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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13 불행한 청년의 행복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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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1년 12월 13일 불행한 청년의 행복한 미소


1931년 12월 13일 중국의 국제 도시 상해의 밤거리. 두 남자가 사진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찾아들었다. 중국 복색의 한 청년이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촬영용 소품이 영 예사롭지 않았다. 일단 태극기가 있었고 그 위에 굵은 먹글씨로 쓴 선서문이 단정하게 놓였고 또 그 위로는 폭탄 두 개가 그 쇳빛을 발하며 얹어져 있었다.


그 소품들 앞에 선 중년의 신사와 서른 정도의 청년 두 사람은 조선말을 쓰고 있었지만 청년 쪽은 좀 수상했다. 그의 조선말 발음이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일본인 특유의 혀 짧은 소리가 간간히 배어나왔고 오히려 가끔 튀어나오는 일본어 단어의 발음 쪽이 더 매끄러운 편이었다. 묵직한 인상의 중년 신사가 말했다. “이군. 폭탄을 들게. 사진을 찍어야지.” 그러자 이군이라 불리운 청년은 쾌활하게 대답했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저는 어차피 거사를 결행하면 죽을 목숨입니다. 고향의 형에게 보낼 사진 먼저 찍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이봉창은 실로 천진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지막 독사진을 찍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의 그늘 같은 건 한 조각도 없이, ‘거사를 결행’할 사람의 비장함같은 건 반 점도 없이. 폭탄을 손에 쥐고서도 그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폭탄을 들고 포즈를 취한 뒤 이봉창은 한인 애국단 가입 선언서를 읽었다. 그를 읽어내릴 때만큼은 그도 웃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일본의 천황을 죽이고자 마련된 폭탄이었다.


 이봉창은 그의 짧은 생애 조선 이름보다는 일본 이름 기노시타 쇼조로서 더 오래 살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본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조선 백성으로서의 포한을 일찌감치 깨우쳐야 했다. 역무원으로 근무할 때 저능아에 가까운 일본인들, 그래서 사고를 도맡아 저지르는 이들도 일본인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인들을 누르고 척척 승진하는 것을 보며 그는 탄식한다. “뭘 해도 일본놈의 X에서 떨어져야 한다니까.” 그런데 이봉창이 그 차별을 극복하고자 택한 길은 더욱 완벽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을 때, 그는 우리말보다 일본어에 더 유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훗날 상해에 왔을 때 얻은 별명조차 "왜영감"이었다. 그것은 조센징의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는 악전고투의 흔적이었다. 결국 천황 폐하의 충량한 신민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그의 혀에는 자신의 모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찰지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실히 노력했음에도 조센징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아무 이유 없이 구금당하거나 일당이 터무니없이 깎여 나가는 등의 수모를 이봉창은 여러 번 겪었다. 그런 좌절을 겪은 뒤에는 무시로 결근을 해 버리거나 공금을 유곽에서 소진하는 등 요즘 말로 '개념없는' 삶에 빠지기도 했다. 그 절망의 뒤에는 일본인의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조센징이었구나 역시 본색은 속일 수 없군." "조센징은 역시 어쩔 수 없군." "감쪽같이 속을 뻔했네. 음흉한 놈." "조센징 놈들은 항상 뒷통수를 친다니까." (조금 빗나간 얘기하자면 이 표현들 어디서 많이 들어 보지 않았나? 또는 스스로 써먹은 적은 없는가?)


 어느날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조선 백성으로서 이왕을 뵙지도 못했고 경술병합 후에는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서 천황의 얼굴을 우러르지도 못했으니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정체성의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각성(?)이었다. 그는 일본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코자 여비 들이고 다리품 팔아서 교또로 왔는데 그만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린다. 한글 편지를 발견한 일경은 폐일언하고 그를 ‘보호 유치’했고 유치장에서 며칠을 썩게 만든다. 이 며칠은 충량한 일본 신민으로 살고자 했던 이봉창의 머리 속을 휘저어 놓았다.


 마침내 3.1 운동을 겪으면서도 별 느낌이 없었던 황국 신민 기노시타 소죠는 더 이상 일본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독립운동 한다는 자들이 왜 일본 왕을 죽일 생각을 않느냐?"고 혀 짧은 소리로 기염을 토하는 묘한 존재로 김구 앞에 나타난다. 한동안 이봉창을 면밀히 지켜보던 김구는 이봉창에게 임무를 맡길 결심을 하게 되고, 거액의 거사 자금을 이봉창에게 건넨다. 이는 이봉창에게 감전과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선생님 저를 어떻게 믿고 이런 거금을 주십니까......선생님은 프랑스 조계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분이시니 제가 이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도망가면 어쩌시려고 그랬습니까.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라고 눈물겨워하는 가운데, 한 불행했던 식민지 청년의 속을 가늠하는 한 마디를 토해 놓는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일본인이고자 발버둥쳤으나 별 수 없는 조선인이었고, 충성을 다했으나 배신으로 돌려받은 그의 일생에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를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것이 자신의 할 바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확인으로 전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1931년 12월 13일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며칠 뒤 이별의 시간에 한 젊은이를 사지로 내모는 것을 슬퍼하며 김구가 눈물을 흘릴 때 “큰일을 치를 건데 웃으면서 보내 주십시오.”라고 끝까지 껄껄거릴 수 있었던 까닭은 온갖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서 있을 곳을 발견한 사람의 여유요, 기쁨이 아니었을까.


 정확히 80년 전 오늘 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마지막 사진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그 태양 같은 미소 앞에서도 좀체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 건 그 웃음 뒤에 가려진 그의 고단했던 삶의 굴곡 때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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