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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2. 7 빌리 브란트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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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의 사과 

눈 오기 직전의 서울 날씨랄까. 하늘은 잔뜩 찌푸려 뭔가를 세상에 뿌려버릴 기세 역력하고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지나는 사람의 살갗을 북북 긁고 지나가던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는 한 명의 귀빈이 와 있었다.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가 그였다. 사회주의 형제국인 동독이 아닌 서독의 수상 빌리 브란트였다. 

남과 북의 코리아에 댈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단된 동과 서의 도이칠란트는 동서 냉전의 최전선에 복무하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는 1956년 서독 외무 차관 할시타인이 발표했고 할시타인 원칙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서독은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서독만이 국제법상 존재하는 유일한 독일국가이며, 따라서 전 독일민족을 대표하고 그 이름 아래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었다. 역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를 주장하던 남한의 정부도 할시타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남한이나 서독에게나 자승자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적대국과 수교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손을 끊는 것은 이래저래 손해였던 것이다. 결국 서독은 1967년 루마니아와 수교함으로써 할시타인 원칙의 굴레로부터 일단 벗어난다.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는 4월 12일에는 서독의 평화협정과 긴장완화 정책을 발표 하였으며, 4월 20일 '할슈타인 원칙' 폐기 가능성과 동독 인정 가능성을 발표함으로써 기존의 정책에 일대 변혁을 가했다. 이른바 ‘동방정책’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 것이다.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 개전의 신호탄을 쏜 폴란드 침공과 뒤이은 학정이 아니더라도 역사적으로 폴란드인들이 독일인들에 대해 품는 감정은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들이붓는 감정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도 독일의 옛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날선 시선이 있었고, 독일군의 오리걸음과 그 군홧발소리를 떠올리며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든 양국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을 맺기로 한 12월 7일 아침, 브란트는 어떤 장소를 찾았다. 자멘호파 거리의 넓은 광장이었다. 그 중앙에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기념비가 있었다. 

1943년 바르샤바에 있던 유대인 집단 수용 지역 게토에서 필사적인 반란의 불길이 솟았다. 죽음의 수용소로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은 끌려가서 죽느니 싸우다 죽자는 각오로 나찌에 맞섰다. 봉기는 장렬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28일 동안 독일군 1500명이 죽었지만 5만 6천여명의 유태인들이 피살됐고 생존자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끌려갔다. 기념비는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독 수상이 기념비를 찾은 것이다. 바르샤바 게토에서 온갖 방법으로 유태인 게토를 싹쓸이했던 가해자의 나라의 수상 브란트는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폴란드만큼 유태인이 고통받은 장소는 없다. 유태계 폴란드인에 대한 말살 책동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말이다. 

입을 꾹 다물고 기념비 앞에 선 서독 수상 앞에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쉬가 터졌다. 기념비 앞에 화환이 놓여졌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 게토의 생존자나 나찌의 압제를 경험한 폴란드인이라면 눈살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을지도 모른다. 화환에는 흑 백 황의 독일 국기의 테이프들이 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환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는 뒤로 물러선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일부 성미 급한 카메라맨들은 철수할 채비를 하던 그 순간, 브란트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기념비 앞에 덥석 무릎을 꿇은 것이다. 경건하다기보다는 경악스러운 순간. 미친 듯한 플래쉬가 흐린 하늘을 밝히는 가운데 브란트는 30초 이상 무릎을 꿇고 손을 다잡았다. 그 자리에 있던 독일인이고 폴란드인이고 어안이 벙벙한 순간. 브란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독일의 현대사는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그때 살해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브란트는 나찌에 복무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나찌의 박해를 피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봉기의 소식을 들었다. 즉 바르샤바의 비극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빌어 역사적 책임을 모면하기에는 그의 민족에게 들이닥쳤던 역사의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물론 그 무거움은 양심의 무게를 지닌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독일연방공화국 수상이 바르샤바의 봉기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비 앞에 무릎 꿇은 순간, 수백만 명이 탄성을 토해 냈고 빠개지는 듯 뭉클해 오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 진심어린 무릎 꿇음은 전후 독일인들의 반성의 상징이 됐고 동서 냉전의 역사는 새로운 걸음을 위한 신발끈을 동여맸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못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모든 가해자들은 대개 천수를 누리거나 잘 먹고 잘 살았고,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거나 인정하더라도 눈 가리고 아웅에 그쳤다. 때로는 그 사과를 ‘생까는’ 속내를 드러내 그들로부터 피해 입은 사람들은 허파가 뒤집히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통석의 념에 유감에 ‘아픔을 주었다’고 표현한 뒤에 식민 통치는 조선에 도움을 주었다는 둥 하는 망언을 서슴없이 쏟아붓는 일본인들도 있고,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은 분들을 위해 사죄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판결은 두 개라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전태일 열사에게 꽃을 가져가서는 그 앞에 있는 노동자는 치워 버렸던 분도 계셨으니까. 

진정한 사과는 어렵다. 피해자 뿐 아니라 제 3자, 나아가 가해자 자신까지도 감동시켜서 참회와 용서, 공감의 장을 만드는 사과는 쉬운 것이 아니다. 1970년의 브란트는 그 일에 성공했고 2012년 박근혜 후보는 그 일에 처참하게 실패했다. 기실 나는 박근혜 후보가 진심으로 사과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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