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과 고영근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정의와 불의를 따지기는 어렵다. 유일한 판가름 방법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권리와 인식의 확장을 향한 움직임은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겠지만 사실 자유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마저 떨떠름해진다. 1903년 11월 24일 현해탄 건거 운명적으로 마주친 두 한국인 우범선과 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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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1월 24일 우범선과 고영근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정의와 불의를 따지기는 어렵다. 유일한 판가름 방법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권리와 인식의 확장을 향한 움직임은 긍정적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이겠지만 사실 자유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그마저 떨떠름해진다. 1903년 11월 24일 현해탄 건거 운명적으로 마주친 두 한국인 우범선과 고영근
을 놓고 어느 쪽이 정의의 편이었는가를 생각하다보면 그 알쏭달쏭의 도가 더욱 심해진다.
우선 우범선이라는 인물부터. 그는 대대로 무인의 집안이었던 집에서 태어났다. 1857년생으로서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던 1876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구닥다리 무예를 넘어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김옥균 등과도 교유하며 개화 사상을 키워 갔고 구식 군대 아닌 별기군의 참령으로 근무했다. 신문물에 목말랐던 청년 장교는 일본으로의 밀항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후일 체포됐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난국을 헤치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야 그렇다고 치고 거의 유일한 이웃으로서 전쟁도 치르고 교류도 하던 나라가 별안간 왜상투 깎고 훈도시 벗고 게다 벗어던지고 말쑥한 양복에 서양 군대 부럽지 않은 무력까지 쥐고 조선을 넘나들었으니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던 것은 우범선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똑똑한 김옥균도 일본에만 목을 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본에 기댔다고 해서 그들이 ‘친일파’로 매도될 처지는 아니었다. 우범선 역시 그랬다. 그는 우직한 무인이었고 자신이 충성을 다하는 나라가 개화한 문명국이 되길 바랬다.
그런 그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민씨 왕비였다. 우범선이 보기에 왕비는 표독하기로는 (드라마상의) 장희빈 같았고 정치력(주로 민씨 가문을 위한)은 원정왕후 (태종의 비)처럼 능란했으며 재물욕은 중종비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에 비할만했다. 무당에게 군 칭호를 내리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거금을 올려놓고 세자의 건강을 축원하는 것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임오군란 때 죽을 뻔하다가 돌아와서는 그 행태가 더욱 자심했다. 갑신정변을 청나라를 끌어들여 짓밟았고, 결국은 청일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불씨를 당겼으며 그 척족들의 세도는 온 나라를 피멍들게 했다. 우범선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개 무부요. 하지만 그 일파를 물리치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오.” 문제는 그 얘기를 한 상대가 일본 공사 미우라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야욕과 자신의 충심이 버무려진 어느 날 밤, 그는 경복궁을 범하는 조선인이 된다. 그리고 민비의 죽음을 확인한 이, 불에 탄 유해를 땅에 묻어버린 이가 바로 이 우범선이라고 전해진다.
을미개혁 특히 단발령은 많은 이들을 격동시켰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왕비였지만 그래도 국모였다.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의병들이 들끓었고 허약한 정권이 휘청거리는 와중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버린다. 우범선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총리대신 김홍지처럼 맞아죽거나 인천으로 튀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우범선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객으로 지낸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나 한 한국인 망명객이 그를 초대한다. 이름은 고영근. 원래 민씨 척족과 친밀한 관계였고 그 덕에 경상좌병사로 출세한 경력이 있는 이였다. 독립협회에 맞서 황국협회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지만 황국협회가 폭력을 휘두르자 이에 실망하여 되레 관복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 주최의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한 특이한 열혈 애국자였다. 특히 1899년에는 부패한 관료들의 집에 폭약을 터뜨리려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한다.
슬픈 것은 이 고영근과 우범선의 애국의 방법이 매우 달랐다는 데에 있다. 민비 시해범이라 할 우범선이 일본에 있음을 안 고영근은 그를 구슬러 초청한 다음 칼로 목을 찌르고 쇠망치를 내리쳐 머리를 터뜨려 죽여 버렸다. 그는 한국 대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호 통재라, 을미사변 때 우범선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우는 극역대악으로 천하의 공분을 샀도다. 대한의 신하 된 몸으로, 하늘을 같이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위에 아뢰고 아래에 알린다.” 그에게 충성의 대상은 나라와 임금이었다.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국모를 시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였고, 그는 재판정에서도 그를 당당히 밝힌다.
고종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일본 공사에게 가벼운 처벌을 청했고 일본 공사 역시 이를 즉시 정부에 알려 이를 외교적 카드로 사용하도록 한다. 러일전쟁에서의 한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살던 중 귀국했으나 이미 그가 충성했던 임금은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고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래도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홍릉에 그 유택이 마련되었을 때, 고영근은 능참봉으로서 또 하나의 일을 벌인다. 식민지 조선의 군주는 ‘이왕’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즉 황제라던가 등등의 존호를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늙은 능참봉 고영근은 임의로 ‘고종 태황제’를 새겨 넣어 버렸다. 조선 총독부의 낯빛이 변했고 비를 다시 눕혀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고영근은 쇠고집을 부리며 버틴다. 결국은 고영근이 이기지만 고영근은 능참봉에서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영근은 홍릉 근처에 오막살이를 짓고 거기서 여생을 고종의 능을 지키며 보냈다.
참으로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 “군부대신이 일일이 일을 물어 처결했을”만큼 영특하고 빼어난 군 장교였던 우범선. 정부 관리로 백성들의 집회를 막아야 할 입장이었으면서도 황국협회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관복을 집어던지고 만민공동회를 주재했던 열혈관료 고영근. 그들의 의기와 꿈은 외세의 소용돌이,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침몰 속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뛰어난 인재이며 나라에 대한 사랑 또한 그리 차이나지 않았을 두 사람이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동안 대한제국은 멸망으로 치달았다. 둘 중 누가 애국자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무망한 일이고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때론 슬프다. 그들은 왜 서로 죽고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우선 우범선이라는 인물부터. 그는 대대로 무인의 집안이었던 집에서 태어났다. 1857년생으로서 나라의 문호가 개방되던 1876년 무과에 급제한 그는 구닥다리 무예를 넘어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김옥균 등과도 교유하며 개화 사상을 키워 갔고 구식 군대 아닌 별기군의 참령으로 근무했다. 신문물에 목말랐던 청년 장교는 일본으로의 밀항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후일 체포됐을 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난국을 헤치자면 일본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 사정을 알려고 간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의 모델일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야 그렇다고 치고 거의 유일한 이웃으로서 전쟁도 치르고 교류도 하던 나라가 별안간 왜상투 깎고 훈도시 벗고 게다 벗어던지고 말쑥한 양복에 서양 군대 부럽지 않은 무력까지 쥐고 조선을 넘나들었으니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던 것은 우범선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똑똑한 김옥균도 일본에만 목을 매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본에 기댔다고 해서 그들이 ‘친일파’로 매도될 처지는 아니었다. 우범선 역시 그랬다. 그는 우직한 무인이었고 자신이 충성을 다하는 나라가 개화한 문명국이 되길 바랬다.
그런 그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민씨 왕비였다. 우범선이 보기에 왕비는 표독하기로는 (드라마상의) 장희빈 같았고 정치력(주로 민씨 가문을 위한)은 원정왕후 (태종의 비)처럼 능란했으며 재물욕은 중종비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에 비할만했다. 무당에게 군 칭호를 내리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거금을 올려놓고 세자의 건강을 축원하는 것까지는 봐줄만 했는데 임오군란 때 죽을 뻔하다가 돌아와서는 그 행태가 더욱 자심했다. 갑신정변을 청나라를 끌어들여 짓밟았고, 결국은 청일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불씨를 당겼으며 그 척족들의 세도는 온 나라를 피멍들게 했다. 우범선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일개 무부요. 하지만 그 일파를 물리치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오.” 문제는 그 얘기를 한 상대가 일본 공사 미우라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야욕과 자신의 충심이 버무려진 어느 날 밤, 그는 경복궁을 범하는 조선인이 된다. 그리고 민비의 죽음을 확인한 이, 불에 탄 유해를 땅에 묻어버린 이가 바로 이 우범선이라고 전해진다.
을미개혁 특히 단발령은 많은 이들을 격동시켰다. 증오의 대상이었던 왕비였지만 그래도 국모였다.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를 하자는 의병들이 들끓었고 허약한 정권이 휘청거리는 와중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버린다. 우범선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총리대신 김홍지처럼 맞아죽거나 인천으로 튀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우범선은 후자를 택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객으로 지낸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나 한 한국인 망명객이 그를 초대한다. 이름은 고영근. 원래 민씨 척족과 친밀한 관계였고 그 덕에 경상좌병사로 출세한 경력이 있는 이였다. 독립협회에 맞서 황국협회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지만 황국협회가 폭력을 휘두르자 이에 실망하여 되레 관복을 벗어던지고 독립협회 주최의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한 특이한 열혈 애국자였다. 특히 1899년에는 부패한 관료들의 집에 폭약을 터뜨리려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망명한다.
슬픈 것은 이 고영근과 우범선의 애국의 방법이 매우 달랐다는 데에 있다. 민비 시해범이라 할 우범선이 일본에 있음을 안 고영근은 그를 구슬러 초청한 다음 칼로 목을 찌르고 쇠망치를 내리쳐 머리를 터뜨려 죽여 버렸다. 그는 한국 대신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호 통재라, 을미사변 때 우범선은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사체를 태우는 극역대악으로 천하의 공분을 샀도다. 대한의 신하 된 몸으로, 하늘을 같이할 수 없어 오늘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서 원수를 갚음을 위에 아뢰고 아래에 알린다.” 그에게 충성의 대상은 나라와 임금이었다.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국모를 시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중죄였고, 그는 재판정에서도 그를 당당히 밝힌다.
고종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일본 공사에게 가벼운 처벌을 청했고 일본 공사 역시 이를 즉시 정부에 알려 이를 외교적 카드로 사용하도록 한다. 러일전쟁에서의 한국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살던 중 귀국했으나 이미 그가 충성했던 임금은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고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래도 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홍릉에 그 유택이 마련되었을 때, 고영근은 능참봉으로서 또 하나의 일을 벌인다. 식민지 조선의 군주는 ‘이왕’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즉 황제라던가 등등의 존호를 붙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늙은 능참봉 고영근은 임의로 ‘고종 태황제’를 새겨 넣어 버렸다. 조선 총독부의 낯빛이 변했고 비를 다시 눕혀 버리라고 강요하지만 고영근은 쇠고집을 부리며 버틴다. 결국은 고영근이 이기지만 고영근은 능참봉에서 해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영근은 홍릉 근처에 오막살이를 짓고 거기서 여생을 고종의 능을 지키며 보냈다.
참으로 열정적이었던 두 사람, “군부대신이 일일이 일을 물어 처결했을”만큼 영특하고 빼어난 군 장교였던 우범선. 정부 관리로 백성들의 집회를 막아야 할 입장이었으면서도 황국협회의 폭력적인 진압에 분노하여 관복을 집어던지고 만민공동회를 주재했던 열혈관료 고영근. 그들의 의기와 꿈은 외세의 소용돌이, 그리고 내부로부터의 침몰 속에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뛰어난 인재이며 나라에 대한 사랑 또한 그리 차이나지 않았을 두 사람이 원수가 되어 죽고 죽이는 동안 대한제국은 멸망으로 치달았다. 둘 중 누가 애국자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무망한 일이고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때론 슬프다. 그들은 왜 서로 죽고 죽일 수 밖에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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