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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6 어느 위인의 탁구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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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5년 12월 6일 어느 천재의 기묘한 일생 

1945년 12월 7일 조선일보의 한 귀퉁이에 짤막한 다섯 줄짜리 부고가 실렸다. “윤치호씨 병사(病死). 송도중학 설립자 윤치호씨는 (12월) 6일 오전 9시 개성 고려정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았다. 영결식은 오는 10일 오후 3시 송도중학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윤치호가 죽었다. 나이 여든 둘. 그 80 여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
과에 소년 급제할 만큼 영민했지만 서자 출신이라 무척 서러움을 받았던 윤웅렬의 아들로 태어난 윤치호. 그의 나이 열 세 살에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렸다. 굳게 닫힌 문호를 억지로 열어젖힌 것은 일본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일제히 조선 땅에 공사관을 세웠고 새로운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청년 윤치호는 이 신문물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가진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선 천지를 벗어나 존재하는 생판 새롭고 거대한 세상의 공기를 마신다. 이렇게 생소한 경험을 한 인간들은 대개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 새로운 것에 열광하긴 하는데 돌아와서는 깡그리 잊어먹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사람,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는 사람, 역시 머리를 싸매기는 하는데 우리는 안될 거야 아마..... 로 빠지면서 새로움을 일궈낸 대상에 찬미를 보내는 사람 등등... 윤치호는 맨 마지막 부류였다. 

그의 일생은 매우 복잡하고 오묘하며 애매하고 모호하다. 전라도 말로 참 거시기하다. 물론 무 베듯 잘라 얘기하자면 그는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원로격 친일파였다. 세계를 알아가던 시절, 그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이건 윤치호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당시 개화를 주창한 이들 대부분은 “우리도 일본처럼”을 모토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갑신정변 때 우정국에서 민영익 등에게 칼을 휘두른 이후 개화파가 달려갔던 것은 국왕이 있는 경복궁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이지 않았겠는가. 

젊은 날의 윤치호의 눈에 자신의 고국은 정녕으로 한심하고 아둔한 나라였다. 왕비 척족들이 온 나라를 거덜내고 사또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제 배 챙기기 바쁘고 지식인이란 것들은 아직도 서양 오랑캐 타령하고 앉았고......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도망가고 이후 미국까지 건너가 넓은 세상을 본 윤치호에게는 더욱 그랬다. “내 나라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흉 잡힐 일만 많으매 일변 한심하며, 일변 일본이 부러워 못 견디겠도다.”라고 나이 스물 다섯의 청년은 땅을 쳤고 스물 일곱 되던 해의 봄에는 “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라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조선에서 흔치 않은 국제적 경험자이자 열등감의 덩어리였던 그는 귀국 후 열정적인 개화 운동에 나선다. 독립신문의 주필, 독립협회 회장, 만민공동회 회장 등을 도맡으며 국민들에게 요즘의 구호를 조금 컨닝하여 말하면 “미래는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그 내부 안에서 탁구대 하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항상 핑퐁핑퐁 그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미국의 인종차별에 분노하면서도 “흑인들을 데리고 와서 영어 가르쳐 줬으면 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중성, 자신의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고 젊은이들에게 대한의 영광을 얘기하고 ‘애국가’ 가사를 지으면서도 툭하면 자신의 나라와 백성에 저주에 가까운 한탄을 내뱉는 양가감정,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러일전쟁은 동양인의 승리라고 찬미하는 어수선함,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을사조약의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도 그에 저항하는 실질적인 행동은 거의 보여 주지 않는 미적거림,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나의 사랑 한반도야.”를 노래하며 조국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안창호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방황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못하는 머뭇댐의 연속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증오하여 붓으로는 엄중히 규탄했으나 그들을 응징하려는 움직이에는 발끝 하나 대지 않았다. 결국 그의 공은 결코 그 마음 속 탁구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참으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1차 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사람들의 귓전을 어지럽히고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담에서 조선을 비롯한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 논의될 것이라는 착각이 야무지게 난무할 때,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며, 열강 중 어느 나라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서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고 시원스럽게 현실을 일깨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파리 강화 회의장에서 뭘 어째 보겠다는 인사들은 아둔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아둔패기들 가운데에는 베트남의 호치민도 있었다. 어떤 이는 좌절을 경험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만 어떤 이는 좌절을 예측하고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는다. 

윤치호는 자신이 보기에 가능한 일에는 열정을 쏟았지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도전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운동하는 이들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고 3.1 운동에도 참여를 거부했다.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결국 그의 주장은 철저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현실론이었다. 독립하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하고, 실력이란 곧 경제력이고 민도(民度)이며, 그게 안되는데 무슨 독립이며 투쟁이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쯤되면 그는 민족개조론의 이광수와 영혼으로 만나는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향후 행보는 춘원 이광수의 그것과 매우 높은 일치율을 보인다. 

또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한 탁구대 인생을 선보인다. 독립운동가를 비판하면서도 상해에서 활동하던 양기탁이 잡혀왔을 때에는 유배지까지 천리 길 마다 않고 달려가 그를 만났고 충무공 유적보존회에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즉 일본으로서는 별로 환영하기 어려운 인물의) 터전을 지켜낸 사람이었고 도산 안창호가 혹독한 옥고 끝에 죽었을 때에는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일본 제국에 거역하지 않음을 수십 년 동안 천명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았고, 무슨 사건만 터지면 일본 경찰은 윤치호에 대한 감시의 폭을 높였으니 이 복잡하고 오묘한 사람의 인생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해방된 뒤에도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사죄하기보다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이비 애국자’들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고 자신의 일제 시대 행각에 대해 사죄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런 행동이 자신이 평생을 지켜 온 탁구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그가 1945년 12월 6일 죽었다. 뇌일혈이었지만 항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죄책감으로, 또는 억울함으로 등등 )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의 수십 년을 일기로 남겼다. 초반에는 한문으로, 다음에는 한글로, 그리고 그 후에는 유창한 영어로. 그가 친일파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리는 그와 그의 일생과 그가 지켜본 세상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따위 친일파 일기 따위 봐서 뭐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역사에 대해 오만한 자세일 뿐. 유영렬이 지은 <개화기 윤치호 연구>의 서문에 나는 공감한다. 

“역사적 인물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위인이나 열사의 공적을 밝히는데 있는 것만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여 역사의 진실과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역사의 격랑(激浪)을 올바로 헤쳐나간 인물뿐만 아니라 그 격랑에 휩쓸려 빗나간 인물에 대한 연구도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윤치호는 누구일까? 윤치호처럼 천재는 드물겠지만 그 같은 탁구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조금 더 많지 않을까? 뭐 거울을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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