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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2.22 이재명과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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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과 이동수

 

(이 포스팅은 월간중앙 2004년 8월호 이향복 기자의 이재명 의사 관련 기사를 복사에 가깝게 재구성하고 있음을 밝혀 둠)

 

매국노의 대명사 하면 우선 이완용입니다. 을사오적이면서 한일합병 당시는 총리대신으로서 나라를 일본에 홀랑 넘긴 장본인이지요. 얼마전 그의 평전도 나왔지만 (김윤희, 한겨fp출판) 그는 사악한 악당보다는 비겁한 선비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독립문 위에 쓰여진 그의 글씨를 보듯 나름 나라의 개화를 위해 노력도 했고 대한제국 말기의 신하들 가운데에는 꽤 유능한 인물로 꼽히기도 했죠. 하지만 결국 그의 행적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고 이완용 이름 석 자는 만고의 역적의 이름으로 세세손손 전해지게 됩니다.

 

그런 그가 죽을 뻔한 일이 있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이었지요. 그 며칠 전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가 세상을 떠났는데 벨기에 총영사 주관으로 명동성당에서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외교권 없는 나라였지만 그래도 남아 있던 몇몇 외교관들과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 고관대작들이 몰려들었죠. 그런데 그 행적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습니다. 나이 스무살을 갓 넘은 이재명이라는 청년이었지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자랐습니다. 열 세 살에 기독교를 믿게 됐고 그 영향인지 신천지라 할 수 있는 하와이 땅에 이민을 갑니다. 그 형편으로 미루어 방귀깨나 뀌던 양반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에게는 사람 취급 못받던 평안도 사람의 처지로 그냥 고향 잊어버리고 영어 배워 미국 시민권 따고 한세상 살면 그만이었겠는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등 망국일로를 걷던 나라 소식을 듣고는 태평양을 건너 이 땅으로 되돌아옵니다.

 

“키가 자그마하고 몸집이 통나무처럼 빈틈이 없는데다 두 어깨가 벌어진 근골질”이었던 이재명은 평안도 사람 열, 서울 사람 넷이 뭉친 을사오적 암살단의 일원이 돼요. 이 중 이재명이 맡게 된 이가 이완용이었습니다. 이재명은 그를 척살하기 위해 칼 쓰기 연습을 무지하게 했다고 합니다. ‘ 팔뚝에 납덩어리같은 알통이 배기도록’ 말이지요. 사랑하는 여자와 짧은 살림을 차리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 연인에게 “나는 감옥에서 죽을 것”이라고 항상 얘기하며 각오를 다졌답니다.

 

그렇게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벨기에 황제 추도식은 하늘이 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어요. 명동성당 내려와서 양갈래 길이 있는데 어느 쪽을 지켜야 할지 가늠이 안 서는 거지요. 이재명은 평양 출신이었던 동지 이동수를 찾아갑니다. 이동수는 일진회 친일파 이용구를 담당하고 있었죠. 이재명이 사정 이야기를 하자 이명수는 두말없이 따라 나섭니다. “날래 가자우. 내레 한쪽을 디키면 될 거 아니가. ” 두 평안도 사내는 12월 22일 동짓날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그들 일생일대의 거사를 위해 명동 성당 언덕으로 향합니다.

 

이완용이 탄 인력거는 이재명 쪽으로 왔습니다. 이재명은 그의 팔뚝에 붙도록 훈련했던 칼을 들고 이완용의 인력거로 치닫습니다. 그런데 유달리 건장하고 힘이 셌던 인력거꾼이 이재명을 가로막았고 이재명은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둘러 그를 쓰러뜨립니다. 단련을 거듭한 그의 칼은 매서웠고 한칼에 인력거꾼은 절명을 하고 맙니다. 기겁을 한 이완용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기어서 도망하자 이재명은 날렵하게 그 뒤를 따라잡아 칼을 휘두릅니다. 이 매국노야. 이 역적놈아. 이완용의 살을 파고들면서 이재명과 그의 단도는 그렇게 외쳤겠지요. 하지만 치명상을 입히기 전 일본 경관의 칼이 이재명의 허벅지를 꿰뚫고 이재명은 체포되고 맙니다. 이재명은 칼을 꽂은 채로 “이 칼을 빼라. 나는 도망갈 사람이 아니다.”라고 호령하면서 구경꾼들에게 태연자약 담배를 얻어 피울 만큼 대담한 사람이었어요.

이후 열린 재판에서 이재명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증거물로 제시된 칼을 두고 일본인 판사가 이 칼이 흉행(兇行)에 쓰인 것이냐고 묻자 벼락같이 외쳤지요. “너는 흉자는 알고 의(義)자는 모르느냐. 나는 매국노를 죽이는 의로운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네 행동에 찬성한 자가 누구냐는 판사의 질문에 “2천만 민족이다.”라고 답할 때에는 밖에서 구경하던 한국인들이 법원 유리창을 깨며 “옳다!”고 동조했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한 지 몇 달 후 이재명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나라 위해 죽는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며 유언조차 거절한 채 말이죠.

 

이재명 외 13명이었던 암살단은 한 명을 남겨 두고 전원 체포됩니다. 한 명은 끝내 그 서슬푸른 일본 경찰의 검속을 피해 사라지죠. 그게 이재명과 같이 명동성당 아래 갈래길에 서 있었다는 이동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는 이유는 정말로 영화와 같습니다. 이인 변호사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 등의 회고에 따르면 이동수는 이완용을 죽이겠다는 일념을 굽히지 않고 십년을 잠행하던 중 이완용 집 고용인으로 들어가 3년을 일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끝내 기회를 잡지 못하고 정체가 탄로나, 1920년 12월 20일 밤 11시 30분 공소시효를 37시간을 남기고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는 동짓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1년 전 이재명이 뜻을 이루지 못한 바로 그날, 이완용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칼을 벼르고 또 별렀는지도 알 수 없지요.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완용이 그들에게 무엇이었기에, 그리고 그들에게 나라는 무엇이었기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젊은 인생과 십 몇 년의 기다림을 희생해 가며 인생의 안락은 커녕 형극뿐인 길을 걸어야 했을까요. 이재명은 그나마 후세의 기림을 받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라도 그 영전에 바쳐졌지만 이동수, 김용문 등 그 의거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행적은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런 나라를 위하여 그들은 젊음을 걸었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심지어 원수의 집에 들어가 종살이까지 하면서 칼을 갈았습니다. 그것도 나라에서 은혜를 입었거나 책임감 느껴야 할 자리에 있었거나, 일본에 빼앗긴 것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 참으로 많습니다. 이재명은 재판정에서 이완용의 죄상을 일일이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 모든 죄를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죄!” 과연 우리는 얼마나 반성했을까요. 이재명의 외침은 이완용에게만 향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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