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0년 12월 24일 그들이 마지막 본 흥남
한국인들이 잊을 수 없는 뽕짝 가사가 몇 가지가 있을 거다. “두만강 푸른 물에”가 그렇고 “해 저문 소양강”이 그럴 것이며 “천동산 박달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잊히지 않는 지명으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노래 가사 하나가 있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소절이다. 그리고 1절 가사는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를 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1950년 12월 24일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가 된 흥남 철수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중공군은 흥남을 점령했다. 그럼 이 흥남 부두는 왜 그렇게 사무친 노래 가사로 불리우게 된 것일까. 왜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먼 훗날 가수 강산에가 <라구요>라는 노래에서 그 정서를 되풀이할만큼 깊은 영감을 남긴 것일까. 박근혜 찍은 노인들을 무턱대고 빨리 죽어야 한다고 몰아댈 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왜 흥남부두였을까?
북진도 쾌속이었지만 후퇴도 빨랐다. 한국의 지형은 대동강과 원산만, 즉 통일신라 국경을 넘어서면 그 면적이 별안간 좌우로 넓어진다. 북진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않고 압록강 두만강을 향해 달려가던 국군과 UN군의 뒤를 중공군은 모질게 후려쳤고 국군과 UN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함경도 지역의 경우 더 형편이 좋지 않았다. 흥남은 일종의 덩케르크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패한 영국군의 마지막 탈출지)였다. 흥남에서 육로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애시당초 중공군에 막혀 버렸다. 중공군에 포위된 흥남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그리고 한국군들과 무수한 군 장비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막대하고 처치곤란의 존재가 흥남부두에 밀려와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들이었다.
그나마 흥남 외곽의 피난민들은 거기에 끼지도 못했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다가는 흥남 항구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일찌감치 흥남에 들어와 있던 피난민들만 해도 10만여 명에 달했다. 미군 수송 함대가 바다에 떠 있었지만, 그들은 군인과 군용 장비만 실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을 뿐, 피난민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두 명의 한국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백선엽의 출신 부대로 이름 높은 간도 특설대 출신인 1군단장 김백일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고문 현봉학이다. 이들은 피난민들을 놓고 갈 수 없다고 알몬드를 설득했고 심지어 김백일은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라. 국군은 걸어서 철수하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건 부두에 들끓는 피난민들의 참상 때문이었건 결국 미군은 매우 인도적인 결정을 내린다. 군 장비를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을 싣기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했던 배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였다. 이 배는 2차대전 때도 사용된 화물선이었는데 화물선의 특성상 정원은 60여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남은 정원은 13명. 하늘이 무너져도 2천명 이상은 못 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장 레너드 라루가 실려 있던 화물과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수용하리라는 결심을 한 뒤 그 배에는 무려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이 올라탄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피난민들도 짐을 버렸다. 선장은 부르짖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태워!”
17세기의 노예선도 한 사람이 누울 자리를 계산하고 노예를 태웠다. 하지만 이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는 한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다. 7천 6백톤 규모의 배에 1만 4천 명이 들어찼으니 오죽했을까.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었다. 통제할 사람도 없는 아비규환. 선원들은 어떻게든 피난민들을 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 굶주린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고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 부산항에 들어왔지만 배에 실린 피난민 수에 질렸는지 입항이 거부된다. 하는 수 없이 선장 라루는 배를 거제도로 몰아야 했다. 자연의 이치는 지옥에서도 이어지는 법이라 그 배 안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헤어나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번의 대통령 후보 문재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자. 그 경험을 겪은 사람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아픔을 눈 앞에서 보고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발을 굴렀던 사람들의 기억이 뭉쳐진 한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란 쉽사리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그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보기에, 새까맣게 어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김백일을 ‘간도 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라고 동상 파괴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심경이 들까. 과거의 사람들의 판단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책 몇 권으로 조립한 얄팍한 지식으로 살벌한 체험과 생존의 본능으로 쌓아온 역사를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은 매우 우스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얘기 하나 하자. 나는 광주 출신도 아니고 머리가 큰 뒤에야 광주의 아픔을 느꼈지만, 그다지 개연성도 없고 긴장감도 느슨한 영화 <26년>을 보면서 몇 차례나 발을 굴렀다. 내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양. 죽여! 쏴! 소리가 몇 번씩이나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한 젊은이의 멘트는 충격적이었다. “이게 뭐냐. 선동할라면 제대로 해.” 그때 느꼈다. 그에게 광주란 나에게 6.25와 같은 것이라는 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기억일 뿐, 나에게는 좀체 달라붙지 않았던 것처럼 광주도 그 청년에게 그러리라는 것. 배달의 기수 보고도 몰입하시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던 나처럼 그 청년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
노인들이 복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회수하라는 주장이 불길같은 동의를 얻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좀 안타깝다. 물론 그분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점들을 지나치게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때로 우리에게 질곡이었고 우리에게도 유전처럼 흘러들어 우리의 행동을 지체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단절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경험을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고 저버리고 도외시하여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tag : 산하의오역
1950년 12월 24일 그들이 마지막 본 흥남
한국인들이 잊을 수 없는 뽕짝 가사가 몇 가지가 있을 거다. “두만강 푸른 물에”가 그렇고 “해 저문 소양강”이 그럴 것이며 “천동산 박달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잊히지 않는 지명으로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노래 가사 하나가 있다.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의 첫 소절이다. 그리고 1절 가사는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를 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데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1950년 12월 24일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가 된 흥남 철수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중공군은 흥남을 점령했다. 그럼 이 흥남 부두는 왜 그렇게 사무친 노래 가사로 불리우게 된 것일까. 왜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고 먼 훗날 가수 강산에가 <라구요>라는 노래에서 그 정서를 되풀이할만큼 깊은 영감을 남긴 것일까. 박근혜 찍은 노인들을 무턱대고 빨리 죽어야 한다고 몰아댈 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왜 흥남부두였을까?
북진도 쾌속이었지만 후퇴도 빨랐다. 한국의 지형은 대동강과 원산만, 즉 통일신라 국경을 넘어서면 그 면적이 별안간 좌우로 넓어진다. 북진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않고 압록강 두만강을 향해 달려가던 국군과 UN군의 뒤를 중공군은 모질게 후려쳤고 국군과 UN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함경도 지역의 경우 더 형편이 좋지 않았다. 흥남은 일종의 덩케르크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패한 영국군의 마지막 탈출지)였다. 흥남에서 육로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애시당초 중공군에 막혀 버렸다. 중공군에 포위된 흥남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그리고 한국군들과 무수한 군 장비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막대하고 처치곤란의 존재가 흥남부두에 밀려와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들이었다.
그나마 흥남 외곽의 피난민들은 거기에 끼지도 못했다.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다가는 흥남 항구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일찌감치 흥남에 들어와 있던 피난민들만 해도 10만여 명에 달했다. 미군 수송 함대가 바다에 떠 있었지만, 그들은 군인과 군용 장비만 실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을 뿐, 피난민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두 명의 한국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백선엽의 출신 부대로 이름 높은 간도 특설대 출신인 1군단장 김백일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고문 현봉학이다. 이들은 피난민들을 놓고 갈 수 없다고 알몬드를 설득했고 심지어 김백일은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라. 국군은 걸어서 철수하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건 부두에 들끓는 피난민들의 참상 때문이었건 결국 미군은 매우 인도적인 결정을 내린다. 군 장비를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을 싣기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했던 배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였다. 이 배는 2차대전 때도 사용된 화물선이었는데 화물선의 특성상 정원은 60여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남은 정원은 13명. 하늘이 무너져도 2천명 이상은 못 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장 레너드 라루가 실려 있던 화물과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수용하리라는 결심을 한 뒤 그 배에는 무려 1만 4천여 명의 피난민이 올라탄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피난민들도 짐을 버렸다. 선장은 부르짖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전부 태워!”
17세기의 노예선도 한 사람이 누울 자리를 계산하고 노예를 태웠다. 하지만 이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는 한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다. 7천 6백톤 규모의 배에 1만 4천 명이 들어찼으니 오죽했을까.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었다. 통제할 사람도 없는 아비규환. 선원들은 어떻게든 피난민들을 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 굶주린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고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 부산항에 들어왔지만 배에 실린 피난민 수에 질렸는지 입항이 거부된다. 하는 수 없이 선장 라루는 배를 거제도로 몰아야 했다. 자연의 이치는 지옥에서도 이어지는 법이라 그 배 안에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헤어나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번의 대통령 후보 문재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자. 그 경험을 겪은 사람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아픔을 눈 앞에서 보고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발을 굴렀던 사람들의 기억이 뭉쳐진 한 세대의 집단적 트라우마란 쉽사리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그 지옥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이 보기에, 새까맣게 어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김백일을 ‘간도 특설대 출신의 친일파’라고 동상 파괴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심경이 들까. 과거의 사람들의 판단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책 몇 권으로 조립한 얄팍한 지식으로 살벌한 체험과 생존의 본능으로 쌓아온 역사를 간단하게 부인하는 것은 매우 우스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얘기 하나 하자. 나는 광주 출신도 아니고 머리가 큰 뒤에야 광주의 아픔을 느꼈지만, 그다지 개연성도 없고 긴장감도 느슨한 영화 <26년>을 보면서 몇 차례나 발을 굴렀다. 내가 마치 영화의 주인공인양. 죽여! 쏴! 소리가 몇 번씩이나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한 젊은이의 멘트는 충격적이었다. “이게 뭐냐. 선동할라면 제대로 해.” 그때 느꼈다. 그에게 광주란 나에게 6.25와 같은 것이라는 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기억일 뿐, 나에게는 좀체 달라붙지 않았던 것처럼 광주도 그 청년에게 그러리라는 것. 배달의 기수 보고도 몰입하시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던 나처럼 그 청년도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
노인들이 복지를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회수하라는 주장이 불길같은 동의를 얻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좀 안타깝다. 물론 그분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점들을 지나치게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 요소들은 때로 우리에게 질곡이었고 우리에게도 유전처럼 흘러들어 우리의 행동을 지체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단절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경험을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고 저버리고 도외시하여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박근혜 후보에게 절대적 지지표를 보낸 사람들은 유신 치하의 동아일보 사태 때 백지 광고를 내어 동아일보를 응원한 사람들일 수도 있었고 4.19 때 총칼 앞에서 이승만 물러가라고 외친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역사란 화끈한 단절과 청산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한 번 공부해 보고 이해해 보자.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따위 대학 신입생 교양서 (그것도 그리 성의있지 않은)로 학습한 지식 말고, 국민윤리 교과에서도 벗어나서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트라우마와 그 해결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자.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 만은 너무 잘아는 건 우리 아버지 레파토리기 때문이다.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