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0년 12월 4일 대동강 철교
도진아. 언젠가 네가 문득 한 말이 떠오르는구나. 연평도 포격 때였나. “정말 이러면 한 번 붙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분기탱천해서 한 네 말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남한이 무슨 일을 했건 북한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 행위를 하지 않은 한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은 죄악이고,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버릇을 고치는 게 맞았다고 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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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4일 대동강 철교
도진아. 언젠가 네가 문득 한 말이 떠오르는구나. 연평도 포격 때였나. “정말 이러면 한 번 붙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분기탱천해서 한 네 말에 나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남한이 무슨 일을 했건 북한 영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 행위를 하지 않은 한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것은 죄악이고, 적어도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버릇을 고치는 게 맞았다고 봐. 하지
만 그렇게 주먹을 부르쥐다가도 급브레이크를 거는 몇 개의 허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1950년 12월 4일 세상에 나왔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 함락 직전 한국군 수뇌부는 어처구니없는 한강 폭파 작전으로 한강 인도교를 날려 버린다. 적의 거침없는 진군을 막는 고육책이었다지만 고육책치고도 너무 아둔하고 성급했지. 전세가 역전됐을 때 인민군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어. 평양 쟁탈전을 벌이는 미군과 한국군이 득달같이 달려들 때에도 침착하게 미군의 선봉 부대가 거의 다리를 밟기 직전에 경의선 대동강 철교와 대동교 폭파를 실행했다. 그때 별 도하 장비가 없던 한국군 1사단이 장비 차고 넘치는미군을 제치고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게 되는데 그건 사단장 백선엽이 강의 얕은 여울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지. 약이 바싹 오른 미군 지휘관이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물었을 때 백선엽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긴 내 고향이오. 어릴 적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놀았소.”
공식적 평양 입성 기록이 10월 19일이었지. 그런데 그 좋았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해. 이미 평양 입성 만세를 부를 때 중공군들은 소리없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고 많은 병력은 이미 한반도 안에 들어와 있었거든. 멋모르고 압록강 두만강을 목표로 전진하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들에게 제대로 된 뒤통수를 맞는다.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엄숙히 얘기했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지. 그때쯤이면 새로운 전쟁은 시작이 아니라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경쟁을 벌이던 그 기세만큼이나 맹렬한 철수 작전을 벌이게 돼.
11월 26일 중공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취한다. 이미 청천강 전투에서 호되게 맛을 본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시작해. 그게 공식적으로는 12월 4일이다. 두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철교를 재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기록들은 UN군이 또 대동강 철교를 폭파했다고 얘기하고 있네. 군인들은 공병대가 건설한 부교를 건너 남쪽으로 향했지. 이미 겨울이 들이닥친 대동강물 위에 띄워진 부교를 부지런히 건너던 미군 병사들 틈에는 막스 데스퍼라는 사진 기자가 끼어 있었어. 덜덜 떨면서 갓뎀 차이니즈 하면서 투덜투덜거리면서 다리를 건너던 그는 입을 벌린 채 멈춰 서 버렸다. 그 눈 앞에는 부서진 대동강 철교가 있었고 그 부서진 쇳덩이 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대동강 철교의 젓가락처럼 부서지고 엿가락처럼 휜 교각 위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있었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다리 위에서 목숨을 건 평균대 걷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데스퍼 기자의 눈 앞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교각 위에서 비명과 함께 대동강 시퍼런 물로 떨어지고 있었어. 등짐을 지고 보따리를 이고서 애들 손까지 잡고서 사람들은 부서진 대동강 철교의 교각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누군가 미끄러져 교각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도와줄 수도 없었고 도울 사람도 없었어. 안타까이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지르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면 그를 부르는 가족들의 찢어지는 비명만 남을 뿐. 데스퍼 기자는 2차 세계대전 등 주요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지만 이런 꼴은 평생 처음이었어. 그는 미친듯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퓰리처상에 빛나는(?) 사진을 역사에 남기게 되지.
가끔 이 사진을 자세히 볼 때가 있어. 한 번 이미지 띄워 놓고 확대해서 보기 바란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읽힌다. 어떻게든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채 쪼그리고 앉아서는 무릎구름으로 걷는 사람들. 어디가 그나마 안전하고 확실한 통로인지 몰라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는 이, 뒷 사람을 돌아보며 조심하라우 말하고 있는 듯한 등짐진 남자. 덱스퍼에 따르면 교각 북쪽으로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교각이라도 타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었다고 했지.
데스퍼 기자는 얘기해. “군인들을 따라가야 했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대동강 철교 말고도 눈 속에 파묻혀 숨구멍을 내고 쌕쌕거리다가 그예 얼어죽은 아이들, 이미 숨이 끊어진 엄마의 품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발길이 떨어질 수 있었겠니. 45년 사진 기자 생활 가운데 최악의 풍경을 그는 1950년 12월 4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전쟁이란 그런 거야. 도진아. “까짓거 한 번 붙어야” 하는 게 전쟁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용기는 저런 참극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막 걷기 시작했다는 네 조카가 부서진 다리의 차가운 교각에 엄마 품 마냥 바싹 달라붙어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전쟁이고, 어제 막걸리 나누며 승리를 기원하던 아저씨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짐승같은 비명을 지르며 물 위로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킨 뒤 영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감수해야 하는 게 전쟁이야. 차라리 죽은 사람들은 끝나지만 그 풍경을 보고 당하고 겪은 사람들의 상처는 평생을 가고 후대들까지 괴롭히게 되는 거. 그게 전쟁이야.
저 대동강 철교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연평도 같은 짓을 또 한 번 벌이면 그때는 국물도 없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저 사진만 보면 생각을 정돈하게 된다. 전쟁은 없어야 해.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불행한 민간인들로서 우리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고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정치를 선택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거다.
어제 너도 본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그런 말을 했지. “퍼주기로 이뤄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북한에게 더 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성공단같은 것도 두어 개 더 만들고 금강산 관광도 민간인 피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 사과를 ‘끌어낸’ (안하겠다는 넘 하게 만드는 것도 정치다) 후 금강산 관광도 재개하고 개성도 개방하고 묘향산도 열어서 북한에게 더 많은 것을 안겨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에게 잃고 싶지 않고, 지키고 싶은 존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니. 대동강 물에 빠져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다를 것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으며, 굶어 죽어가는 식구를 지켜보며 피눈물 흘린 이들의 안중에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니.
결국 퍼주기(?)가 중단되고 ‘안보’를 신줏단지로 모시는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요즘, 내 짧은 생애에서 전쟁의 공포를 느꼈고, 느끼고 있는 것에 나는 가끔 절망한다. 또한 북쪽의 덜떨어진 정권도 자신들의 인민과 남의 국민을 상대로 치킨 게임을 종종 시도하는 것에 부아가 치민다. 그 틈바구니에서 너와 나는 선택을 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저 대동강 철교를 다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너와 내 가족이 교각 위에서 엉엉 울면서 하나님 부처님을 찾을 일이 없도록 만들 수 있는지. 북한이 서툴게 나오면 아작을 내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여기는 네 생각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꼭 이 사진을 떠올리기 바란다. 1950년 12월 4일 우리의 모습이다. 2012년 12월 4일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할까.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 함락 직전 한국군 수뇌부는 어처구니없는 한강 폭파 작전으로 한강 인도교를 날려 버린다. 적의 거침없는 진군을 막는 고육책이었다지만 고육책치고도 너무 아둔하고 성급했지. 전세가 역전됐을 때 인민군은 그 전철을 밟지 않았어. 평양 쟁탈전을 벌이는 미군과 한국군이 득달같이 달려들 때에도 침착하게 미군의 선봉 부대가 거의 다리를 밟기 직전에 경의선 대동강 철교와 대동교 폭파를 실행했다. 그때 별 도하 장비가 없던 한국군 1사단이 장비 차고 넘치는미군을 제치고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하게 되는데 그건 사단장 백선엽이 강의 얕은 여울을 잘 알았기 때문이라지. 약이 바싹 오른 미군 지휘관이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물었을 때 백선엽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긴 내 고향이오. 어릴 적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놀았소.”
공식적 평양 입성 기록이 10월 19일이었지. 그런데 그 좋았던 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해. 이미 평양 입성 만세를 부를 때 중공군들은 소리없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고 많은 병력은 이미 한반도 안에 들어와 있었거든. 멋모르고 압록강 두만강을 목표로 전진하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들에게 제대로 된 뒤통수를 맞는다. 맥아더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 엄숙히 얘기했지만 그건 틀린 얘기였지. 그때쯤이면 새로운 전쟁은 시작이 아니라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경쟁을 벌이던 그 기세만큼이나 맹렬한 철수 작전을 벌이게 돼.
11월 26일 중공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취한다. 이미 청천강 전투에서 호되게 맛을 본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시작해. 그게 공식적으로는 12월 4일이다. 두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철교를 재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기록들은 UN군이 또 대동강 철교를 폭파했다고 얘기하고 있네. 군인들은 공병대가 건설한 부교를 건너 남쪽으로 향했지. 이미 겨울이 들이닥친 대동강물 위에 띄워진 부교를 부지런히 건너던 미군 병사들 틈에는 막스 데스퍼라는 사진 기자가 끼어 있었어. 덜덜 떨면서 갓뎀 차이니즈 하면서 투덜투덜거리면서 다리를 건너던 그는 입을 벌린 채 멈춰 서 버렸다. 그 눈 앞에는 부서진 대동강 철교가 있었고 그 부서진 쇳덩이 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야.
대동강 철교의 젓가락처럼 부서지고 엿가락처럼 휜 교각 위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있었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다리 위에서 목숨을 건 평균대 걷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데스퍼 기자의 눈 앞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교각 위에서 비명과 함께 대동강 시퍼런 물로 떨어지고 있었어. 등짐을 지고 보따리를 이고서 애들 손까지 잡고서 사람들은 부서진 대동강 철교의 교각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누군가 미끄러져 교각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도 도와줄 수도 없었고 도울 사람도 없었어. 안타까이 사람 살리라는 비명을 지르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면 그를 부르는 가족들의 찢어지는 비명만 남을 뿐. 데스퍼 기자는 2차 세계대전 등 주요한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지만 이런 꼴은 평생 처음이었어. 그는 미친듯이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퓰리처상에 빛나는(?) 사진을 역사에 남기게 되지.
가끔 이 사진을 자세히 볼 때가 있어. 한 번 이미지 띄워 놓고 확대해서 보기 바란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읽힌다. 어떻게든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다리에 잔뜩 힘을 준 채 쪼그리고 앉아서는 무릎구름으로 걷는 사람들. 어디가 그나마 안전하고 확실한 통로인지 몰라 일어서서 주위를 살피는 이, 뒷 사람을 돌아보며 조심하라우 말하고 있는 듯한 등짐진 남자. 덱스퍼에 따르면 교각 북쪽으로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부서진 교각이라도 타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었다고 했지.
데스퍼 기자는 얘기해. “군인들을 따라가야 했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대동강 철교 말고도 눈 속에 파묻혀 숨구멍을 내고 쌕쌕거리다가 그예 얼어죽은 아이들, 이미 숨이 끊어진 엄마의 품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발길이 떨어질 수 있었겠니. 45년 사진 기자 생활 가운데 최악의 풍경을 그는 1950년 12월 4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전쟁이란 그런 거야. 도진아. “까짓거 한 번 붙어야” 하는 게 전쟁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 용기는 저런 참극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막 걷기 시작했다는 네 조카가 부서진 다리의 차가운 교각에 엄마 품 마냥 바싹 달라붙어서 살려 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전쟁이고, 어제 막걸리 나누며 승리를 기원하던 아저씨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짐승같은 비명을 지르며 물 위로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킨 뒤 영영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감수해야 하는 게 전쟁이야. 차라리 죽은 사람들은 끝나지만 그 풍경을 보고 당하고 겪은 사람들의 상처는 평생을 가고 후대들까지 괴롭히게 되는 거. 그게 전쟁이야.
저 대동강 철교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연평도 같은 짓을 또 한 번 벌이면 그때는 국물도 없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저 사진만 보면 생각을 정돈하게 된다. 전쟁은 없어야 해.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불행한 민간인들로서 우리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고 전쟁의 위협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정치를 선택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거다.
어제 너도 본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가 그런 말을 했지. “퍼주기로 이뤄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북한에게 더 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성공단같은 것도 두어 개 더 만들고 금강산 관광도 민간인 피살에 대한 북한의 공식 사과를 ‘끌어낸’ (안하겠다는 넘 하게 만드는 것도 정치다) 후 금강산 관광도 재개하고 개성도 개방하고 묘향산도 열어서 북한에게 더 많은 것을 안겨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에게 잃고 싶지 않고, 지키고 싶은 존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겠니. 대동강 물에 빠져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다를 것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으며, 굶어 죽어가는 식구를 지켜보며 피눈물 흘린 이들의 안중에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니.
결국 퍼주기(?)가 중단되고 ‘안보’를 신줏단지로 모시는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는 요즘, 내 짧은 생애에서 전쟁의 공포를 느꼈고, 느끼고 있는 것에 나는 가끔 절망한다. 또한 북쪽의 덜떨어진 정권도 자신들의 인민과 남의 국민을 상대로 치킨 게임을 종종 시도하는 것에 부아가 치민다. 그 틈바구니에서 너와 나는 선택을 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저 대동강 철교를 다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너와 내 가족이 교각 위에서 엉엉 울면서 하나님 부처님을 찾을 일이 없도록 만들 수 있는지. 북한이 서툴게 나오면 아작을 내도록 두들겨 패야 한다고 여기는 네 생각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꼭 이 사진을 떠올리기 바란다. 1950년 12월 4일 우리의 모습이다. 2012년 12월 4일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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