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25년 12월 26일 데카브리스트 이야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율리우스력을 썼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의 정통 달력이었던 그레고리우스력과는 날짜가 좀 달랐어요.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10월 혁명이지만 서유럽 날짜로는 11월 7일이 되지요. 비슷한 예로 러시아 달력으로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신력(新曆)으로 따지면 12월 26일이 됩니다.
데카브리스트라는 말은 영어로 디셈버(December)의 어원과 비슷합니다. 즉 12월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12월당원이라고나 할까. 이 12월단의 시작은 러시아 황제에게 몹시도 충성스러운 러시아의 귀족 청년들이었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동원,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용감하게 이를 맞아 싸운 사람들이었고, 러시아 국민의 끈질긴 저항과 동장군의 위세에 견디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철수한 뒤에는 그 뒷머리를 잡아 채기 위해 파리까지 달려갔던 용사들이었지요. 그런데 그 기나긴 투쟁과 원정의 과정에서 그들은 적을 향한 살기와는 동떨어진 자유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열렬히 싸우긴 했는데, 막상 싸워 이기면서 적들의 심장부 파리에 입성하긴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에 빠져듭니다. 전쟁에는 졌으나 도대체 그때껏 온존하던 농노제를 비롯하여 러시아 전체에 만연해 있던 봉건 질서의 암울함이 유럽을 횡단한 그들의 눈에 선연히 들어온 거죠. 조국에 돌아온 그들은 뒤떨어진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고 그 질곡에 분노를 터뜨리는 가운데 은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북방결사, 전면 공화제를 꿈꾼 남방결사, 범 슬라브 연방을 상상했던 통일슬라브결사 등등으로 분열했던 이 반항적인 귀족들은 마침내 그들이 충성을 바쳤던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의 혼란기를 틈타 거사를 결행합니다.
1825년 12월 26일 (러시아력 12월 14일) 그날은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일이었습니다. 데카브리(12월)의 사람들(ist), 즉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의 병력은 대관식이 예정된 원로원 광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주로 ‘북방결사’ 출신이었던 그들은 니콜라이가 아닌 니콜라이의 형 콘스탄틴을 황제로 내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고 니콜라이 황제에 대한 충성 선서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킬 태세를 갖춥니다. 하지만 그들의 최고 지도자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불상사 속에서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정부군에 진압되고 말아요. 뒤이어 남부결사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내 와해되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갑신정변이라고나 할까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민중들이나 데카브리스트들이 구제하고자 했던 농노들과의 일체의 연계가 없이 변화의 열망에만 스스로를 내던진 젊은 귀족들의 거사였고 그만큼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대관식을 망친 데카브리스트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동자 5명은 당장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고 주동자 100여명은 영하 40도의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그 가운데 기혼자는 1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젊었고 서툴렀지요. 그런데 이 18명의아내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것이었습니다.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혼을 하거나 귀족의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거나.” 그런데 이 18명 중 11명의 아내들은 얼음썰매를 타고, 때로는 목숨 걸고 언 강을 건너고 칼 날같은 눈보라 맞아가며 몇 달을 가야 이르는 ‘겁나먼’ 시베리아로의 남편 찾기 삼만리 여정을 감행합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주동자라 할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부인이었죠. 현지 총독에게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린다고 서약하고서야 그녀는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남편 발목에 묶여 있던 22킬로그램의 쇠뭉치에 키스하며 눈물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하죠.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희망의 땅에 왔습니다.” 어둠과 추위의 땅 시베리아도 그 순간만큼은 환하고 따뜻하게 빛났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명의 귀부인은 대문호 톨스토이의 숙모격인 발콘스키 공작 부인입니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 발콘스키라는 성이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지 않나요. 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세르게이는 쉰 아홉 번이나 되는 전투에 나아가 용감히 싸웠던 군인이었지만 데카브리스트였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와 나이 20살 차이가 나는 아내 역시 시베리아로 옵니다. 남편이 반역자로 몰린 것은 그녀가 첫 아들을 낳은 다음 날이었지요. 그녀의 시베리아행을 만류하는 친정식구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귀족사회에서 자랄 행복한 아기보다 나는 불행한 남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 귀족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 채 뜨개질로 생업을 이으며 여생을 보냈던 그녀의 수예품들은 지금도 한 시대의 슬픔과 아픔이 수놓아진 예술 작품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발콘스키 공작 부인은 원래 시인 푸시킨의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함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날만큼 깊은 사이였다고 하는데 집안의 결정에 따라 발콘스키 공작과 결혼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푸시킨 역시 데카브리스트들 다수와 친교가 있었고, 옛 연인을 비롯하여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살던 귀족 부인들이 만 리길을 멀다 않고 남편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부인들에게 이런 시를 바칩니다.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느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여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캄캄하고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별로 좋아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그 문장에 관한한 경의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중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빌려와 봅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반기를 든 아름다운 자기부정. 데카브르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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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12월 26일 데카브리스트 이야기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율리우스력을 썼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의 정통 달력이었던 그레고리우스력과는 날짜가 좀 달랐어요.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10월 혁명이지만 서유럽 날짜로는 11월 7일이 되지요. 비슷한 예로 러시아 달력으로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신력(新曆)으로 따지면 12월 26일이 됩니다.
데카브리스트라는 말은 영어로 디셈버(December)의 어원과 비슷합니다. 즉 12월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12월당원이라고나 할까. 이 12월단의 시작은 러시아 황제에게 몹시도 충성스러운 러시아의 귀족 청년들이었습니다.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동원,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용감하게 이를 맞아 싸운 사람들이었고, 러시아 국민의 끈질긴 저항과 동장군의 위세에 견디지 못하고 나폴레옹이 철수한 뒤에는 그 뒷머리를 잡아 채기 위해 파리까지 달려갔던 용사들이었지요. 그런데 그 기나긴 투쟁과 원정의 과정에서 그들은 적을 향한 살기와는 동떨어진 자유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열렬히 싸우긴 했는데, 막상 싸워 이기면서 적들의 심장부 파리에 입성하긴 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에 빠져듭니다. 전쟁에는 졌으나 도대체 그때껏 온존하던 농노제를 비롯하여 러시아 전체에 만연해 있던 봉건 질서의 암울함이 유럽을 횡단한 그들의 눈에 선연히 들어온 거죠. 조국에 돌아온 그들은 뒤떨어진 나라의 현실을 한탄하고 그 질곡에 분노를 터뜨리는 가운데 은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북방결사, 전면 공화제를 꿈꾼 남방결사, 범 슬라브 연방을 상상했던 통일슬라브결사 등등으로 분열했던 이 반항적인 귀족들은 마침내 그들이 충성을 바쳤던 짜르 알렉산드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의 혼란기를 틈타 거사를 결행합니다.
1825년 12월 26일 (러시아력 12월 14일) 그날은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일이었습니다. 데카브리(12월)의 사람들(ist), 즉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의 병력은 대관식이 예정된 원로원 광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주로 ‘북방결사’ 출신이었던 그들은 니콜라이가 아닌 니콜라이의 형 콘스탄틴을 황제로 내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고 니콜라이 황제에 대한 충성 선서를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킬 태세를 갖춥니다. 하지만 그들의 최고 지도자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불상사 속에서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정부군에 진압되고 말아요. 뒤이어 남부결사가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내 와해되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갑신정변이라고나 할까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할 민중들이나 데카브리스트들이 구제하고자 했던 농노들과의 일체의 연계가 없이 변화의 열망에만 스스로를 내던진 젊은 귀족들의 거사였고 그만큼 쉽게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대관식을 망친 데카브리스트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동자 5명은 당장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고 주동자 100여명은 영하 40도의 시베리아로 끌려갑니다. 그그 가운데 기혼자는 18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할 만큼 데카브리스트 봉기는 젊었고 서툴렀지요. 그런데 이 18명의아내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것이었습니다.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혼을 하거나 귀족의 특권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거나.” 그런데 이 18명 중 11명의 아내들은 얼음썰매를 타고, 때로는 목숨 걸고 언 강을 건너고 칼 날같은 눈보라 맞아가며 몇 달을 가야 이르는 ‘겁나먼’ 시베리아로의 남편 찾기 삼만리 여정을 감행합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이는 데카브리스트의 주동자라 할 트루베츠코이 공작의 부인이었죠. 현지 총독에게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린다고 서약하고서야 그녀는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남편 발목에 묶여 있던 22킬로그램의 쇠뭉치에 키스하며 눈물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하죠.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희망의 땅에 왔습니다.” 어둠과 추위의 땅 시베리아도 그 순간만큼은 환하고 따뜻하게 빛났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명의 귀부인은 대문호 톨스토이의 숙모격인 발콘스키 공작 부인입니다. 세르게이 발콘스키 공작. 발콘스키라는 성이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지 않나요. 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세르게이 발콘스키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세르게이는 쉰 아홉 번이나 되는 전투에 나아가 용감히 싸웠던 군인이었지만 데카브리스트였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와 나이 20살 차이가 나는 아내 역시 시베리아로 옵니다. 남편이 반역자로 몰린 것은 그녀가 첫 아들을 낳은 다음 날이었지요. 그녀의 시베리아행을 만류하는 친정식구들에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귀족사회에서 자랄 행복한 아기보다 나는 불행한 남편을 따라가야 합니다. ” 귀족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한 채 뜨개질로 생업을 이으며 여생을 보냈던 그녀의 수예품들은 지금도 한 시대의 슬픔과 아픔이 수놓아진 예술 작품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발콘스키 공작 부인은 원래 시인 푸시킨의 연인이었다고 합니다. 함께 휴양지로 여행을 떠날만큼 깊은 사이였다고 하는데 집안의 결정에 따라 발콘스키 공작과 결혼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푸시킨 역시 데카브리스트들 다수와 친교가 있었고, 옛 연인을 비롯하여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살던 귀족 부인들이 만 리길을 멀다 않고 남편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부인들에게 이런 시를 바칩니다.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느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여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캄캄하고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별로 좋아하는 정치인은 아니지만 그 문장에 관한한 경의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중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빌려와 봅니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반기를 든 아름다운 자기부정. 데카브르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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