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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1 참언론인 송건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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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1년 12월 21일 참언론인 송건호 타계

 

대학 1학년 때 나 공부 좀 한다는 티를 내는 아이들이 흔히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해전사 몇 권까지 봤다.”는 것이었습니다. 해전사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준말로서 그때까지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고 국사 교과서보다는 국민윤리 시간에 더 많이 가르쳤던 한국 현대사에 새로운 눈을 뜨게 했던 책이었죠. 이 책을 통해서 이후 70년에 가깝도록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에 이르는 험난하고도 답답한 경로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때껏 국정교과서가 가르쳐 온 황망한 사설들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뉴라이트들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까지 펴내 ‘해전사’의 명성에 편승하려 했겠어요

 

후일 6권까지 나왔던, 즉 그 시리즈 1권을 보며 분노하고 무릎을 쳤던 이들이 연구자가 되어 그 책의 저자가 되기도 할만큼 면면히 이어졌던 ‘해전사’ 1권의 저자는 대개 이렇게 소개됩니다. ‘송건호 외’ 해전사 1권이 나온 것은 1979년 10월 16일 하필이면 부산에서 부마항쟁이 터진 날이었습니다. 그때 송건호는 실업자였죠. 지금은 그 앞머리 발음이 경음으로 즐겨 발음될 만큼 그 가치가 떨어졌지만 한때 대한민국 언론의 상징과도 같았던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었던 그를 실업자로 만든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은 가히 해외토픽감이었습니다. 한승동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에 따르면 방위병이 애인 집에 불 지른 사건을 보도한 것이 ‘민군(民軍) 관계 이간질’이라는 이유에 걸려 기자가 관계기관에 끌려가 치도곤을 맞거나 “달동네 연탄값 비싸다.”는 기사가 하층민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역시 기자가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감옥에 계신 가카의 멘토 최시중씨도 이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지인들이 알아보지 못할만큼 엉망으로 얻어 터졌다는 전설도 있지요. 신문사에는 기관원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빨간펜 선생님처럼 기자들의 기사를 정독하고 밑줄 긋고 삭제를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유신 반대 시위 기사 같은 건 그야말로 동지섣달 꽃보다도 귀한 기사였어요.

 

그런데 1974년 10월 23일 그 꽃이 슬몃 동아일보 지면에 피어납니다. 서울농대에서 일어난 반유신 시위를 보도한 거지요.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고 동아일보로 쳐들어가 편집국장과 지방부장, 동아방송 뉴스쇼 담당부장의 오로록 옭아매고 남산으로 끌려갔지요. 이때 편집국장이 송건호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180여명의 동아일보 기자들은 다음날인 10월 24일 자유 언론 실천 선언을 하고 기관원 출입금지와 언론의 자유를 외치게 됩니다.

 

이 격동의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 젊은 날의 그는 신학생 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연희전문 즉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절치부심 경성법학전문학교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게 됩니다. 신학생 될 사람은 많으니 너 같은 사람은 언론으로 가라는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모릅니다만, 송건호는 또한 성직자처럼 언론인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수호 투쟁과 정권의 광고 철수 압박, 그리고 국민들의 빗발치는 격려 광고 등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편집국장으로서 지켜봤던 그는 다음해 3월 정권의 압력에 굴복한 사측이 기자들을 대거 해고할 때 사표를 내던집니다.

 

"한 둘도 아니고 수십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양심상 도저히 그 자리에 그냥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50여 명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사랑하는 처자가 있고 설혹 방법상 다소 이견이 있더라도 언론의 독립과 자유라는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떳떳한 명분을 가지고 투쟁하는 그들을 해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번 파동도 나를 위해 생긴 일이 아니었던가."

 

한창 공부할 나이의 아이들이 여섯이나 있었지만 이 고지식한 편집국장은 아무 대책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야무진 아내 덕에 집안이 굶어죽을 위기는 면했지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거나 대학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국 제일의 일간지 편집국장을 지냈지만 찻값이 없어 친구가 와도 다방에 들어가 앉지 못했던 처지의 그는 당국은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겨우 얻은 시간 강사 자리에서 몰아내거나, 간간히 들어오는 원고 청탁마저 봉쇄해 버리거나. 그러면서 정권은 그에게 고위직을 제시하며 회유합니다. 후일의 전두환 정권까지 합치면 무려 14번이나 그럴 듯한 제의가 들어왔다고 해요. 하지만 일찍이 “분단조국에서는 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이 고지식한 선비는 그 모두를 박차 버리죠.

 

야인으로 지내면서 그가 천착했던 것이 한국 현대사입니다. 책을 좋아해도 너어어어어무 좋아해서 연애 시절 아내와 데이트하다가도 “잠깐 기다리라”고 세워 놓은 뒤 책방에 들어가 세 시간을 넘겼고, 아내가 묵은 잡지를 버렸을 때 당장 이혼하겠다며 불호령을 터뜨려 아내가 엉엉 울면서 내버린 잡지를 찾아 나섰던 일화에서 보듯 방대한 독서량을 축적했던 그는 분단과 전쟁을 잉태하고 내놓았던 해방 이후의 역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그 한 예가 되겠습니다. 송건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언론인의 견지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글을 썼습니다. 그에게 역사 의식이란 언론인에게 글을 쓰는 손 이상으로 필요한 존재였지요, “언론인이란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다.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와 같은 사람이 되서는 안 된다. 양심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극심한 고문을 받습니다. 며칠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도록 고초를 겪었는데 여기서도 저 끔찍한 이름 이근안이 등장합니다. 송건호의 표현대로라면 “치가 떨리게 잔인한” 고문을 받고 그의 육체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초대 의장이 되고 저항 언론의 상징과도 같았던 ‘말’지를 창간,발행인을 역임하고 88년 국민들의 성금으로 세상에 나온 한겨레 신문의 초대 사장이 되기까지 그의 언론인 생활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수첩 맨 앞장에는 이런 글귀가 항상 쓰여 있었다고 하지요. “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

송건호는 고 김근태 의원처럼 고문 후유증에 의한 파킨슨 병에 걸려 전신마비로 수년을 고생하다가 2001년 12월 21일 그 고독하지만 용감했고 부러지지 않는 꼿꼿함을 자랑했던 삶을 마칩니다. 이런 분의 일생을 보면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5년 정도에 암담해하는 것이 무척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당선인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대한민국, 특히 유신 치하의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닌 왕국이었고 그 어둠은 요즘의 갑갑함 정도와는 비교가 안되는 참혹한 흑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기에도 송건호는 있었고, 그의 동료들이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일궈 내지 않았겠습니까. 그 왕국의 공주가 다시 대통령이 되어 김일성의 손자가 이끄는 북한과 그 국격을 나란히 했다고는 하지만 마냥 한탄만 하기에는 우리네 인생도 아깝고 또 송건호 선생같은 분의 일생이 무색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가증스런 권력에 맞서다가 쫓겨난 사람도 있고 수갑을 찼던 사람도 있고 난데없이 신사옥 건설단에 발령나서 안전모 쓰고 일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고 응원하고 또 잊지 않는 것이 송건호의 후예들을 키우는 일이라고 믿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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