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9년 12월 27일 한남대교 개통
한강에는 다리가 많다. 2012년 현재 팔당에서 일산까지 펼쳐진 한강을 철교를 포함하여 서른 곳이 넘는다니 6.25 전쟁 때 한강 인도교 하나에 피난민들이 몰리는 상황에서 성급한 폭파 명령이 떨어져 수도 알 수 없는 한강의 원혼들을 만들어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지간히 많은 숫자다. 다리 하나 하나에 사연이 없을 수 없고, 그 다리가 바꾼 사람들의 삶도 소소하지 않을 테지만 서울에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다리라면 역시 한남대교를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에 다리라고는 한강대교와 양화대교, 저 동쪽 끝의 광진교 정도밖에 없던 시절, 1966년 1월 19일 한강 위에 다리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년 1월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만 7천여명.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었던 것이 ‘영동’이란 지명만 해도 ‘영등포 동쪽 동네’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그곳에 다리가 뚫렸는가.
그것은 군사적 목적이었다. 역대 군사 정권과 독재 정권이 전쟁을 빌미로 북한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즈려밟은 사실은 엄존하지만 전쟁의 공포가 마냥 허당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한은 공작금 두둑히 넣은 ‘통일 일꾼’들을 남파시키고 있었고 무력도발도 수시로 감행했다. 휴전선에서 엎어지면 배꼽 닿을 거리에 있고 6.25 때 단 사흘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 당했던 서울을 두고 정부는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6.25때 인구는 백만 조금 넘었지만 6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는 350만을 넘기고 있었다. 제2한강교가 지어져 있었지만 이 다리는 유사시 철저하게 군사용 용도로만 사용되어 민간인이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제3한강교가 착공된 것이다. 즉 서울 강북의 민간인들의 피난용 다리(?)였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서울 시민들은 다리가 놓이는지 언제 완성되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그래서 제3한강교의 준공일은 기록마다 신문마다 12월 25일에서 27일까지 왔다갔다 한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북한 콤플렉스도 곁들여진 다리였다. 북한 평양의 대동강에는 옥류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1960년 놓인 이 다리의 폭은 25미터. 그런데 제3한강교의 폭이 그보다 좀 좁았던 모양이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정부는 이미 공사가 진행된 다리를 좀 무리한 설계 변경을 통해 그 폭을 평양 옥류교보다 늘려 놓았다. 북한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다고 너무 비웃지는 말자. 1960년대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가 놓이고 경부고속도로와도 연결되면서 제3한강교의 남단에는 모세의 기적이 무색한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강북 주민들이 먹을 과일을 생산하는 배밭이 그득그득했던 이곳에 전면 개발 붐이 일면서 평당 2백원하던 땅값이 기천원, 기만원이 되는 ‘말죽거리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미 다리가 놓일 때부터 눈치 빠르고 발 잰 사람들은 강남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29만원 전 재산인 생활수급자 영감의 마누라가 왕년에 빨간 바지를 입고 그 턱을 내밀며 강남 일원의 부동산업체를 쓸고 다녔다는 전설도 그 중의 하나가 되겠다. 서울시 또한 “강북은 묶고 강남은 푼다.”는 모토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공무원들에게 입주토록 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베풀었고 이 제3한강교가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개발붐은 절정에 이른다. 63년에서 73년까지강남구 학동의 땅값은 1천 3백배, 압구정동은 8백 90배, 신사동은 1천 배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의 땅값은 25배 정도 오른 것에 불과했다. 유사시 피난용으로 건설한 다리가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한국인들의 대뇌에 문신으로 새겨 놓았던 것이다.
혜은이가 <제3한강교>를 노래하던 1979년 무렵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전혀 다른 모습의,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강남구가 강남(江南)구가 아니라 강남(强男)구라는 얘기를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 죽던 해였으니, 서울 ‘사대문안’이 갖던 권위마저 상당 부분 이식된 상태였을 것이다. 법원 검찰청도 한강을 건넜고 강남의 유복한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노려 강북의 많은 명문학교들이 도강하여 새 터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적으로 노래 제목으로까지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원래 가사가 매우 풍기가 문란하다 하여 엉뚱하게 바뀐 것이다.
“젊음은 갈곳을 모르는채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후략)“의 가사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결국 남녀가 포개지는 거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난감한 가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 젊은이들의 열정과 복부인 아줌마들의 음습한 욕망을 실어날랐던 <제3한강교>의 가사는 그렇게 건전하게(?) 바뀌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 다리에 실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서 오들오들 떨기도 했고 서울로 이사오면서 강건너 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기도 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다. 주병진이나 현진영 등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자살하려 했다는...._)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다리이면서 전두환이 구속 영장 앞에서 합천으로 도망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다리. 서울을 바꾼 다리가 1969년 이맘때 세워졌다.
1969년 12월 27일 한남대교 개통
한강에는 다리가 많다. 2012년 현재 팔당에서 일산까지 펼쳐진 한강을 철교를 포함하여 서른 곳이 넘는다니 6.25 전쟁 때 한강 인도교 하나에 피난민들이 몰리는 상황에서 성급한 폭파 명령이 떨어져 수도 알 수 없는 한강의 원혼들을 만들어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어지간히 많은 숫자다. 다리 하나 하나에 사연이 없을 수 없고, 그 다리가 바꾼 사람들의 삶도 소소하지 않을 테지만 서울에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다리라면 역시 한남대교를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서울에 다리라고는 한강대교와 양화대교, 저 동쪽 끝의 광진교 정도밖에 없던 시절, 1966년 1월 19일 한강 위에 다리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년 1월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만 7천여명.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었던 것이 ‘영동’이란 지명만 해도 ‘영등포 동쪽 동네’를 일컫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그곳에 다리가 뚫렸는가.
그것은 군사적 목적이었다. 역대 군사 정권과 독재 정권이 전쟁을 빌미로 북한을 이유로 민주주의를 즈려밟은 사실은 엄존하지만 전쟁의 공포가 마냥 허당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한은 공작금 두둑히 넣은 ‘통일 일꾼’들을 남파시키고 있었고 무력도발도 수시로 감행했다. 휴전선에서 엎어지면 배꼽 닿을 거리에 있고 6.25 때 단 사흘만에 인민군에 의해 함락 당했던 서울을 두고 정부는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6.25때 인구는 백만 조금 넘었지만 6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는 350만을 넘기고 있었다. 제2한강교가 지어져 있었지만 이 다리는 유사시 철저하게 군사용 용도로만 사용되어 민간인이 사용하기 어려웠다. 이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제3한강교가 착공된 것이다. 즉 서울 강북의 민간인들의 피난용 다리(?)였던 셈이다. 그런 연유로 서울 시민들은 다리가 놓이는지 언제 완성되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그래서 제3한강교의 준공일은 기록마다 신문마다 12월 25일에서 27일까지 왔다갔다 한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북한 콤플렉스도 곁들여진 다리였다. 북한 평양의 대동강에는 옥류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1960년 놓인 이 다리의 폭은 25미터. 그런데 제3한강교의 폭이 그보다 좀 좁았던 모양이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정부는 이미 공사가 진행된 다리를 좀 무리한 설계 변경을 통해 그 폭을 평양 옥류교보다 늘려 놓았다. 북한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남은 건 자존심밖에 없다고 너무 비웃지는 말자. 1960년대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가 놓이고 경부고속도로와도 연결되면서 제3한강교의 남단에는 모세의 기적이 무색한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강북 주민들이 먹을 과일을 생산하는 배밭이 그득그득했던 이곳에 전면 개발 붐이 일면서 평당 2백원하던 땅값이 기천원, 기만원이 되는 ‘말죽거리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미 다리가 놓일 때부터 눈치 빠르고 발 잰 사람들은 강남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29만원 전 재산인 생활수급자 영감의 마누라가 왕년에 빨간 바지를 입고 그 턱을 내밀며 강남 일원의 부동산업체를 쓸고 다녔다는 전설도 그 중의 하나가 되겠다. 서울시 또한 “강북은 묶고 강남은 푼다.”는 모토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공무원들에게 입주토록 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베풀었고 이 제3한강교가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개발붐은 절정에 이른다. 63년에서 73년까지강남구 학동의 땅값은 1천 3백배, 압구정동은 8백 90배, 신사동은 1천 배 뛰었다. 같은 기간 동안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의 땅값은 25배 정도 오른 것에 불과했다. 유사시 피난용으로 건설한 다리가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한국인들의 대뇌에 문신으로 새겨 놓았던 것이다.
혜은이가 <제3한강교>를 노래하던 1979년 무렵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전혀 다른 모습의,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강남구가 강남(江南)구가 아니라 강남(强男)구라는 얘기를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 죽던 해였으니, 서울 ‘사대문안’이 갖던 권위마저 상당 부분 이식된 상태였을 것이다. 법원 검찰청도 한강을 건넜고 강남의 유복한 학생들과 어머니들을 노려 강북의 많은 명문학교들이 도강하여 새 터전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적으로 노래 제목으로까지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원래 가사가 매우 풍기가 문란하다 하여 엉뚱하게 바뀐 것이다.
“젊음은 갈곳을 모르는채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후략)“의 가사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결국 남녀가 포개지는 거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난감한 가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서울, 젊은이들의 열정과 복부인 아줌마들의 음습한 욕망을 실어날랐던 <제3한강교>의 가사는 그렇게 건전하게(?) 바뀌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 다리에 실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서 오들오들 떨기도 했고 서울로 이사오면서 강건너 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기도 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다. 주병진이나 현진영 등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자살하려 했다는...._)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다리이면서 전두환이 구속 영장 앞에서 합천으로 도망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다리. 서울을 바꾼 다리가 1969년 이맘때 세워졌다.
19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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