영화 <타이타닉>의 승객들처럼 빠져 죽고 얼어 죽어 갔다. 차이점은 있겠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구명조끼는 다들 챙겨 입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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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9일 다대포 앞바다의 비극
영호남을 이어주는 교통편은 오랫 동안 불편했다. 지금은 그나마 고속도로들이 이어져 있지만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 영호남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편은 해상 교통이었다. 그리고 그 물길은 부산항에 이르기 전 다대포 앞바다를 통과한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한 뒤 물러나는 길도 다대포를 거쳤을 것이고, 거기서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장수 정운이 전사했고 그의 전몰지는 ‘몰운대’ (정운이 죽은 곳)로 명명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때 조선 수군도 그 험한 물길 때문에 고생이 자심했다고 하거니와 다대포 앞바다는 유난히 사고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53년 1월 9일 밤 일어났다.
1월 9일 오후 두 시 창경호라는 이름의 배가 여수항을 떠났다. 전쟁 중이라지만 그래도 설은 쇠야 했기에 임시수도 부산으로 향하는 창경호에는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난 쌀 450가마와 수산물 50가마가 배에 그득히 실렸다. 다도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통영항에 입항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인 6시경.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경호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구정 대목을 노려 부산에 가서 물건을 떼 오려는 상인들이었다. 그렇게 올라탄 것이 수백 명.
원래 일본 화물선 천신환이었던 창경호는 미군의 폭격으로 손상된 것을 대충 고쳐서 다시 바다에 띄운 허약한 배였다. 만들어진 지는 20년이 지났고 배 자체도 불안정했다. 여기에 쌀 수백 가마와 정원 이상의 사람들이 들어찬 것이다. 거기에 남해 바다에는 불길한 요소 하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육지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파도가 맞물려 기습적으로 솟구치는 삼각파도가 그것이었다. 1월 9일 그렇지 않아도 파도가 드높은 겨울 바다였다. 통영을 떠나 부산의 목전인 다대포 앞바다에 이른 창경호에는 연신 파도가 부딪혀 공포스런 포말로 부서졌다. 흡사 피난선처럼 사람들이 들어찬 창경호 곳곳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파도를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던 중 커다란 파도가 창경호의 옆구리를 들이쳤고 순식간에 배는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다른 파도가 배를 때렸고 창경호는 순식간에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들어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그 배에 탄 사람은 236명이었지만 실상은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236명 사망자 가운데 229명이 엄동설한의 겨울 바다의 원혼이 됐다. 생존자는 단 7명. 창경호에는 구명장비가 전혀 없었다. 구명장비는 ‘도난’을 우려해서 배가 아니라 회사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장비보다 사람의 목숨을 소홀히 한 댓가를 창경호는 처절하게 치르고 말았다. 부산일보가 호외를 뿌렸고 부산 시민들은 다대포를 향해 달려갔다. 구조 작업이 시작됐지만 기적은 드물었다. 많은 이들이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겨울 바다를 헤엄쳐 섬에 상륙하긴 했지만 얼어 죽기도 했고, 많은 시신들이 줄을 엮은 것 같이 줄줄이 손을 잡고 죽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 교통부 장관이란 이의 망언이 유족들과 국민들의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창경호 사건은 풍랑 탓”이라며 인력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사고로 규정했던 것이다. 후에 밝혀진 일이라면 그는 창경호 선주와 인척 관계였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로는 배의 소유주가 ‘장관의 영식’ 즉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듯 하다.) 여객선 개조, 정원 초과, 안전 장비 미비 등 모든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불법적이었던 창경호 사건을 불가항력으로 규정한 교통부 장관은 분노한 국민들 앞에 사표를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창경호 침몰은 탐욕을 부리는 이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보였지만 창경호의 마(魔)는 그것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1967년 진해 가덕도 앞바다에서 역시 여수와 부산을 오가던 여객선 한일호가 구축함 충남함에 부딪쳐 침몰하여 90명이 넘는 이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그 배의 엔진은 바로 14년 전 침몰한 창경호의 엔진이었던 것이다. 인양한 배에서 엔진을 떼내어 자기 배에 달고 운항하던 한일호 역시 구명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그를 점검해야 할 공무원도 사바사바에 눈을 감았으며 결국 그 많은 생명을 물 속에 가라앉히고 말았다. 창경호의 저주라고 해야 하나.
폭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배 천신환은 그 배조차 귀하던 시절 덕에 창경호로 살아났고 그 엔진은 한일호까지 이어져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돈 몇 푼에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악습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캄캄한 겨울바다 위에서 살려달라 악을 쓰다가 물 속으로 사라져간 원혼들의 포한은 쉽사리 이해가 간다. 구조대는 몇 시간 동안이나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었고, 외로운 희생자들은 영화 <타이타닉>의 승객들처럼 빠져 죽고 얼어 죽어 갔다. 차이점은 있겠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구명조끼는 다들 챙겨 입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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