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의 시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멕시코에는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 출몰했던 선글라스 낀 ‘불행한 장군’ 과 매우 닮은 꼴인 대통령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아스. 그는 1877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 30여 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일찍이 독재자 산타 아나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게릴라의 일원이기도 했던 디아스는 멕시코를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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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의 시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멕시코에는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 출몰했던 선글라스 낀 ‘불행한 장군’ 과 매우 닮은 꼴인 대통령 하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아스. 그는 1877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고 30여 년 동안 장기집권했다. 일찍이 독재자 산타 아나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게릴라의 일원이기도 했던 디아스는 멕시코를 바꿔
놓은 동시에 정체시켰다. “조국근대화를 강조하는 디아스의 30년 통치 기간 중 전국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깔리고, 금은의 생산이 급증하고, 석유가 개발되었으며, 해외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국가 경제의 핵심인 제조업과 무역 부문이 급성장했으며, 무엇보다도 정치적 안정이 주어졌다.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은 전설적인데, 독립 이후 디아스의 취임 전까지 55년 동안 36명이 통치하면서 무려 75회의 대통령직 교체가 발생했었다.” (백종훈 칼럼,멕시코 혁명의 빛과 그림자http://jgback.gnu.kr/ )
그러나 디아스의 통치는 “혜택을 누리는 극소수에게 천국이었지만 토지를 빼앗긴 다수 국민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디아스라는 빽을 둔 대농장들과 외세의 자본은 해마다 풍년가와 해피송을 불렀지만 멕시코의 대다수 민중들은 죽도록 일해야 할 뿐이었다. 디아스라는 돌이 내리누르던 멕시코라는 솥단지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마침내 그 뚜껑이 펑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날이 왔다. 1910년 11월 20일.
박정희 대통령도 유신 말미에는 몇 년 뒤엔 물러나서 영남대학 총장이나 할까보다 운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이 디아스도 그랬다. 1908년 미국의 한 언론에 “이제 멕시코는 민주주의할 때가 됐다.”고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언명했던 것이다. 드디어 디아스 시대가 끝나는구나! 정치적 열기가 들끓고 새로운 희망들의 그림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디아스는 또 박정희처럼 마음을 바꾼다. “나 아니면 안돼!” 그리고 1910년의 재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그에게 결연히 맞선 이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해외유학생 출신의 프란시스코 마데로였다. 그는 “재선반대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하고 재선 반대와 실질적인 참정권의 확립을 외친다. 그런데 디아스는 역시 박정희와 비슷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데로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다. 그 뒤 가석방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지만 탈출하여 “산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발표한다.
“자유와 정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민중들,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요구할 역사적 순간 앞으로 끌려나왔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에서 그는 외세의 배제, 농지 개혁, 노동조건 개선을 소리 높여 주장한 마데로는 멕시코 인들에게 봉기의 날을 공표한다. 1910년 11월 20일 .
1910년 11월 20일 리오그란데에서 치아파스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북쪽의 농민군 지도자 판초 비야, 남쪽의 농민혁명군 수장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만데로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어났고 기타 지역에서도 소작민들의 봉기가 잇달아 디아스 정부군을 무찔렀다. 특히 1911년 5월 판초 비야의 농민군은 미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후아레스 전투에서 정부군에 완승을 거둬 디아스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결국 디아스는 30년 정권에서 손을 떼고 망명길에 오르고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 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개혁 앞에 우유부단했고 그가 외친 구호들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달팽이처럼 행동했다. 토지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사파타는 마데로를 떠났고 반혁명 세력은 그를 고립시켰다. 미국 대사 헨리 윌슨도 끈질기게 그 행로에 간섭하여 마데로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다. 마데로는 멕시코 사람들을 깨우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왜 자신이 그들을 깨웠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자멸해 갔다. 그는 반혁명 반란군과 내통한 자신의 국방부 장관에게 암살된다.
판초 비야는 마데로에게 감화받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의용군은 디아스 퇴출의 결정적 공헌을 했다. 마데로는 그에게 보답하고자 그와 그 의용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키지만 정규군과의 갈등에 휘말려 마데로의 국방 장관 (마데로를 죽이는 바로 그)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데로가 죽은 뒤 그는 다시 의용군을 일으켜 멕시코 북부를 휩쓸고 다녔고 미국의 반혁명 세력 지원을 못마땅히 여겨 미국까지 공격한다. 후일 미국의 미사일 이름이 되는 퍼싱 장군은 이때 판초 비야를 잡겠다고 1만 대군을 몰고 헉헉거렸지만 판초 비야는 유유히 빠져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판초 비야는 멕시코인의 손에 암살당한다. 마데로의 우유부단함을 통탄하며 떠났던 에밀리아노 사파타도 반혁명 세력의 손에 암살당한다.
그들 뿐이 아니다. 1910년 11월 20일 이 이상의 압제와 불평등, 말이 안되는 착취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일어선 멕시코 민중들은 1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고, 마데로가 바꾸자고 외쳤던 토지 제도는 한 세기가 흘러도 별 변화없이 멕시코 인민들을 옥죄고 있다. 그 피들은 과연 헛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멕시코는 지금도 혁명 중이다. 사파타의 뒤를 따른다는 사파티스타 반란군이 엄존하고, 기억이란 일종의 유전되는 문신과 같아서 세대와 세대를 가로지른다. <라 카쿠라차>는 멕시코 혁명기 농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라 카쿠라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멕시코 전통 복장에 차양 긴 모자를 쓴 농민군들의 행렬이 바퀴벌레같아 보인다는 뜻, 그리고 두 번째는 바퀴벌레처럼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오는 그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낸다는 뜻.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이제 다시 걸을 수 없어
더 이상 쓸 돈이 없기 때문에
뭔가가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 주네
그것은 바로 셔츠를 입지 않은 판쵸 비야
이미 까란사 (비야를 죽인 반혁명 지도자)의 군대들은 가버렸네
판쵸 비야의 군대들이 오고 있기 때문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수십 미터 고공에 올라갔다. 우리는 저들을 ‘바퀴벌레’가 아니라 ‘매미’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발 알아 달라고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달라고 고공에 매달린 매미. 그들에게 미소를 가져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디아스의 통치는 “혜택을 누리는 극소수에게 천국이었지만 토지를 빼앗긴 다수 국민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디아스라는 빽을 둔 대농장들과 외세의 자본은 해마다 풍년가와 해피송을 불렀지만 멕시코의 대다수 민중들은 죽도록 일해야 할 뿐이었다. 디아스라는 돌이 내리누르던 멕시코라는 솥단지 안의 물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마침내 그 뚜껑이 펑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날이 왔다. 1910년 11월 20일.
박정희 대통령도 유신 말미에는 몇 년 뒤엔 물러나서 영남대학 총장이나 할까보다 운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바로 이 디아스도 그랬다. 1908년 미국의 한 언론에 “이제 멕시코는 민주주의할 때가 됐다.”고 재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언명했던 것이다. 드디어 디아스 시대가 끝나는구나! 정치적 열기가 들끓고 새로운 희망들의 그림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디아스는 또 박정희처럼 마음을 바꾼다. “나 아니면 안돼!” 그리고 1910년의 재선거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그에게 결연히 맞선 이가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해외유학생 출신의 프란시스코 마데로였다. 그는 “재선반대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출마하고 재선 반대와 실질적인 참정권의 확립을 외친다. 그런데 디아스는 역시 박정희와 비슷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라이벌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데로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다. 그 뒤 가석방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지만 탈출하여 “산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발표한다.
“자유와 정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민중들,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요구할 역사적 순간 앞으로 끌려나왔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에서 그는 외세의 배제, 농지 개혁, 노동조건 개선을 소리 높여 주장한 마데로는 멕시코 인들에게 봉기의 날을 공표한다. 1910년 11월 20일 .
1910년 11월 20일 리오그란데에서 치아파스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북쪽의 농민군 지도자 판초 비야, 남쪽의 농민혁명군 수장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만데로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어났고 기타 지역에서도 소작민들의 봉기가 잇달아 디아스 정부군을 무찔렀다. 특히 1911년 5월 판초 비야의 농민군은 미국과의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후아레스 전투에서 정부군에 완승을 거둬 디아스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결국 디아스는 30년 정권에서 손을 떼고 망명길에 오르고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마데로는 대통령이 된 것이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개혁 앞에 우유부단했고 그가 외친 구호들을 구체화하는데 있어 달팽이처럼 행동했다. 토지개혁을 열렬히 부르짖던 사파타는 마데로를 떠났고 반혁명 세력은 그를 고립시켰다. 미국 대사 헨리 윌슨도 끈질기게 그 행로에 간섭하여 마데로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다. 마데로는 멕시코 사람들을 깨우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왜 자신이 그들을 깨웠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자멸해 갔다. 그는 반혁명 반란군과 내통한 자신의 국방부 장관에게 암살된다.
판초 비야는 마데로에게 감화받아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의용군은 디아스 퇴출의 결정적 공헌을 했다. 마데로는 그에게 보답하고자 그와 그 의용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키지만 정규군과의 갈등에 휘말려 마데로의 국방 장관 (마데로를 죽이는 바로 그)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다. 마데로가 죽은 뒤 그는 다시 의용군을 일으켜 멕시코 북부를 휩쓸고 다녔고 미국의 반혁명 세력 지원을 못마땅히 여겨 미국까지 공격한다. 후일 미국의 미사일 이름이 되는 퍼싱 장군은 이때 판초 비야를 잡겠다고 1만 대군을 몰고 헉헉거렸지만 판초 비야는 유유히 빠져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판초 비야는 멕시코인의 손에 암살당한다. 마데로의 우유부단함을 통탄하며 떠났던 에밀리아노 사파타도 반혁명 세력의 손에 암살당한다.
그들 뿐이 아니다. 1910년 11월 20일 이 이상의 압제와 불평등, 말이 안되는 착취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일어선 멕시코 민중들은 1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없고, 마데로가 바꾸자고 외쳤던 토지 제도는 한 세기가 흘러도 별 변화없이 멕시코 인민들을 옥죄고 있다. 그 피들은 과연 헛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멕시코는 지금도 혁명 중이다. 사파타의 뒤를 따른다는 사파티스타 반란군이 엄존하고, 기억이란 일종의 유전되는 문신과 같아서 세대와 세대를 가로지른다. <라 카쿠라차>는 멕시코 혁명기 농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바퀴벌레를 뜻하는 라 카쿠라차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멕시코 전통 복장에 차양 긴 모자를 쓴 농민군들의 행렬이 바퀴벌레같아 보인다는 뜻, 그리고 두 번째는 바퀴벌레처럼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오는 그 강인한 생명력을 나타낸다는 뜻.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이제 다시 걸을 수 없어
더 이상 쓸 돈이 없기 때문에
뭔가가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 주네
그것은 바로 셔츠를 입지 않은 판쵸 비야
이미 까란사 (비야를 죽인 반혁명 지도자)의 군대들은 가버렸네
판쵸 비야의 군대들이 오고 있기 때문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수십 미터 고공에 올라갔다. 우리는 저들을 ‘바퀴벌레’가 아니라 ‘매미’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제발 알아 달라고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달라고 고공에 매달린 매미. 그들에게 미소를 가져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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