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대화재와 노래 두 곡
영화 <타워링>이 한국의 대연각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그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1974년 제작된 영화 <타워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3년 전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던 대형 화재를 기억하면서 몸서리쳤다. 영화 속 설정도 그럴 수 없이 비슷했다. 15층 이상 올라가면 도무지 대책이 없다며 괴로와하는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은 기껏해야 7-8층 높이의 사다리차만 보유했던 한국 소방관들과 똑같은 심경이었을 것이고, 화재가 점점 고층으로 올라가 스카이라운지를 고립시키고 헬리콥터를 동원한 구명 작전이 펼쳐지는 것, 불길에 휩싸이거나 두려움에 못이긴 사람들이 몸을 날려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풍경, 그 모두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만큼 똑같았다.
값싸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프로판 가스의 밸브를 까페 여직원이 채 잠그지 않은 것이 화인이었다. 준공검사 후 한달도 안된 새 건물이었지만 화재 경보기가 가동되지 않았고 방화벽도 없었고 200여 객실의 호텔에 비상계단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비극의 크기를 산더미처럼 키워 놓았다.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군인, 하다못해 미군들까지 동원된 필사적인 진화 작업 끝에 8시간여만에 꺼지긴 했으나 163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난 뒤였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다. 어떤 이는 시트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한 층 한 층을 타고 내려와 구조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헬기가 늘어뜨린 구명줄을 잡긴 했으나 팔에 힘이 빠져 바닥으로 추락사하기도 했다. 가장 절박한 풍경은 불길의 위협에 못이긴 사람들이 매트리스에 의지해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다 죽었다.) 매트리스와 함께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고 이 사진은 UPI에 의해 해외로 송고되어 유명세를 탄다. 또 대만 외교관 한 명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불길 속에서 물기를 적신 담요를 뒤집어쓰고 버티며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이 세계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당시까지의 세계 최악의 대형 구조물 화재 사고였다.
한국인 사망자는 150여 명이었다. 그런데 이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자주 불리우는 노래 두 곡과 관련이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우선 김성술이라는 가수다. 그는 1970년 유니버설 레코드가 만든 음반 속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말을 짓고 불렀다.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엔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이후 조용필이 불러 국민가요가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98퍼센트가 같은 노래였다.
사연인즉슨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김성술이 작곡가 황선우씨에게 노래 가사를 주고 곡을 받아 불렀던 것이었더. 김성술은 이후 군대를 갔고 휴가를 나온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현장에서 사망한다. 그 이후 유족들은 그의 유품들을 태우면서 그의 음반들도 모두 수거하여 소각했는데 작곡가 황선우씨가 이 노래의 가사를 몇 군데 바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또 내용도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에서 형제를 부르는 설정의 노래로 만들었고 이를 조용필이 부르게 됨으로써 엉뚱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대연각 호텔에서 죽어간 김성술은 자신의 노래가 그렇게 뒤바뀌어서 국민가요(?)가 된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족들은 작곡가 황씨에게 손해배상을 제기했고 2006년 법원은 그 책임을 인정하여 3천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그 뒷일은 알 수 없지만.
대연각 호텔 화재 현장에서 아깝게 죽어간 사람 중에는 서울 공대생으로서 음악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던 민병무라는 이도 있었다. 그는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역시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동생 민병호는 형의 유작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친구들을 포섭하여 형의 유작으로 ‘서울대 트리오’의 이름으로 MBC 제 1회 대학 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게 된다. 이것이 추억의 대학 가요제 명곡이라 할 <젊은 연인들>이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를 만든 이의 슬픈 최후 때문에 그런가 이 노래에는 또 다른 전설이 따라붙고 있다.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은 도시전설이지만 소개해 본다면 대충 이렇다.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4학년들이 마지막 MT를 떠났는데 선배들과 각별했던 한 명의 후배가 따라갔다. 그런데 등산 중 눈보라를 만나 가까스로 동굴 속에 몸을 피한 그들은 누군가 눈길을 헤치고 내려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그 사람에게 옷과 식료품을 몰아 주기로 한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지를 뽑는 사람이 내려가는 것으로 제비뽑기를 했다.
맨 먼저 후배가 쪽지를 뽑아 펴 보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배들은 그를 채근해 내려 보냈고 후배는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를 데리고 왔는데 이미 때는 늦어 모두 얼어 죽어 있었다. 선배들 모두는 편안한 얼굴로 손들을 꼭 잡고 죽었는데, 남아 있던 쪽지에는 모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후배는 자신만은 살려 보려는 선배들에게 속았던 것이다. <젊은 연인들>은 눈보라 속에서도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후배를 살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 학생들을 기리는 노래라는 전설이다. 이 사연을 들으며 노래를 부르면 뭔가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여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 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그런데 그 사연에 감명받아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불바다 속에서 그 짧은 생을 마쳐야 했고 또 바로 그 죽음을 배경으로 이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면 또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1971년 12월 25일 163명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불덩이가 되고 숨막혀서 몸을 뒤틀다가 꽃잎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갔다. 이 시기 유사한 사건들은 기실 비일비재했다. 그 전해에는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었고 그 뒤에는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가 고도성장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실제로 대한민국이 환골탈태하던 때이기도 했으나, 사람 목숨의 소중함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더 중요한 시기였고,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앞에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실종됐던 즈음이었다. 김성술과 민병무를 비롯하여 대연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 없는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낙원에서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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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대화재와 노래 두 곡
영화 <타워링>이 한국의 대연각 화재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그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지만 1974년 제작된 영화 <타워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3년 전 크리스마스에 일어났던 대형 화재를 기억하면서 몸서리쳤다. 영화 속 설정도 그럴 수 없이 비슷했다. 15층 이상 올라가면 도무지 대책이 없다며 괴로와하는 소방대장 스티브 매퀸은 기껏해야 7-8층 높이의 사다리차만 보유했던 한국 소방관들과 똑같은 심경이었을 것이고, 화재가 점점 고층으로 올라가 스카이라운지를 고립시키고 헬리콥터를 동원한 구명 작전이 펼쳐지는 것, 불길에 휩싸이거나 두려움에 못이긴 사람들이 몸을 날려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풍경, 그 모두가 기시감을 불러일으킬만큼 똑같았다.
값싸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프로판 가스의 밸브를 까페 여직원이 채 잠그지 않은 것이 화인이었다. 준공검사 후 한달도 안된 새 건물이었지만 화재 경보기가 가동되지 않았고 방화벽도 없었고 200여 객실의 호텔에 비상계단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비극의 크기를 산더미처럼 키워 놓았다.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군인, 하다못해 미군들까지 동원된 필사적인 진화 작업 끝에 8시간여만에 꺼지긴 했으나 163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난 뒤였다.
생사가 엇갈리는 순간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다. 어떤 이는 시트를 찢어 밧줄을 만들어 한 층 한 층을 타고 내려와 구조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헬기가 늘어뜨린 구명줄을 잡긴 했으나 팔에 힘이 빠져 바닥으로 추락사하기도 했다. 가장 절박한 풍경은 불길의 위협에 못이긴 사람들이 매트리스에 의지해서 뛰어내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다 죽었다.) 매트리스와 함께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고 이 사진은 UPI에 의해 해외로 송고되어 유명세를 탄다. 또 대만 외교관 한 명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불길 속에서 물기를 적신 담요를 뒤집어쓰고 버티며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이 세계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글자 그대로 당시까지의 세계 최악의 대형 구조물 화재 사고였다.
한국인 사망자는 150여 명이었다. 그런데 이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지금도 자주 불리우는 노래 두 곡과 관련이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우선 김성술이라는 가수다. 그는 1970년 유니버설 레코드가 만든 음반 속에서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말을 짓고 불렀다. “꽃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엔 갈매기만 슬피 우네.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목메어 불러 봐도 소리 없는 그 사람. 돌아와요 충무항에 야속한 내 님아.”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이후 조용필이 불러 국민가요가 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98퍼센트가 같은 노래였다.
사연인즉슨 <돌아와요 충무항에>는 김성술이 작곡가 황선우씨에게 노래 가사를 주고 곡을 받아 불렀던 것이었더. 김성술은 이후 군대를 갔고 휴가를 나온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현장에서 사망한다. 그 이후 유족들은 그의 유품들을 태우면서 그의 음반들도 모두 수거하여 소각했는데 작곡가 황선우씨가 이 노래의 가사를 몇 군데 바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또 내용도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에서 형제를 부르는 설정의 노래로 만들었고 이를 조용필이 부르게 됨으로써 엉뚱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대연각 호텔에서 죽어간 김성술은 자신의 노래가 그렇게 뒤바뀌어서 국민가요(?)가 된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족들은 작곡가 황씨에게 손해배상을 제기했고 2006년 법원은 그 책임을 인정하여 3천만원의 배상 판결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그 뒷일은 알 수 없지만.
대연각 호텔 화재 현장에서 아깝게 죽어간 사람 중에는 서울 공대생으로서 음악에 뛰어난 재질이 있었던 민병무라는 이도 있었다. 그는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역시 대연각 호텔에 투숙했다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동생 민병호는 형의 유작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친구들을 포섭하여 형의 유작으로 ‘서울대 트리오’의 이름으로 MBC 제 1회 대학 가요제에 출전하여 입상하게 된다. 이것이 추억의 대학 가요제 명곡이라 할 <젊은 연인들>이다.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길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를 만든 이의 슬픈 최후 때문에 그런가 이 노래에는 또 다른 전설이 따라붙고 있다.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은 도시전설이지만 소개해 본다면 대충 이렇다.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4학년들이 마지막 MT를 떠났는데 선배들과 각별했던 한 명의 후배가 따라갔다. 그런데 등산 중 눈보라를 만나 가까스로 동굴 속에 몸을 피한 그들은 누군가 눈길을 헤치고 내려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그 사람에게 옷과 식료품을 몰아 주기로 한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지를 뽑는 사람이 내려가는 것으로 제비뽑기를 했다.
맨 먼저 후배가 쪽지를 뽑아 펴 보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배들은 그를 채근해 내려 보냈고 후배는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를 데리고 왔는데 이미 때는 늦어 모두 얼어 죽어 있었다. 선배들 모두는 편안한 얼굴로 손들을 꼭 잡고 죽었는데, 남아 있던 쪽지에는 모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후배는 자신만은 살려 보려는 선배들에게 속았던 것이다. <젊은 연인들>은 눈보라 속에서도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후배를 살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 학생들을 기리는 노래라는 전설이다. 이 사연을 들으며 노래를 부르면 뭔가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여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 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그런데 그 사연에 감명받아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불바다 속에서 그 짧은 생을 마쳐야 했고 또 바로 그 죽음을 배경으로 이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면 또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1971년 12월 25일 163명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불덩이가 되고 숨막혀서 몸을 뒤틀다가 꽃잎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갔다. 이 시기 유사한 사건들은 기실 비일비재했다. 그 전해에는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었고 그 뒤에는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가 고도성장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실제로 대한민국이 환골탈태하던 때이기도 했으나, 사람 목숨의 소중함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더 중요한 시기였고,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앞에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실종됐던 즈음이었다. 김성술과 민병무를 비롯하여 대연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 없는 저 세상 사람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낙원에서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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