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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12 한국 조영래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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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0년 12월 12일 한국, 조영래를 잃다

겨울 삭풍이 땅을 얼리기 시작하던 1990년 12월 중순, 한 변호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47년 돼지띠이니 나이 마흔 셋. 한 개인으로 봐도 요절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할 나이였지만 눈물 범벅이 되어 영결식에 참석한 이들은 그의 이른 죽음에 땅을 치며 통탄하고 하늘을 우러러 원망했다. 고인의 이름은 조영래였다.

그의 영결식 순서지에는 많은 이들의 이름이 보인다. 노무현, 문익환, 계훈제, 송건호, 이소선 등은 이미 그의 곁으로 갔지만, 후배 박원순은 지금 서울 시장이 되어 있고,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파킨슨씨 병을 얻어 신음 중이다. 김문수와 이재오는 길을 바꿔 정권의 핵심에서 조영래가 목숨 걸고 저항했던 세력과 짝짜꿍 놀이를 한 지 오래고, 당시 경실련을 만들어 줏가를 올리던 서경석은 좀 안쓰럽게 변모해 있다. 영결식 순서지를 장식한 이름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이름은 조갑제다. 그는 순서지에 추모사까지 썼다. 조갑제의 추모사를 통해 조영래를 되새기는 이 오묘한 느낌이라니.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 스물 다섯에 정년 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우리 사회를 울리는 의미를 뽑아 냈다.”

정확히 말하면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가 아니라 연탄 공장 근처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여인의 문제였다. 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없던 그녀는 백약을 써도 무효인 감기에 걸려 있었고 그 병명은 폐결핵, 또 다시 진폐증으로 판명났다. 이 사건을 특종보도한 이가 이번에 국회 디도스 공격을 독자적으로 전개한 대단한 비서를 거느려 화제가 된 최구식 국회의원(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었다. 그런데 의료보험증이 없던 환자가 다른 이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썼던 관계로 피해자 인정을 받지 못할 처지에 이르자 최 기자는 조영래를 찾았다. 진폐증으로는 판명되었지만 연탄공장과의 인과관계를 밝히기도 무망했고, 가난에 찌들었던 피해자는 소송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조영래는 이 사건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다.


우선 그는 빈한한 피해자를 위해 소송구조 제도를 끄집어냈다. 소송구조란 경제적 약자에게 인지대 등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법원이 대신 내주는 제도였는데 거의 이용자가 드문 가사상태의 법조문을 깨워설랑 법원 코 앞에 들이민 것이다.

  피고 측은 석탄 산업의 공익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연탄공장이 주거지에 먼저 들어서고, 그 뒤에 주택가가 형성된 점 등을 들어 석탄가루 방산에 대해 주민들이 어느 정도 ‘수인할 의무(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조영래 변호사는 우리 헌법에 보장된 환경권을 무기로 받아쳤다. " 모든 국민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집니다! (헌법 제 35조)" 이는 “여태껏 이름뿐인 장식물에 머물렀던 환경권을 정면으로 끌어내 헌법을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일상규범으로 만드는 데 기여” (안경환, 조영래 평전 중)한 것이었다.


스물 다섯 정년의 여자 운운 역시 사연은 기박하다. 교통 사고를 당한 직장 여성이 피해 보상을 요구했더니 1심 판결에서 당시 여성들의 평균 결혼 연령을 계산해서 25세까지의 수입만 보상하라는 날벼락같은 판결이 나왔다. 여자는 결혼하면 돈 못 버니 정년은 25세라는 대단한 판사의 판단. 절망한 피고인이 포기하려 들었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무료 변론까지 자청해 가며 소송을 이어가서 “결혼했다고 직장을 그만두라는 법은 없으니 여성 정년도 55세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얻어낸 것이다.


“분신 자살한 젊은 노동자”의 사연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영래는 그 엄혹한 수배 생활 중에 수양을 하듯, 순례를 하듯 고행을 하듯 전태일의 일생을 추적하고 그를 잘근잘근 씹어먹은 뒤 그 이름도 유명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저를 세상에 토해 냈다. 장기표가 말했듯 그 글은 조영래의 글이기도 했지만 전태일의 글이기도 했다. “돌아가야 한다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를 독백하던 전태일은 조영래의 명문장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줄기로 되살아났다. 글 한 줄 쓰지 않았던 예수의 말씀을 담아 세상을 바꾼 복음서처럼, 전태일 평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그 앞에 자신들의 이름은 남겼으되 (물론 누가 이외의 저작자들은 후세의 추측에 의존한 것이긴 하지만) 조영래는 평생 동안 그 책의 저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고, 드러내지 않아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생전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건은 역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학창 시절 나는 이 사건 관련 변론 요지서 전문을 복사한 것을 몇 년 동안이나 일기에 끼워 놓았었다.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그 글은 법률적인 변론 요지서를 훨씬 넘어서서 한국 현대사상 위대한 명문으로 기록된다. 그 말 한 마디 , 모음과 자음 하나 하나 모두가 사람의 양심을 헤집는 갈퀴였고, 눈물샘의 마개를 빼 버리는 예민한 손길이었으며 야만에 대한 돌팔매였고 비인간의 벽을 들이받는 양심의 공성추였다.


그렇게 80년대 불의 바다를 맨발로 건넜던 조영래 변호사가 1990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밤새 변론 요지서를 쓰다보면 산처럼 쌓였다는 담배 꽁초가,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던 분노의 스트레스가, 자신의 몸 돌보지 않고 세상의 바닥을 돌아다니던 고단함이 그를 폐암으로 몰고 갔고 결국은 죽였다. 대한민국은 조영래를 잃었다.


옛날 케사르는 알렉산더는 나이 스물에 세계를 정복했는데 나는 뭐냐고 한탄했다지만 나는 알렉산더 따위는 부럽지 않다. 나이 마흔 셋, 이제 새해면 조영래 변호사가 돌아간 나이와 갑장이 되는데 그를 생각하면 면구스럽고 쪽팔려서 안절부절 못할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엽서의 글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의 명복을 빈다. 조영래 변호사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의 글이다. 엽서 반댓면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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