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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 이게 왜 흉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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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보다가 박근혜 대표의 흉탄 소리에 좀 기가 막혀서 옛 글  끌어옴. 



철저하게 고립된 광주 앞에서 신군부라는 이름의 흡혈귀가 포식을 위한 마지막 호흡을 고르고 있던 1980년 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는 삭막한 사형의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이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던" 김재규 이하 그 명령을 받아 10.26 당일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 직원들을 쏘았던 이들 모두가 전격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법원 항소 기각 3일만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사형 판결 다음날 인혁당 관련자들의 목을 매달아 버린 박정희 대통령보다 이틀 더 관대했다.

물론 그날 죽어간 사람들이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중앙정보부의 수장과 그 요원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유린하고 치켜들었던 ‘유신’의 기라졸(옛 조선 군대에서 깃발로 신호하던 졸병)이며 타도당해 마땅한 정권의 수족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철저한, 아니 무정하기까지 한 무관심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소한 그 시점의 박정희는 심신이 피폐하고 이성을 상실해가는 독재자였다. 10.26 당일 현장에서 총을 맞고 ‘각하’를 감싸기는커녕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마지막 일발을 맞고 절명했던 또 하나의 무소불위의 권력 경호실장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이 죽어도 괜찮았는데...."를 뇌까릴 때 고개를 끄덕이던 예비 살인마였다. 그리고 거사에 가담했던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자식 둔 아버지로서 도무지 못할 짓"을 해 가며 여자를 갖다 바쳐야 했던 호색한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승길을 떠나는 자리에서조차 두 명의 여인이 있었거니와, 각하의 심야 ‘행사’를 위해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채홍사’ 노릇을 해야 했다. 이쯤 되면 기쁨조의 원조는 김정일이 아니라 박정희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현역 대령이자 육사 18기의 선두 주자로 자타가 공인했던 박흥주 대령 (현역 군인이라 단심제가 적용, 일찍 총살됐다)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으로서 김재규에게 박정희를 죽인 총을 건넸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가 다시 날려보내는 위세를 부린 중앙정보부의 부장님의 최측근으로서 그는 놀랄 만큼 청빈했다고 한다. 하다못해 지역 정보부원 나부랭이도 맘만 먹으면 집 몇 채가 일도 아니던 시절, 그는 서민층들과 어울려 허름한 집에서 살았고, 그 형제들도 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형편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올 것 같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유족들에게 연금은 어떻게 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했다가 “각하를 죽인 일당한테 뭔 연금?” 이라며 퇴짜를 맞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박흥주 대령은 유서에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애들에겐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앞으로 살아갈 식구들을 위해 할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세상이 다 알게 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도와 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신군부 시절에는 그들의 유족에게 험악한 감시와 모멸의 눈길을, 그리고 그 후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민주화가 진행되고, 그 시절의 사형수가 여당의 핵심이 된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대관절 왜 그랬을까. 혹여 '국가 원수 시해'라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우리 안에 내재된 무엇인가의 발동은 아니었을까. 단지 그들이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능하다 정권의 위기를 맞아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던" 이유만으로 오늘 사라진 그들을 그렇게 완벽하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유신 시절의 ‘민주 인사’에게 누군가 김재규 이하 오늘 죽어간 사람들의 신원을 건의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어흠 그래도 대통령을 죽인 사람들인데.”

박흥주 대령의 딸들은 어느 날 집을 찾아온 카메라 앞에서 하염없이 울면서 자신들의 고사리손으로 쓴 플래카드를 내보였다.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자식 너로다.....라고 노래하듯 고지식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항소의 권리 없이 단심제로 재판은 끝났다. 박흥주 대령은 두 달 먼저 총살당했다. 그가 두 딸에게 남긴 편지를 읽다 보면 눈물이 핑 돌다가 결국은 봄날 고드름처럼 뚝뚝 떨어지고 만다.

“아빠가 없다고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전처럼 매사를 떳떳하게 지내라.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너희들은 자라는 동안 어머니와 친척 어른들의 지도를 받고 양육되겠지만 결국 너희 자신은 커서 독립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독립정신을 굳게 가져야 한다. ... 조금 더 철이 들 무렵이나 어른이 된 후에도 공연히 마음이 약해지거나 기죽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려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겠느냐. 자기 판단에 의해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게 되어 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한다

독재의 강퍅함과 비인간성은 그 자체로 해롭지만 가장 큰 악영향 중의 하나는 그 주변과 시대의 사람들을 망쳐 놓는다는 데에 있다. 멀쩡한 사람들을 바보나 악당으로 만든다거나, 독재만 아니었으면 정직하고도 모범적으로 일생을 마쳤을 사람들을 보상도 없는 역사의 희생자로 만들어 망각의 늪에 던져 버린다는 것이다. 차마 이것만큼은 감당할 수 없으며 내 가족과 내 양심에 비추어 이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람들의 명예는 지금도 생매장당한 채 바윗돌에 눌려 있다

사진은 박흥주 대령의 두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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