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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9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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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3년 12월9일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세상 사람들의 키가 한 뼘은 움츠러지게 만들 정도로 추운 날이었습니다. 자동차들은 어둔 밤에도 선연한 입김을 내뿜으며 바람을 가르고 달렸고, 거리의 사람들은 하시라도 빨리 온기가 있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무자비해져만 가는 추위 속에서 한 아저씨가 힘겹게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젊은이의 거리 대학로가 저만치 보였습니다. 원래 나이는 마흔다섯이지만 누가 봐도 쉰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는 잠바떼기 하나로 추위를 막으며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서로 부둥켜 안은채 바삐 길을 가던 연인에게 아저씨가 말을 걸였습니다."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어드렇게 갑니까?"연인 중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습니다."저리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꼬부라지면 돼요.""얼마나 걸립니까?""차 타면 5분이면 가요.""걸어가문 어느 정도......"


아저씨의 마지막 질문은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연인들은 저만치 뜀박질하며 아저씨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하필이면 젊은 연인이 가리킨 방향에서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 고드름이 들어와 박히는 듯 했고 손과 발은 칼바람에 토막이 나듯 시렸습니다. 귀는 이미 떨어져 나가 버린 듯 감각이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혀가 얼어붙을까 걱정했는지 지나는 사람들에게마다 길을 물었습니다.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이 어드메 있습니까?"


"7천원이라도 달랠 걸 그랬나." 아저씨는 이틀 전 밀린 월급 7백만원을 받아내 보겠다며 일하던 직장을 찾았지만 한푼도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조선족 동료들이 농성 중인 100주년 기념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몸을 한껏 움츠리다보니 갑자기 옆구리에서 쩡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고통으로 하얘졌습니다.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들어올 때, 밀항선 선원들을 단지 바라만 보았다는 이유로 때리고 밟혀 부러진 갈빗대가 아직도 말썽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아저씨는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대고 옆구리를 다독인 후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아저씨는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어제 아침부터 오늘 저녁까지 한 끼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머릿 속에 차갑게 들어와 박혔습니다.지나는 사람에게 몇 번 도와 달라고 이야기도 해 보았지만 그 말을 들을 새도 없이 사람들은 빠르게 아저씨 앞을 지나쳐 갔습니다. 뜨끈한 오뎅이라도 한 사발 먹는다면 바랄 게 없겠는데 아저씨의 수중에는 오뎅 국물값이라도 할 땡전 한 푼 없었습니다. 


바람은 아저씨를 집어삼킬듯 불어 왔고 아저씨는 손을 비비며 마치 어린아이같이 중얼거렸습니다."아이 추워... 아이 추워....."누군가 아저씨의 앞을 지나갔습니다. 저 좀 보시오... 라고 할 양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핸드폰 통화에 열심이었습니다. "응? 뭐 사 오라고? 알았어 아빠가 꼭 사갈께. 여보? 나야. 불 좀 팍팍 때고 있으라구. 추워 죽겠어. 뭐 좀 데워 놔 밥 안먹었어"


속절없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저씨는 무릎을 쳤습니다. 기렇지 핸드폰이 있었구나. 112 신고를 하면 순찰차가 달려오겠지. 여러분 곁에 3분 내로 달려온다고 했으니까. 사정을 좀 봐 주지 않갔나. 추운 날씨에 밧데리가 방전될까 걱정이었지만 다행히 밧데리는 선명한 한 칸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얼어붙어 가는 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렀습니다


.1...1....2.... 수화음을 거쳐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자 아저씨는 이미 얼어붙은 입을 힙겹게 떼었습니다. 상대방도 대답을 해 왔습니다.

"집에 왜 못가요?"
"맥이 없어서 걷지를 못하니까 못가죠."
"왜 힘이 없어요?"
"한 이틀 굶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앉아 있어요."
"집이 어디에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걷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말을 할수록 목은 잠겨 왔고 상대방은 아저씨를 술 취한 사람 정도로 안 것 같았습니다. 전화는 이내 끊겼습니다. 순찰차의 꿈은 사라지고 아저씨는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50미터쯤 갔을까 아저씨는 다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땅이 이렇게 차가운지는 몰랐는데 땅에 닿은 뺨이 마치 썩어들어가듯 얼어 왔습니다. 아저씨가 내뱉는 거친 숨결도 입에서 나오는 족족 냉기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 이거이 죽는 거이구나."


지금껏 그렇게 고생했어도 죽음을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입국할 때 당한 갈빗대 부상으로 일 반 치료 반 했던 한국 생활은 사는지 죽는지 모를만큼 바쁘고 급박한 생활이었습니다. 나이 마흔 다섯,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글자가 머릿 속에 어른거렸습니다.아이 돼... 죽다니 마누라랑 새끼 둘은 어캐 하라고....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지하도 벽에 기대고 생명의 동아줄인 듯 핸드폰을 부여잡았습니다


."여기요.. 살려 주십시요.. 종로 4가에서 창덕궁 시장 쪽으로 오면 있슴다."
"택시 타고 들어가세요."
"택시 탈 돈 없슴다."
"공중전화로 전화해 봐요 그럼. 위치추적 되게"

공중전화 박스가 어디 있을까. 지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봤지만 전화박스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얼음장보다 더 얼어붙은 땅바닥에 널부러져서 그는 그렇게 열 세 통의 112와 한 통의 119를 눌렀습니다. 하지만 112와 119는 택시 타고 들어가라고 충고하거나 이미 마비되어가는 혀를 움직이려 애쓰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이미 아저씨의 온몸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굳어 버렸습니다. 다리를 펴는 것조차, 핸드폰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온전히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윙윙 그 독기를 더해 가는 겨울 바람의 이빨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의 몸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더 이상 웅크리지도 못했습니다. 불이 있다면..... 손톱만큼이라도 좋으니 불씨가 있다면.... 파들파들 떨던 아저씨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 기래... 라이타가 있었지."담배를 산 지가 오래 되어 사용한 기억은 까마득하지만 라이터 는 얌전히 주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불길을 내뿜지 못했던 빨간 색 싸구려 라이터는 주인의 손이 닿자마자 환하게 켜졌습니다. 아.... 따뜻하구만.... 라이터의 불길에 손을 가까이 대자 거짓말처럼 손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그 온기는 아저씨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아저씨는 고향에서 쓰는 녹슨 난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먹음직스런 상을 벌려 놓고 비워 놓은 자리에 앉을 것을 채근하고 있었습니다. 3년 동안 보지 못한 아내와 아이들이었지만 어제 헤어진 듯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내가 웃으면서 자신의 장기인 생선 튀김 요리를 건넸습니다.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던 시절 가장 먹고 싶던 요리였지요."고맙소. 내 이거를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지 아오? 조금만 더 기다리문 내 돈 마이 벌어서......"이 말을 하며 생선 접시를 받으려는 순간 라이터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화로불 타오르던 방이 아닌 창덕궁 근처 인적 드문 길거리의 지하보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 라이타 라이타.... 아저씨는 서둘러 라이터의 불을 당겼습니다. 노랗게 타오르는 촛불같은 불길 안으로 아저씨의 눈길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서러웠지요? 돈 떼 먹을까봐?"이제 아저씨는 석유난로가 눈이 시리만큼 퍼렇고 싯누런 불길을 지펴 올리는 현장 사무실 안에 서 있었습니다. 부천,동두천 등 이름도 낯선 도시의 건설 현장에서 일할 때 아저씨를 걸핏하면 중국놈이라고 욕하던 십장님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갈빗대를 부러뜨렸던 밀항선 선원들도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서 있었습니다."미안하게 됐어요. 우리도 먹고 살려다 보니까..... 미안해요 김씨. "


십장님이 밀린 임금 봉투를 수줍게 내밀었을 때 아저씨는 지난 3년간 쌓아 뒀던 모든 슬픔과 고통이 눈녹듯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 돈 있으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개 들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했노라며 아내에게 한국제 화장품 하나, 아이들에게 최고급 한국산 학용품 세트 하나씩 들고 가도 아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일없습니다 선생님들...... 선생님들 원망 하나도 안합니다. 다 기럴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 순간 아저씨는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들이 웃음을 멈추고 예의 독기 서린 어투로 말을 내뱉은 것입니다."개새끼 지랄하네.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퍼뜩 눈을 뜨자 아저씨 앞에는 취객 두 명이 서 있었습니다. 망년회에서 거나하게 술 한 잔씩한 모양인 듯 얼굴이 불이 난 듯 붉었습니다. 쳐다볼 힘조차 없어 다시 고개를 숙이는 아저씨의 목덜미를 한 취객이 거칠게 잡아 올렸습니다.

"너 이 새끼 뭐하는 거야 지하도 앞에서.....히죽 히죽 웃으면서... 끄윽... 너 혹시 기름 붓고 불지르려는 거 아냐 이거?"
"아... 아님다. 고조... "
"아님다? 고조? 이 새끼 연변 놈이구만. 왜 라이타 들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사람들 겁주는 거야? 끄윽....이거 대구의 그 미친놈같이 불지를라구 그러는 거 아냐?"


대답할 힘도 없이 취객의 거친 손에 따라 몸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데 일행이 취객을 말려 떼어 놓고는 아저씨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취객의 고함 소리는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중국놈들 너희놈들은 돈 벌면 다 너희 나라 갈 거지? 이 개새끼들아. 너희 놈들 때문에 우리 인생이 이 모양이야 이 되노무 새끼들아."


한국에 온지 3년 동안 귀가 따갑고 머리가 어지럽도록 들었던 욕설을 다시 한 번 삼키면서 아저씨는 머리를 바닥에 눕혔습니다. 아까같이 차갑지는 않았습니다. 되레 폭신하고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지요. 하지만 아직도 살을 스치는 바람의 날은 매서웠습니다. 아저씨는 굳어가는 팔을 들어 라이터를 켜려 했습니다. 하지만 피식 피식 불꽃만 새어 나올 뿐 라이터는 타원형의 풍성한 불을 뿜어내지 못했습니다. 힘을 짜내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퉁겨 봤지만 라이터는 아저씨의 희망을 외면했습니다. 라이터를 그제야 찬찬히 들여다 봤습니다. 가스는 거의 떨어졌고 불꽃조차 갈수록 사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통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보였습니다. made in China


"너도 중국에서 왔구나. 그래도 너는 할 일을 하고 죽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벌 돈도 많은데....."


아저씨는 라이터를 소중히 가슴에 안고 누웠습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불을 밝혀 다오...... 아저씨의 소원이 통했을까요. 피식거리던 라이타에서 갑자기 파란 뿌리의 노란 불길이 확 하고 혀를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다시금 온몸으로 스며드는 라이터의 온기에 눈을 감았습니다.


"원섭아.... 원섭아....."한 한복입은 할머니가 아저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아저씨의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 대에 아저씨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중국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아저씨의 아버지를 낳았고 아저씨의 아버지는 아저씨를 낳았습니다. 할머니는 아저씨를 어릴 때처럼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아저씨도 어릴 때처럼 할머니에게 떼를 썼습니다.


"왜 중국으로 갔슴까 할마니. 죽어도 고향 땅에서 죽지 뭣하러 중국 가서 날 이캐 만들었슴까 할마니."
"묵고 살라고 갔다."
"내가 중국 사람입니까 조선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까. 난 다 아닙니다. 난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니가 어디 사람이건 그건 암것도 아니여. 넌 그냥 상놈이여. 없는 놈이여. 예전에 압록강 건너던 우리처럼 말여."
"할마니 나 중국놈이라고 욕하던 새끼들 다 때려 죽이고 싶소. 하나 하나 찾아 가서리 멱을 따고 싶소."
"죄 지은만큼 불쌍한 사람들이여. 그 사람들도 운제 니겉이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여. 그 사람들이 니를 잘못 미워한 것처럼 니도 그 사람들을 잘못 미워허면 쓰겄냐.... 불쌍한 내 새끼야. 이제는 다 잊을 때가 되았다......"


할머니는 포근하게 아저씨를 안아 주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랑 싸우다 머리가 터져 들어왔을 때 정성스레 된장을 발라 주시던 그 손길로, 혹독한 흑룡강성의 추위, 얇은 창을 거침없이 넘나들던 황소 바람도 감히 접급하지 못했던 그 품의 따뜻함으로, 아무리 강짜를 부리고 맹랑한 투정을 일삼아도 한 팔에 안아 주시던 그 넉넉함으로, 할머니는 아저씨를 보듬었습니다. 어슴프레 아저씨가 눈을 떴을 때 한없이 멀어 보이던 별이 시나브로 가까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장군의 차가운 갑옷 자락에 묻혀 버린 검은 도시의 불빛으로부터, 그 고통의 추억으로부터 아저씨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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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원섭(45·중국 흑룡강성 하천현)씨는 2000년 7월 밀입국 브로커에게 1천 만원을 넘게 주고 한국
에 왔다. 김씨는 밀항선에서 브로커에게 심하게 폭행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기도 했다.김씨는 대전, 동두천, 부천 등지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으나 빚을 갚지 못한 채 강제추방 대상이 됐다. 김씨는 서울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농성현장에 합류해 '재외동포법 개정 및 강제추방 반대'를 재중동포들과 함께 요구했다.작년 12월 8일 아침 밀린 임금을 받으러 나간 김씨는 다음 날인 9일 새벽 5시께 종로구 혜화동 도로변에서 동사한 채 발견됐다. 부검결과 김씨는 폐렴과 간경화를 앓았던 것으로 나타났다.김씨는 "이틀 동안 밥을 먹지 못해 움직일 힘이 없다"며 핸드폰으로 112에 열세번, 119에 한번 등 모두 열네번의 구조요청을 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동사하고 말았다. 특히 김씨의 사망장소와 경찰지구대간의 거리가 불과 40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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