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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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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1.25 아암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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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5년 11월 25일 아암도의 비극 

서울 와서 약간 웃겼던 것 중의 하나는 서울 사람들의 바다에 대한 로망이었다. 부산에서 왔다고 하니 해운대가 부산을 빙 둘러 있는 거 아니냐면서 천국에서라도 온 듯한 눈길을 보내는 데에는 아주 질렸거니와 실연을 당하거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으면 거의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바다 보고 올께.”라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바다는 백발백중 동해 바다였다. 아니
 바다 볼 거면 전철 타고 인천 가면 되지 뭐하러 고생스럽게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그 먼데를 가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면 “인천 앞바다가 바다냐?” 하는 퉁명스런 답이 돌아왔었다. 

사실 동해와 서해는 그 느낌이 다르다. 하루 종일 푸른 파도가 철썩거리는 동해와 달리 간만차가 세계적이어서 모세의 기적(?)이 하루에 두 번씩 벌어지는 서해는 뭔가 갑갑하고 바다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간만의 차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명소도 있었다. 아암도라는 작은 섬이 그곳이다. 송도 앞바다 앞에 있는 그야말로 작은 섬이었던 이 섬과 송도 유원지 후문은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좁은 돌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다 위를 걸어 아암도로 갔고 데이트를 즐겼다. 물이 들어올 때를 맞춰 일부러 여자친구를 이끌고 섬으로 들어갔던 괘씸한(?) 청춘들도 많았다. 

이 아암도는 곧 섬 팔자를 벗어나게 된다. 송도유원지 유수면 매립공사가 시작되고 무수한 흙더미가 아암도는 육지와 몸을 맞닿게 된 것이다. 인천시는 이 지역에 ‘와이키키’같은 해변을 만들겠노라며 기염을 토하지만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퍼다 부은 모래는 쓸려 나갔고 ‘와이키키’의 꿈은 예산만 와장창 퍼부은 채 허사로 돌아갔다. 그래도 아암도에는 해안도로가 깔렸고 그 인근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고 당연히 노점상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그 가운데에는 가난한 장애인으로 자라나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는 강해져야 한다.”고 일기장에 쓰던 젊은이도 있었다. 이름은 이덕인. 

아암도의 노점상들은 이중으로 시달렸다. 툭하면 망치 들고 쳐들어오는 관청 사람들도 그랬지만 꼴망파라고 불리우는 조폭들도 그 문신 치렁치렁한 몸들을 들이밀었다. 그럴 때마다 가장 악착같이 싸운 사람이 이덕인이었다. “버티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던 청년답게 조폭들이 혀를 내두를만큼 지독하게 싸우면서 자신과 동료들을 지켰다. 하지만 조폭보다 더 무서운 관의 철거가 다가왔다. 대대적인 철거가 예고되면서 노점상들은 아암도에 ‘골리앗’을 세우기로 한다. 5년 전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갔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외로운 늑대들’처럼, 13년 뒤의 용산 지구 철거 현장의 호프집 주인을 비롯한 시민들처럼 고공농성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이 고공 농성에 이덕인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안가고 사람들 왕래도 많지 않아서 선전 효과가 있으려나.....” 

하지만 이덕인과 노점상들은 망루로 올라갔다.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바람은 날로 차가와지고 위에 오른 사람들의 몸에 한기가 들이칠대로 들이칠 무렵, 11월 24일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마치 날이 추워지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물대포가 망루를 직격했다. 흠뻑 젖은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며 경찰에 맞섰고 경찰은 공성전의 정석대로 식량과 의약품의 보급을 차단했다. 망루 위에는 당뇨병 환자도 있었는데 경찰이 약조차 허락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소변을 마셔야 했다. “죽을 거 같으면 내려오겠지.”가 고전적인 경찰의 전략. 지쳐가는 사람들 앞에서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덕인은 “늙은 노점상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며 사기를 북돋웠다. 철거반들이 빨간 츄리닝 내려오면 죽인다고 살기등등할 정도였다.

1995년 11월 25일이 왔다. 몇 번의 보급품 전달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뒤 이덕인은 최악으로 고립된 현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한 명의 동료와 함께 골리앗을 내려와 포위망을 뚫을 시도를 한다. 살금살금 골리앗을 내려와 까치발을 걷던 둘을 경찰이 발견했고 동료 1명은 허겁지겁 다시 망루로 기어 올라왔지만 이덕인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11월 25일 밤이었다. 그로부터 3일 뒤 28일 오전 망루 위에 서 있던 농성자 한 사람은 뭔가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군가 해변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농성자들은 경찰에 소리쳐 사실을 알렸고 곧 그가 누구인지 밝혀진다. 이덕인이었다. 

이덕인은 손목과 양팔을 함께 묶는 형태로 느슨하게 포박되어 있었고 곳곳에 피멍과 타박상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았는지 그 눈은 무섭게 부릅뜨고 있었다. 포위망을 뚫으려고 망루를 내려온 사람이 포박된 채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그 범인이야 삼척동자도 알만했지만 그 유력한 용의자는 또 한 번의 무리수를 저지른다. 경찰 1500명이 투입되어 시신을 지키던 동료와 학생들을 짓밟은 후 시신을 빼돌리고 부검을 한 후 그를 죽인 범인이 ‘물’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썰물이었던지라 수심 50센티미터 정도였는데 그런 접시물에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포박에 대해서는 뭐라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연히 바닷물에 떠다니던 밧줄이 또 한 번 우연히 그 손목에 감겼던 것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들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싶을까. 빠져나갈 수 없는 독에 스스로를 던지는 행위를 누군들 하고 싶을까. 하지만 90년 울산의 골리앗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도무지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고공 위에서 독 안의 쥐가 되어 수십 일을 버티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다가 시커멓게 탄 주검이 되기도 했고 스스로 목을 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결사적인 농성으로 호소하고자 했던 대상들은 그들의 ‘찍찍거림’을 무시했고 “죽을 것 같으면 내려오겠지.”를 고수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고공에 오른 이들의 주장에도 일부 억지가 있을 수 있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을 내던지고 스스로의 목을 죄면서 내지르는 절규에 무심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당뇨병 환자에게 자기 오줌을 마시게 하고 이 엄동설한에 텐트조차 치는 것을 막는 이들이라면 그들은 백만 배의 억지를 부리고 있으며 인간으로서 용납하기 힘든 죄를 짓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뭐라든 “알 바냐?”라고 내 살길 바쁜 나도 유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고. 1995년 11월 25일 어둠을 뚫고 포위망을 벗어나려다가 ‘물에 빠져’ 갑자기 흘러온 밧줄에 포박당한 채 죽어갔던 한 청년 장애인은 오늘을 지켜보면서 어떤 마음이 될까. 

이 포스팅은 최인기가 쓴 <핏빛 가득한 아암도>에서 상당 부분 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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