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6년 12월 28일 장렬. 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부리부리한 눈매에 다부져 보이는 어깨의 한 청년이 오늘날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식산은행을 찾아들었다. 식산은행이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적 측면에서 지탱해 주었던 기관으로 1920년 이후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의 자금을 담당했던 은행이다. 식산은행을 찾기 전 청년은 식산은행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착취의 첨병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둘러본 터였다. 청년은 “좌동척 우식산”이라 불리운 일제 식민 통치 기관에 볼일이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나석주. 1892년생이니 나이 열 세 살에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열 여덟에 나라는 망했다. 십대의 나이에 망국의 쓰라림을 체험한 이 황해도 청년은 한탄만 하고 술이나 푸며 세상을 지내기에는 너무 피가 뜨거웠고 “못하는 운동이 없을만큼” 몸도 비상하게 날랬다. 김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항일 의식을 키우던 청년은 동네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얻어 임시정부에게로 보냈고 급기야 주재소 순경과 면장을 죽이고 악질 친일파였던 은율 군수 등도 처단했다. 나석주를 담당한 황해도 경찰관에 따르면 “1921년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대부분에 나석주의 이름이 걸려 있고 동원된 경찰 수만 해도 만 여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경찰의 끈질긴 수사망에 걸려 동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지만 나석주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신흥무관학교도 졸업하고 중국군으로도 복무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고 백범 김구의 경호관으로도 있었던 그였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일본인들과 맞서는 쪽을 더 선호했던 것 같고,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원이 된다. 1921년 경성을 뒤흔들었던 김상옥 의거를 비롯하여 일제 식민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의열단원의 계보에 합류한 것이다. 그럼 어디를 때려 부술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심산 김창숙이었다. 김창숙은 나석주를 만나 이렇게 얘기한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본은 간담이 내려앉아 더 이상 우리 민족을 착취하지 못할 것이오.” (신동아 2008.4) 식산은행과 동척. 나석주로서도 식산은행이나 동척에는 유감이 많았다. 그의 집안이 오래도록 자기 땅처럼 경작해 온 궁장토 즉 조선 왕실의 땅이 동척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들의 횡포에 당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횡액을 당한 건 나석주 뿐이 아니었다. 나석주는 쾌히 응하고 폭탄과 권총을 숨긴 채 중국인 복장을 하고 귀국한다.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이었다.
고향에 들러 처자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찍 장가를 가서 열일곱에 아들을 본 터라 그 아들도 이미 십대 중반의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한때 동지였던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형(愚兄- 나석주 본인)은 고향 떠난지 6년에 공연히 동서분주하면서 아무 성공 없이 지내 왔으니 제1은 민족에 대한 죄인이요, 제2는 가족에 대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만 사회 환경이 불허하는데야 어찌하오.”라고 했던 만큼 가족에 대한 미안함 또한 사무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서울로 스며든다.
그리고 12월 28일 오후 2시경 식산은행에 나타난 그는 마침내 그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뭉쳐진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이었다. 은행 직원들은 중국인 차림의 이상한 남자가 뭔가 던지는 것은 봤지만 그게 폭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폭탄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볼 정도였다. 일제 시대 폭탄의 성능 때문에 낭패를 본 독립운동가들이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식산은행의 직원들은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 식산은행 폭파에 실패한 나석주는 이번에는 동척을 겨냥한다. 그 이후는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폭탄에 실패한 나석주는 권총을 빼들었다. 동척에 진입하여 제지하는 일본인 수위부터 쏘아 쓰러뜨린 나석주는 토지개량부 사무실로 올라가 일본인 직원들에게 원한 맺힌 총알을 날렸다. 한바탕 총알 세례를 퍼부은 후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또 불발이었다. 하지만 이미 식민지 사람들의 등을 치고 피를 빨아먹던 식민 통치의 경제적 본산 동척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동척은 오늘날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나석주는 동척을 빠져나와 을지로 쪽으로 몸을 피하지만 이미 경찰이 따라붙고 있었다.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지다가 나석주는 자신의 몸에 세 발의 총알을 스스로 꽂고 만다. 세모의 난데없는 도심 총격전에 몸을 움츠리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던 동포들을 향하여 나석주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말라.”
경각에 달린 목숨 앞에서 일본 경찰은 악착같이 그의 정체를 캐내려 들었다. 이름과 출신을 독살스레 묻는 일본 경찰에게 나석주가 남긴 말은 “내가 나석주다. 그리고 공범은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은 황해도에 연락하여 나석주를 아는 경찰을 불러올렸고 그제야 경성의 1926년 연말을 총성으로 뒤흔든 사내가 나석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석주는 12월 28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서른 넷의 젊디 젊은 나이.
흔히 사람들은 별 근거없는 착각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80년대가 학생운동이 성했던 시기라고 해서 대학생마다 투사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왕년에 돌 한 번 안던져 본 사람 있나”고 하지만 정확히 수를 세어 보자면 돌을 안 쥐어 본 사람이 쥐어 본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독재 정권 하에서도 어떤 이는 고시를 보고 어떤 이는 토플 공부하고 어떤 이는 유학을 가고 스펙을 쌓았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이 돌을 던지고 저항에 나섰을 뿐인 것이다. 일제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6년이면 이미 일제 식민 통치는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고, 그 안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은 또 다른 뿌리를 내려 가고 있었다. 나석주의 불발 폭탄을 두고 요리조리 살폈던 직원 3명 가운데 1명은 조선인이었고, 나석주를 사지로 몰아넣은 경찰대 중에도 조선인이 있었고 나석주의 신원을 확인한 이도 조선인 경찰이었다. 그 조선에서 나석주는 일종의 별종일 수 있었다.
일상이 공고할수록 모순은 심해지고 모순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힘을 잃어간다. 애초에 김창숙이 나석주에게 동척과 식산은행을 공격하자고 한 이유는 심산 김창숙 자신이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잠입했다가 뜻밖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던 탓이었다. 목이 쉬게 만세를 불러도 젊은이들 몸 바친 폭탄이 터져도 공고해만 보이는 일제 체제는 섣부른 포기와 정교한 자기합리화를 불렀고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조선민족이 쇠퇴하게 된 근본원인이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無信), 겁나(怯懦), 사회성의 결핍' 등 타락한 민족성에 있으며, 우리 민족이 완전한 멸망에 빠지기 전에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라는 이광수 류의 민족개조론을 자기에 맞게 받아들이며 조금 더 잘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불평불만은 술과 노래로 삭이며 독립운동 따위 ‘나대는’ 이들에게 냉랭해지고 있었다. 나석주의 폭탄은 동척 뿐 아니라 그 조선인들을 향해 터진 것이기도 했다. “나는 싸웠다. 분투하라. 쉬지 말라.”
tag : 산하의오역
1926년 12월 28일 장렬. 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부리부리한 눈매에 다부져 보이는 어깨의 한 청년이 오늘날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던 식산은행을 찾아들었다. 식산은행이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적 측면에서 지탱해 주었던 기관으로 1920년 이후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의 자금을 담당했던 은행이다. 식산은행을 찾기 전 청년은 식산은행과 더불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착취의 첨병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둘러본 터였다. 청년은 “좌동척 우식산”이라 불리운 일제 식민 통치 기관에 볼일이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나석주. 1892년생이니 나이 열 세 살에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열 여덟에 나라는 망했다. 십대의 나이에 망국의 쓰라림을 체험한 이 황해도 청년은 한탄만 하고 술이나 푸며 세상을 지내기에는 너무 피가 뜨거웠고 “못하는 운동이 없을만큼” 몸도 비상하게 날랬다. 김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항일 의식을 키우던 청년은 동네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얻어 임시정부에게로 보냈고 급기야 주재소 순경과 면장을 죽이고 악질 친일파였던 은율 군수 등도 처단했다. 나석주를 담당한 황해도 경찰관에 따르면 “1921년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대부분에 나석주의 이름이 걸려 있고 동원된 경찰 수만 해도 만 여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경찰의 끈질긴 수사망에 걸려 동지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지만 나석주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신흥무관학교도 졸업하고 중국군으로도 복무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고 백범 김구의 경호관으로도 있었던 그였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일본인들과 맞서는 쪽을 더 선호했던 것 같고, 그는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원이 된다. 1921년 경성을 뒤흔들었던 김상옥 의거를 비롯하여 일제 식민 통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의열단원의 계보에 합류한 것이다. 그럼 어디를 때려 부술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심산 김창숙이었다. 김창숙은 나석주를 만나 이렇게 얘기한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동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본은 간담이 내려앉아 더 이상 우리 민족을 착취하지 못할 것이오.” (신동아 2008.4) 식산은행과 동척. 나석주로서도 식산은행이나 동척에는 유감이 많았다. 그의 집안이 오래도록 자기 땅처럼 경작해 온 궁장토 즉 조선 왕실의 땅이 동척의 소유로 넘어갔고 그들의 횡포에 당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횡액을 당한 건 나석주 뿐이 아니었다. 나석주는 쾌히 응하고 폭탄과 권총을 숨긴 채 중국인 복장을 하고 귀국한다.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이었다.
고향에 들러 처자도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찍 장가를 가서 열일곱에 아들을 본 터라 그 아들도 이미 십대 중반의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한때 동지였던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형(愚兄- 나석주 본인)은 고향 떠난지 6년에 공연히 동서분주하면서 아무 성공 없이 지내 왔으니 제1은 민족에 대한 죄인이요, 제2는 가족에 대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만 사회 환경이 불허하는데야 어찌하오.”라고 했던 만큼 가족에 대한 미안함 또한 사무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서울로 스며든다.
그리고 12월 28일 오후 2시경 식산은행에 나타난 그는 마침내 그 오랜 세월의 기다림이 뭉쳐진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이었다. 은행 직원들은 중국인 차림의 이상한 남자가 뭔가 던지는 것은 봤지만 그게 폭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폭탄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볼 정도였다. 일제 시대 폭탄의 성능 때문에 낭패를 본 독립운동가들이 한 둘이 아니거니와 식산은행의 직원들은 그 덕에 목숨을 건졌다. 식산은행 폭파에 실패한 나석주는 이번에는 동척을 겨냥한다. 그 이후는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폭탄에 실패한 나석주는 권총을 빼들었다. 동척에 진입하여 제지하는 일본인 수위부터 쏘아 쓰러뜨린 나석주는 토지개량부 사무실로 올라가 일본인 직원들에게 원한 맺힌 총알을 날렸다. 한바탕 총알 세례를 퍼부은 후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또 불발이었다. 하지만 이미 식민지 사람들의 등을 치고 피를 빨아먹던 식민 통치의 경제적 본산 동척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동척은 오늘날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나석주는 동척을 빠져나와 을지로 쪽으로 몸을 피하지만 이미 경찰이 따라붙고 있었다. 격렬한 총격전이 이어지다가 나석주는 자신의 몸에 세 발의 총알을 스스로 꽂고 만다. 세모의 난데없는 도심 총격전에 몸을 움츠리고 책상 밑으로 기어들던 동포들을 향하여 나석주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2천만 동포들아. 분투하라. 쉬지 말라.”
경각에 달린 목숨 앞에서 일본 경찰은 악착같이 그의 정체를 캐내려 들었다. 이름과 출신을 독살스레 묻는 일본 경찰에게 나석주가 남긴 말은 “내가 나석주다. 그리고 공범은 없다. 나 혼자 한 일이다.”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은 황해도에 연락하여 나석주를 아는 경찰을 불러올렸고 그제야 경성의 1926년 연말을 총성으로 뒤흔든 사내가 나석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석주는 12월 28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서른 넷의 젊디 젊은 나이.
흔히 사람들은 별 근거없는 착각을 하곤 한다. 이를테면 80년대가 학생운동이 성했던 시기라고 해서 대학생마다 투사 노릇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왕년에 돌 한 번 안던져 본 사람 있나”고 하지만 정확히 수를 세어 보자면 돌을 안 쥐어 본 사람이 쥐어 본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독재 정권 하에서도 어떤 이는 고시를 보고 어떤 이는 토플 공부하고 어떤 이는 유학을 가고 스펙을 쌓았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이 돌을 던지고 저항에 나섰을 뿐인 것이다. 일제 시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1926년이면 이미 일제 식민 통치는 안정적인 단계에 접어들었고, 그 안에서 식민지 조선의 일상은 또 다른 뿌리를 내려 가고 있었다. 나석주의 불발 폭탄을 두고 요리조리 살폈던 직원 3명 가운데 1명은 조선인이었고, 나석주를 사지로 몰아넣은 경찰대 중에도 조선인이 있었고 나석주의 신원을 확인한 이도 조선인 경찰이었다. 그 조선에서 나석주는 일종의 별종일 수 있었다.
일상이 공고할수록 모순은 심해지고 모순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힘을 잃어간다. 애초에 김창숙이 나석주에게 동척과 식산은행을 공격하자고 한 이유는 심산 김창숙 자신이 독립운동자금을 구하러 잠입했다가 뜻밖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던 탓이었다. 목이 쉬게 만세를 불러도 젊은이들 몸 바친 폭탄이 터져도 공고해만 보이는 일제 체제는 섣부른 포기와 정교한 자기합리화를 불렀고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조선민족이 쇠퇴하게 된 근본원인이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無信), 겁나(怯懦), 사회성의 결핍' 등 타락한 민족성에 있으며, 우리 민족이 완전한 멸망에 빠지기 전에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라는 이광수 류의 민족개조론을 자기에 맞게 받아들이며 조금 더 잘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불평불만은 술과 노래로 삭이며 독립운동 따위 ‘나대는’ 이들에게 냉랭해지고 있었다. 나석주의 폭탄은 동척 뿐 아니라 그 조선인들을 향해 터진 것이기도 했다. “나는 싸웠다. 분투하라. 쉬지 말라.”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