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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2.3 다대포 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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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3년 12월 3일 다대포의 두 간첩 

1983년 12월 4일 아침의 학교 교실은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그 돼지띠 해는 정말이지 시끄러운 한 해였다. 소련군에 의해 대한항공기가 격추됐고 아웅산에서는 북한이 전두환을 노린 폭탄을 터뜨려 외교 사절들이 죽었다. 그런데 12월 4일 아침이 소란했던 것은 바로 전날인 12월 3일 우리가 사는 도시에 무장공비가 침투하다가 잡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문제의 장
소는 다대포라는 곳이었다.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바로 지난 여름에 신나게 헤엄치던 곳이기도 해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생포된 간첩은 두 명. 전충남 이상규라고 하는 이름이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그들의 모습은 수없이 반복되어 방송되었고 그 생포의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식(?)은 구덕운동장 (사직 이전 부산의 최대 규모 운동장)에서 요란하게 개최E됐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보도에 따르면 해안가를 지키는 방위병들이 공비를 때려잡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아니라 공비가 올 줄 알고 해안가에는 특수부대원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고도로 훈련된 무장공비를 제압한 실력은 방위병 아닌 특수부대원들의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실 내가 봐도 우리 옆집 방위 아저씨같은 사람들이 어마무시한 특수공작원의 덮치고 팔을 비틀고 무장해제하는 전광석화를 실현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수수께끼는 20년 뒤에야 풀렸다. 

중앙일보 2003년 9월 25일자에 따르면 대한민국 공식 군인 명단에도 없는 특수부대원들 은 그 해 11월 초부터 이미 해안가로 침투하는 대상을 제압, 생포하는 훈련을 피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냄새를 없애기 위해 양치질도 하지 못했고 비누도 금지됐다. 그렇게 한달을 반복한 뒤 그들은 부산으로 향했다. 휴게실 사용이 금지된 채 갓길에 오줌 눠 가며 도착한 부산에서 그들은 임무를 하달받는다. 고정간첩과 접선하는 무장공비들을 생포하는 것. 접선장소는 다대포 해안 근처의 공중화장실이었다고 하는데 특수부대원들은 그 퀴퀴한 곳에서 숨죽여 간첩들을 기다린다. 

12월 3일 밤 10시 30분 시커먼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고 대원들은 둘을 제압하고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면 대원들 역시 죽은 목숨에 가까웠다. 인근에는 공수부대 1개 대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53사단 병사들 1개 연대가 완전무장하고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누가 공비인지 누가 특수부대원인지 모를 상황에서 생포작전이 실패했더라면 특수부대원 역시 벌집이 되어 백사장에 쓰러져 공비 일당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 중의 하나를 하는 5년 뒤에 먼발치에서나마 만났다. 전충남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문무대에 나타나 고려대 1학년생들에게 반공 강연을 했다. 문무대 입소 첫날 문무대장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개겼던 탓에 일반 교육 과정에서는 큰 물의 없이 진행하던 (마지막 날은 사단이 났지만) 중이었기에 별다른 시비 없이 강연을 끝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강연을 기억하지 못한다. 전충남이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곯아 떨어져서 강연 후 의례적으로 쳐 주는 박수 소리에 깨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앞서 문무대에 들어갔던 모학교 1학년들은 더 과격했던 모양이다. 전충남이 강연할 때 약간의 소요가 있었던 것이다. “저 새끼 어용이다!!!”고 누군가 고함을 지르고 야유도 터져 나와서 그렇게 순탄하게 강연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 모 학교 1학년생 중의 한 명이었던 사촌형의 전언에 따르면 강연 후 전충남과 조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충남은 슬픈 얼굴로 이 한 마디를 했다고 한다. “학생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말임다.” 

사실 그도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그라서 남쪽으로 오고 싶어 왔을 것이며 완전히 노출된 허당 작전의 희생양이 되어 ‘적’에게 체포되어 또 다른 인생을 억지로라도 살아내야 했던 그 젊음은 또 얼마나 고역이었을 것인가. 북에 남아 있을 그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반공 강연을 하고 다니는 그는 북에 남은 가족들의 얼굴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을 것인가. 그런데 그를 체포했던 특수부대원들은 북파부대원들이었다. 즉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군인도 아니었고 다대포 작전 이전 “죽어도 좋다.”는 서약서를 쓰고 왔다고 한다. 그들의 선배들은 또 얼마나 북한의 해안가나 산간 지역에서 맞아 죽거나 체포되어 수령님의 품에 안겨야 했을까. 

견고하게 움직이지 않는 박근혜 후보의 표를 보면 6.25의 3년과 그 이후 남북 공히 수십 년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의 목을 따 오기도 하고 수틀리면 특수부대원을 침투시켜 쑥밭을 만드는 일을 다반사로 했던 한랭한 역사의 지울 수 없는 자식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70년대만 해도 북한 공작원 단 3명이 충청도 해안으로 상륙하여 20만 명의 군 포위망을 뚫고 신출귀몰하다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부르면서 휴전선을 넘어간 일을 비롯해서 북한 공작원들이 출현하여 민간인들을 습격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등산하다가 약초 캐다가 휴가 신고 가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그렇게 특이하지는 않은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다대포 간첩 사건 당시 아버지는 생애 가장 무서웠던 순간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언젠가 홀로 등산 후 하산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산간 마을에 들어왔는데 그 산간 마을이 몽땅 소개된 상태였다. 즉 북한 공작원들이 나타나 비상이 걸린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산골 지서의 순경을 만나기까지 수십 분..... 아버지는 공포로 미칠 것 같아서 나는 듯이 뛰었고 나중에는 무서워서 눈물이 다 나오더라고 했다. 

공포의 세월은 참 길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숨막히는 긴급조치에 대한 또 다른 색깔의 공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문신처럼 새겨지던 세월이 있었다. 그 세월이 뭉치고 이겨져서 만들어낸 시멘트들은 참 징그럽게도 거대하게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문제는 그 시멘트들이 공포를 줄이고 없애는 성벽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되레 공포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멘트를 뚫어낼 무기는 무엇일까. 참 감이 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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