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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2.10 전주역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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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7년 12월 10일 전주역의 오류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 가장 드높은 관심을 보이고, 또 그 관심이 폭발로 이어진 시기를 고르라면 우선 해방정국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85년 2.12 총선에서 87년 대통령 선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12 총선 때의 참여 분위기는 중학생들의 눈으로 봐도 엄청났다. 투표율 80퍼센트를 넘은 가공할 민의가 집권당을 향했고 특히 부산에서는 집권 민정당이 2등 턱걸이도
 못하고 고꾸라진 구가 많았다. 그즈음 양정 시장에서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는데 대략 이런 것이었다. “니는 김정수 (당시 신민당) 찍어라. 나는 강경식 (국민당)이 찍으께. 민정당은 안되는 거 알제.” 며칠 뒤 선거 결과가 그대로 나타났을 때의 놀라움이란..... 

그런 민의로 이뤄진 국회 임기 내에 많은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부르짖었던 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마침내 국회에서는 새로운 헌법안이 제정됐다. ‘호헌철폐’는 이루어진 셈이다. 남은 것은 ‘독재타도’였는데 이게 만만하지 않았다. 야당의 두 거목이 웃통 벗고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수십 년 한국을 지배해 온 파시스트 세력을 결집하고 온갖 공작 정치를 가동하며 그들의 재집권 프로젝트를 실현해 나가고 있었다. 돌아보건대 그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지역주의였다.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무대를 뒤흔들면서 김영삼 사퇴를 부르짖어 끝내 유세를 포기하게 만든 청년들 가운데에는 순수하게 김대중 후보를 애타게 지지하던 ‘민주 학생’들도 있었겠지만 민정당이나 안기부에 고용된 이들도 끼어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그에 앞서서는 대구에서 김대중 강연회를 따라다니며 김대중 사퇴를 외치던 정체모를 청년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신화를 창조했던 학생운동권도 우왕좌왕이었다. 전대협은 비판적 김대중 지지 입장이었겠지만 부울총련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호남 지역 대학생들은 당연하게도 비판적 지지 아닌 전폭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노태우 후보는 간교할 만큼의 훌륭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그 틈새시장에서 대목을 보았다. 

김영삼 후보는 끝내 광주 유세를 하지 못했지만 노태우 후보는 그때 처음 본 투명방패로 날아오는 돌을 막으며 연설을 진행했다. 방패에 부딪치는 돌들과 그 안에서 의연하게(?) 연설하는 노태우 후보의 모습은 확연한 채도 대비를 보이며 사람들의 망막을 어지럽혀 놓았다. 80년대의 그 어둠을 넘어, 그 죽음의 시대를 넘어 군바리 독재정권과 싸워 온 이들에게야 그건 당연한 응징이었고, 노태우라는 광주 5적의 하나인 자가 대통령 후보에 올라 그것도 광주에 와서는 표를 주십사 연설하는 자체가 허파가 뒤집힐 일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노태우의 수난(?)이 그렇게 응당한 업보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심지어 특히 85년과 87년 군사독재를 그로기로 몰아넣는 뚝심을 발휘했던 평범한 부산 시민들에게조차 그랬다. “저리 할라모 아예 선거하지 말든가. 개헌해서 선거하자는 데 와 저라노.” 

1987년 12월 10일은 노태우 후보가 전북 군산과 전주에 오는 날이었다. 전북 민주화운동 세력들 사이에는 “동학 농민의 성지 전북에는 노태우가 발도 못붙이게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산이건 전주건 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전의를 다지고 있었는데 그 사령탑이라 할 전북대학교 총학생회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새전북신문>2006년 8월 21일자 실록 ‘전북 민주화운동사’의 내용에 따르면 그는 ‘민정당 청년 조직 책임자’였다. 그는 총학생회장 이하 간부들을 만나 “우리 쪽 대응이 이 정도이니 경거망동 말라.”면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으름장만 놓은 게 아니라 유세 현장의 경비 배치도 등까지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이게 무슨 뜻이었을까. 단지 이 정도니까 감히 어쩔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을까. 제발 와서 깽판 쳐 달라는 미끼였을까. 

12월 10일이 왔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6월항쟁 내내 ‘전리품’으로 모아 놨던 최루가스 분말이 분배됐고 철근 끝에는 폭죽이 묶였다. ‘시청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노태우 후보의 유세는 3시였다. 연단이 설치되고 연예인들이 공연을 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인파 사이로 최루가스를 슬슬 뿌리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오후 1시 50분께 전북대 의대생이 던진 사과탄이 ‘동을 떴다.’ 학생들은 거세게 연단을 향하여 돌진했고 경찰은 죽을 힘을 다해 막았다. 경찰은 물론 민정당 청년 당원들도 가세했지만 진압은커녕 최후의 마지노선 사수에 전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그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드러내는 언론 플레이를 한다. “폭력에는 절대 굽힐 수 없다는 노 후보의 의지에 따라 오후3시 50분, 4시 30분, 5시 30분 등 세 차례에 걸쳐 유세장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방송사 카메라는 이 광경을 ‘부감’으로 찍어대고 있었다. 부감이란 높은 곳에 올라가서 현장을 잡는 그림을 뜻한다. 마치 중세 시대의 전쟁이라도 벌이듯 수백 명의 시위대가 각목을 들고 경찰의 벽에 맞부딪치는 스펙타클이 펼쳐졌다. 그것은 과연 우연이기만 했을까. 이걸 지켜보던 사람들은 아연실색을 했다. 물론 부산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아 역시 호남이다! 노태우는 저렇게 해도 싸!”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노태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전두환 똘마니라고 보고 외면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분위기는 결코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었다. 

87년 12월 10일의 노태우 후보 전주 유세는 저지됐다. 전날 광주에서 충돌 끝에 유세가 강행된 것에 비춰 봤을 때, 그 시위에 참가한 이들은 나름의 긍지(?)도 가져 볼만한 사건이겠다. 대학에 와서도 전주 출신 동기들에게 “우리는 노태우 유세를 막은 데여.” 하는 자랑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위 신문에 따르면 당시의 투쟁 주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주역 유세 저지 투쟁이 정권측이 지역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함정을 판, 기획 작품이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선택은 그것뿐이었다. 열심히 싸우는 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저 말을 곱씹으면서 그 투쟁의 신심과는 별도로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의 날을 세우고 싶다. 노태우의 전주 유세 저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저 증언에서 나는 일종의 도취감을 본다, “정권측의 함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었으며, 우리는 정당했으며 심지어 우리의 투쟁은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이다. 함정을 판 사람의 의도는 차치하고, 그 함정에 빠진 후과가 무엇인지는 없는 것으로 치고, 투쟁의 의의를 공유하는, 그리고 그를 ‘속 시원하게 여기는’ 동류의 사람들의 환호에 몸을 내맡기는 코뿔소같은 습관은 그 이후로도 유구하고 엄존한다. 그 영광은 그들과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의 테두리 내에서만 빛나고 그 덩어리 안에서만 박수 받는 것이었다.

P.S. 이정희 후보가 “속을 시원하게 해 줬다”는 말 참 많이 들었다. 나도 시원하긴 했다. 그런데 그 뒤엔 겁이 나고, 짜증이 들고 걱정이 됐다. 이정희 후보와 그 캠프가 전주역의 오류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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