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2005년 12월 29일 위대한 전쟁 영웅 김영옥 사망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쟁 영웅, 그러니까 20세기 전쟁사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장 평가받을만한 전쟁 영웅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남한도 북한도 누군가를 내세울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사람을 꼽겠습니다. 2005년 12월 29일 여든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영옥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흔한 별을 달아보지 못한 사람이고 한국군으로 복무한 적 없는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인 핏줄로 치면 그렇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민 2세로 LA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순권은 하와이에 이민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미국에서 장성한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장교후보생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되긴 했는데 그가 배속된 것은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니세이’ (2世) 부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황량한 사막지대에 설치한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가서 전쟁 내내 그곳에 머무르게 하지요. 일본인 2세들은 그 현실 속에서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들도 2차대전에 참전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고 그 결과 편성된 것이 442연대였습니다. 그 가운데 김영옥은 100대대(후일 442연대 1대대)에 배속돼 일본인 2세들을 지휘하게 되지요.
지휘관은 그가 한국계라는 것도 알았고, 그가 지휘해야 할 일본계 병사들과 사이가 당연히 좋지 않으리라 짐작하여 전출을 권유하지만 김영옥은 그를 거부하고 부대에 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통솔력과 자기 희생으로 부대원들의 지지를 받고 유럽 전선에 투입됩니다. 이 일본인 니세이 부대는 태평양 전선에는 일절 투입되지 않지요. 유럽에서 이 일본인 부대는 아버지들의 나라 일본 보병을 뺨치게 용감하게 활약합니다. 가끔 자살 돌격에 가까운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기도 하고 기발한 작전으로 독일군의 허를 찌르며 전과를 세우기도 합니다. 442연대가 받은 훈장과 기장을 합치면 1만개가 넘을 정도지요.
그 부대를 지휘하면서 김영옥 역시 큰 공을 세웁니다. 위험하다고 거부된 포로 납치 작전을 감행하여 정보를 캐낸 뒤 그를 이용, 승리를 거두거나 위장 공격으로 안심시킨 후 갑자기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진지를 점령하거나,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사령관이 그 활약을 지켜본 후 현장에서 중위 견장을 뜯고 대위 계급장을 달아 준 일화는 유명하지요.
종전 후 그는 장기 복무를 거절하고 코인 세탁소 사업을 시작합니다. 거의 신규 사업에 가까웠고 사업은 승승장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소령도 이즈음 재소집되어 (한국에서 복무하지는 않지만) 다시 군문에 드는데 김영옥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는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유색인종 최초로 백인 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이 됩니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영화같은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후퇴하는 한국군들을 바라보며 탱크 앞에 홀로 버티고 서서 반격을 호소하여 그 패잔병들을 데리고 반격 작전을 수행하는가 하면, 너무 쾌속 진군을 하다가 적으로 오인받아 포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전쟁 영웅으로서 그의 이력을 일일이 읊자면 아마 해가 갈 것 같습니다. 덧붙여 그를 설명하자면 그는 전쟁통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고 또 자신이 충성한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또한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미국내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는 인종차별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했고 그에 맞섰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요.
김영옥은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인종편견과 차별에 강하게 맞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영옥은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 타운 리틀도쿄에 세워진 442부대 추모비 건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비문에는 니세이부대의 참전 경위와 전과를 기록했지요. 그를 작성한 것은 김영옥의 옛 부하 벤 다마시로였습니다. 그는 김영옥에게 문안 검토를 부탁했고 그를 자세히 훑어보던 김영옥은 펜을 들어 딱 한 단어를 고칩니다. 미국 정부가 미국내 일본인들을 억류(interment)했다는 것을 집단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꾼 겁니다. 단순한 억류가 아닌 인종차별적인, 즉 나찌의 행태와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비문에 남긴 거지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일본인 3세인 혼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내려 할 때 일본인 사회의 압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때 혼다 의원은 김영옥을 찾아갔고 김영옥은 자신들의 옛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결국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위안부 결의안에 찬성 의사를 밝힙니다. 혼다 의원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일이었고 오랜 진통 끝에 2007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하게 됩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한국전쟁 때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조사위원으로 활약합니다. 수십년을 묻혀 온 전쟁의 비극은 21세기에 들어서서야 수면으로 떠오르고 결국 클린턴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사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게 됩니다. 코언 국방장관이 발표한 성명을 읽으며 저는 김영옥 대령 (그는 끝내 별을 달지 못했습니다. 진급 케이스에서 한국군 군사고문단장을 지원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박찼기 때문이죠.) 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지나간 50년의 세월은 한국의 노근리 부근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모든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줄였다. 그러나 우리는 1950년 7월 마지막 주 미군이 노근리 부근에서 후퇴하던 중 확인되지 않은 수의 한국 피난민을 살해 또는 부상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러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미국인도 한국인도 역사를 묻어서는 안된다. 전쟁의 결과로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이 숨진 것은 우리 양국에 강요된 것으로 우리는 자유수호를 위해 싸운 용감한 병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듯 그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분이 자신의 성향이 ‘진보’라면 ‘전쟁 영웅’ 따위의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전쟁 자체가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데 ‘전쟁 영웅’이 가당이나 하며, 전쟁에서 사람 많이 죽인 게 무슨 영웅이냐는 얘기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보수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씀은 대단히 이상적임을 넘어서 “허공에 매인 십자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전쟁은 피해야 하는 존재임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촛불 들고 인간띠 두른다고 마냥 피해지지만은 않는 게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결국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거고, 그들의 폭력성(?)에 고개를 저으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도모한 이들은 친일파 아니었겠어요. 여러 의미로 따져 볼 때 김영옥은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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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9일 위대한 전쟁 영웅 김영옥 사망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쟁 영웅, 그러니까 20세기 전쟁사에서 한국인으로서 가장 평가받을만한 전쟁 영웅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남한도 북한도 누군가를 내세울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사람을 꼽겠습니다. 2005년 12월 29일 여든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김영옥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흔한 별을 달아보지 못한 사람이고 한국군으로 복무한 적 없는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인 핏줄로 치면 그렇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민 2세로 LA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순권은 하와이에 이민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미국에서 장성한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장교후보생 학교를 나와 장교가 되긴 했는데 그가 배속된 것은 일본인 2세들로 이뤄진 ‘니세이’ (2世) 부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황량한 사막지대에 설치한 집단 수용소로 끌고 가서 전쟁 내내 그곳에 머무르게 하지요. 일본인 2세들은 그 현실 속에서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자신들도 2차대전에 참전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고 그 결과 편성된 것이 442연대였습니다. 그 가운데 김영옥은 100대대(후일 442연대 1대대)에 배속돼 일본인 2세들을 지휘하게 되지요.
지휘관은 그가 한국계라는 것도 알았고, 그가 지휘해야 할 일본계 병사들과 사이가 당연히 좋지 않으리라 짐작하여 전출을 권유하지만 김영옥은 그를 거부하고 부대에 남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통솔력과 자기 희생으로 부대원들의 지지를 받고 유럽 전선에 투입됩니다. 이 일본인 니세이 부대는 태평양 전선에는 일절 투입되지 않지요. 유럽에서 이 일본인 부대는 아버지들의 나라 일본 보병을 뺨치게 용감하게 활약합니다. 가끔 자살 돌격에 가까운 ‘반자이 돌격’을 감행하기도 하고 기발한 작전으로 독일군의 허를 찌르며 전과를 세우기도 합니다. 442연대가 받은 훈장과 기장을 합치면 1만개가 넘을 정도지요.
그 부대를 지휘하면서 김영옥 역시 큰 공을 세웁니다. 위험하다고 거부된 포로 납치 작전을 감행하여 정보를 캐낸 뒤 그를 이용, 승리를 거두거나 위장 공격으로 안심시킨 후 갑자기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진지를 점령하거나, 그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사령관이 그 활약을 지켜본 후 현장에서 중위 견장을 뜯고 대위 계급장을 달아 준 일화는 유명하지요.
종전 후 그는 장기 복무를 거절하고 코인 세탁소 사업을 시작합니다. 거의 신규 사업에 가까웠고 사업은 승승장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소령도 이즈음 재소집되어 (한국에서 복무하지는 않지만) 다시 군문에 드는데 김영옥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는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유색인종 최초로 백인 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이 됩니다. 그의 활약상을 보면 영화같은 장면들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후퇴하는 한국군들을 바라보며 탱크 앞에 홀로 버티고 서서 반격을 호소하여 그 패잔병들을 데리고 반격 작전을 수행하는가 하면, 너무 쾌속 진군을 하다가 적으로 오인받아 포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전쟁 영웅으로서 그의 이력을 일일이 읊자면 아마 해가 갈 것 같습니다. 덧붙여 그를 설명하자면 그는 전쟁통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고 또 자신이 충성한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또한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미국내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는 인종차별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했고 그에 맞섰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지요.
김영옥은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인종편견과 차별에 강하게 맞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영옥은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 타운 리틀도쿄에 세워진 442부대 추모비 건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 비문에는 니세이부대의 참전 경위와 전과를 기록했지요. 그를 작성한 것은 김영옥의 옛 부하 벤 다마시로였습니다. 그는 김영옥에게 문안 검토를 부탁했고 그를 자세히 훑어보던 김영옥은 펜을 들어 딱 한 단어를 고칩니다. 미국 정부가 미국내 일본인들을 억류(interment)했다는 것을 집단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꾼 겁니다. 단순한 억류가 아닌 인종차별적인, 즉 나찌의 행태와 다르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비문에 남긴 거지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일본인 3세인 혼다 의원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을 내려 할 때 일본인 사회의 압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이때 혼다 의원은 김영옥을 찾아갔고 김영옥은 자신들의 옛 부하들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 뭘 위해 싸웠나? 우리가 싸운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결국 일본인 참전 동지회는 위안부 결의안에 찬성 의사를 밝힙니다. 혼다 의원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일이었고 오랜 진통 끝에 2007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하게 됩니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한국전쟁 때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조사위원으로 활약합니다. 수십년을 묻혀 온 전쟁의 비극은 21세기에 들어서서야 수면으로 떠오르고 결국 클린턴 대통령의 미국 정부는 사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명하게 됩니다. 코언 국방장관이 발표한 성명을 읽으며 저는 김영옥 대령 (그는 끝내 별을 달지 못했습니다. 진급 케이스에서 한국군 군사고문단장을 지원하면서 그 기회를 스스로 박찼기 때문이죠.) 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지나간 50년의 세월은 한국의 노근리 부근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모든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줄였다. 그러나 우리는 1950년 7월 마지막 주 미군이 노근리 부근에서 후퇴하던 중 확인되지 않은 수의 한국 피난민을 살해 또는 부상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 이러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미국인도 한국인도 역사를 묻어서는 안된다. 전쟁의 결과로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이 숨진 것은 우리 양국에 강요된 것으로 우리는 자유수호를 위해 싸운 용감한 병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듯 그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분이 자신의 성향이 ‘진보’라면 ‘전쟁 영웅’ 따위의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언성을 높이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전쟁 자체가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한데 ‘전쟁 영웅’이 가당이나 하며, 전쟁에서 사람 많이 죽인 게 무슨 영웅이냐는 얘기였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원래 보수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씀은 대단히 이상적임을 넘어서 “허공에 매인 십자가”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전쟁은 피해야 하는 존재임이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촛불 들고 인간띠 두른다고 마냥 피해지지만은 않는 게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결국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거고, 그들의 폭력성(?)에 고개를 저으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도모한 이들은 친일파 아니었겠어요. 여러 의미로 따져 볼 때 김영옥은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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