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 쿠바 상륙
스페인에서 쿠바로 온 이주민이었던 앙헬 카스트로는 풍족한 지주는 못되었지만 그런대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부였다. 이 앙헬 카스트로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스페인 남자였던 모양이다.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결혼 생활 중 가정부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였으니까. 그는 이 바람기로 인해 20세기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을 세상에 내놓는 행운(불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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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 쿠바 상륙
스페인에서 쿠바로 온 이주민이었던 앙헬 카스트로는 풍족한 지주는 못되었지만 그런대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농부였다. 이 앙헬 카스트로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스페인 남자였던 모양이다.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결혼 생활 중 가정부와 정분이 나서 낳은 아이였으니까. 그는 이 바람기로 인해 20세기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을 세상에 내놓는 행운(불운
?)아가 된다. 그 5명의 사생아 가운데 둘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막내의 이름은 라울. 지금 세계 최장수 국방장관 (근 50년째!)인 바로 그다.
언젠가 80을 훌쩍 넘은 피델 카스트로가 한국과 일본의 WBC 야구 결승전을 보면서 봉중근이 일본에 노출된 것을 한국의 패인으로 지적하면서도 그 경기 내용에 경탄을 금치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실력도 꽤 괜찮아서 뉴욕 양키즈에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었다고 하는데 그를 불합격시켜버린 뉴욕 양키즈로서는 두고두고 미국 턱 밑의 종기가 될 위인 하나를 낫질할 기회를 박찬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가 됐고 쿠바를 숫제 자신의 영토로 치부하는 미국과 그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는 혁명 투사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천재적이거나 레닌처럼 치밀한 사람이 못되었다. 야구로 치면 그는 일단 휘두르고 보는 타자였고 번트 따위는 댈 생각 없이 치고 달리는 히트 앤드 런 신봉자였다.
1953년 7월 26일 소규모 군중을 이끌고 대담하게도 몬카다의 정부군 병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투수 류현진의 공을 레프트 담장으로 넘기겠다고 배트를 휘두르는 리틀 야구 선수 같았다. 당연히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 쿠바의 소농 85퍼센트는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늘 계약 해지를 통고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비옥한 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의 손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오리엔테 지방에서도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해안가 토지 대부분은 미국 과일회사와 서인도제도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부조리합니다.(…)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유명한 열변으로 이 혁명의 리틀 야구 선수는 일약 혁명 야구팀의 유망주로 부상한다. 15년 징역을 선고받지만 그나마 여론의 압력으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절치부심 새로운 기회를 노린다. 그는 멕시코에서 그의 강력하지만 컨트롤 안되는 강속구를 받아 줄 멋진 배터리를 만난다. 바로 체 게바라가 그였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피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체 게바라)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 동료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부터 맹훈련을 받으며 혁명의 구질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1956년 11월 멕시코의 한 해변으로부터 그란마 호라는 오래된 배에 오른다. 정원이 20명이 될까말까한 배에 82명이 올라탔고 FBI와 멕시코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장 불편한 항로를 택한 이 신흥 혁명 야구단은 일주일이 넘는 항해 동안 거의 초주검이 된다. 그들의 배 ‘할머니’ (그란마)는 쿠바 땅을 눈앞에 둔 산호초 지역에서 좌초하고 말았고 이 풋내기 혁명 야구단은 일동 입수하여 헤엄을 죽을 듯이 쳐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이었다.
허구헌날 삼진 아웃을 당하고 알이나 까던 혁명 야구단이 마침내 1루 베이스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시원한 안타를 친 것이 아니라 내야 안타를 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서 겨우 이뤄낸 세이프였고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거기에 이 풋내기들의 1루 진루를 허용하여 노히트 노런을 놓친 상대팀 에이스들과 타자들은 그야말로 맹렬한 공격을 가해 왔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톡톡히 재미를 봤던 네이팜탄을 뿌려 대는 전폭기들이 일어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혁명군들을 폭격해 왔던 것이다. 죽음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고, 실제로 죽을 고비 넘기며 카리브 해를 헤쳐 온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결국 남은 것은 스무 명 뿐이었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병력은 3만. 이쪽은 스무 명. 아마튜어 야구같으면 콜드 게임이 나도 여러 번 날 스코어였지만 혁명 야구단은 왜소하긴 해도 프로였다. 1956년 12월 2일 1루 베이스를 밟고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 이래 카스트로와 게바라 원투 펀치를 지닌 쿠바 혁명 야구단은 바티스타 측의 살벌한 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며 그 실력을 불려 나갔고 마침내 미국팀의 쿠바 용병 바티스타를 두들겨 강판시킨다. 쿠바 혁명이었다. 그 뒤 미국이 직접 나서서 이 버릇장머리없는 쿠바 혁명 야구단에게 빈볼부터 싱커까지 별별 공을 다 던졌지만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쿠바가 행복해졌느냐?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옆 나라 아이티를 보라는 것이다. 혁명이 없었다면 쿠바의 바티스타는 수십 년 정권을 누리다가 자식에게나 넘겨주면서 그 배를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불렸을 것이 뻔하고, 그럴 때 쿠바의 형편이 진흙 과자로 배를 채우는 아이티 사람들과 크게 차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6년 12월 2일 낡아빠진 배를 타고 한 나라를 전복시키려고 온 80여 명의 남자들, 산호초에 걸린 배를 버리고 장비 짊어진 채 수 킬로미터를 수영하여 그 땅을 밟은 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그 이념의 정체를 떠나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역사에는 수많은 기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이들이 이룬 기적은 그 기적의 랭킹 순위에서 절대로 다섯 손가락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80을 훌쩍 넘은 피델 카스트로가 한국과 일본의 WBC 야구 결승전을 보면서 봉중근이 일본에 노출된 것을 한국의 패인으로 지적하면서도 그 경기 내용에 경탄을 금치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는 젊어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실력도 꽤 괜찮아서 뉴욕 양키즈에 입단 테스트까지 받았었다고 하는데 그를 불합격시켜버린 뉴욕 양키즈로서는 두고두고 미국 턱 밑의 종기가 될 위인 하나를 낫질할 기회를 박찬 것이라 하겠다. 어쨌든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가 됐고 쿠바를 숫제 자신의 영토로 치부하는 미국과 그 앞잡이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는 혁명 투사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천재적이거나 레닌처럼 치밀한 사람이 못되었다. 야구로 치면 그는 일단 휘두르고 보는 타자였고 번트 따위는 댈 생각 없이 치고 달리는 히트 앤드 런 신봉자였다.
1953년 7월 26일 소규모 군중을 이끌고 대담하게도 몬카다의 정부군 병영을 공격하는 모습은 가히 투수 류현진의 공을 레프트 담장으로 넘기겠다고 배트를 휘두르는 리틀 야구 선수 같았다. 당연히 곡소리 나게 두들겨 맞고 체포된 그는 재판정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 쿠바의 소농 85퍼센트는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고 늘 계약 해지를 통고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가장 비옥한 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의 손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오리엔테 지방에서도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해안가 토지 대부분은 미국 과일회사와 서인도제도의 소유로 돼 있습니다. 모든 것은 부조리합니다.(…)
저는 동료들 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야비한 독재자의 광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감옥 역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할 것입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이 유명한 열변으로 이 혁명의 리틀 야구 선수는 일약 혁명 야구팀의 유망주로 부상한다. 15년 징역을 선고받지만 그나마 여론의 압력으로 풀려난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절치부심 새로운 기회를 노린다. 그는 멕시코에서 그의 강력하지만 컨트롤 안되는 강속구를 받아 줄 멋진 배터리를 만난다. 바로 체 게바라가 그였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피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체 게바라)
게바라와 카스트로와 그의 혁명 동료들은 스페인 외인부대 출신의 베테랑으로부터 맹훈련을 받으며 혁명의 구질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1956년 11월 멕시코의 한 해변으로부터 그란마 호라는 오래된 배에 오른다. 정원이 20명이 될까말까한 배에 82명이 올라탔고 FBI와 멕시코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장 불편한 항로를 택한 이 신흥 혁명 야구단은 일주일이 넘는 항해 동안 거의 초주검이 된다. 그들의 배 ‘할머니’ (그란마)는 쿠바 땅을 눈앞에 둔 산호초 지역에서 좌초하고 말았고 이 풋내기 혁명 야구단은 일동 입수하여 헤엄을 죽을 듯이 쳐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이었다.
허구헌날 삼진 아웃을 당하고 알이나 까던 혁명 야구단이 마침내 1루 베이스를 밟은 것이다. 그러나 시원한 안타를 친 것이 아니라 내야 안타를 치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서 겨우 이뤄낸 세이프였고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거기에 이 풋내기들의 1루 진루를 허용하여 노히트 노런을 놓친 상대팀 에이스들과 타자들은 그야말로 맹렬한 공격을 가해 왔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톡톡히 재미를 봤던 네이팜탄을 뿌려 대는 전폭기들이 일어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혁명군들을 폭격해 왔던 것이다. 죽음도 함께 하겠다고 맹세했고, 실제로 죽을 고비 넘기며 카리브 해를 헤쳐 온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 결국 남은 것은 스무 명 뿐이었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병력은 3만. 이쪽은 스무 명. 아마튜어 야구같으면 콜드 게임이 나도 여러 번 날 스코어였지만 혁명 야구단은 왜소하긴 해도 프로였다. 1956년 12월 2일 1루 베이스를 밟고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 이래 카스트로와 게바라 원투 펀치를 지닌 쿠바 혁명 야구단은 바티스타 측의 살벌한 공세를 끝끝내 막아내며 그 실력을 불려 나갔고 마침내 미국팀의 쿠바 용병 바티스타를 두들겨 강판시킨다. 쿠바 혁명이었다. 그 뒤 미국이 직접 나서서 이 버릇장머리없는 쿠바 혁명 야구단에게 빈볼부터 싱커까지 별별 공을 다 던졌지만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쿠바가 행복해졌느냐?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옆 나라 아이티를 보라는 것이다. 혁명이 없었다면 쿠바의 바티스타는 수십 년 정권을 누리다가 자식에게나 넘겨주면서 그 배를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불렸을 것이 뻔하고, 그럴 때 쿠바의 형편이 진흙 과자로 배를 채우는 아이티 사람들과 크게 차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56년 12월 2일 낡아빠진 배를 타고 한 나라를 전복시키려고 온 80여 명의 남자들, 산호초에 걸린 배를 버리고 장비 짊어진 채 수 킬로미터를 수영하여 그 땅을 밟은 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그 이념의 정체를 떠나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역사에는 수많은 기적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이들이 이룬 기적은 그 기적의 랭킹 순위에서 절대로 다섯 손가락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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