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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21 IMF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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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1월 21일 IMF와 참 더럽게 착한 백성들 

내 초년의 기억이 박정희 ‘유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면 성년의 기억의 분수령은 결혼이나 취직 등등보다는 알파벳 세 개로 정리될 거 같다. IMF. 이 세 알파벳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한국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달라져 있었다.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대한민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한
국 경제의 푼더멘탈은 튼튼하다”고 우겼던 푼수 비슷한 부총리는 경질됐고 며칠 전 한국이 IMF에서 수백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신청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에 사실무근이라며 강력히 반발하던 한국 정부는 결국 IMF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그 밤 임창렬 부총리의 상기된 얼굴과 경직된 목소리는 기억에 생생하다. 연초부터 한보가 부도나고 진로가 무너지고 해태가 나가떨어지고 기아마저 붕괴되는 연쇄 부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 불안 하면서도 그래도 뭔 일이 나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겠지 마음 추스르던 한국의 서민들 위로 별 구멍이 없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임창렬 부총리의 담화문의 일부를 다시 들어본다. “IMF는 과감하고 강도 높은 개혁 조치를 주문했고 정부는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속도의 개혁과 구조조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 이러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가안정과 국제 수지를 위한 긴축 재정 정책으로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성장률 하락으로 실업이 늘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부담은 위기에서 회생하기 위한 비용이자 국제 사회의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댓가입니다.”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직장마다 회사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달아났고, 수십 년 몸 바쳐온 회사에서 내동댕이쳐졌고, 월급이 깎이고 무급 휴직이 돌아가며 시행됐으며 숱한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들은 새로운 험로를 모색해야 했고 그 살얼음판을 걷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벼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 기억해야 할 것. 솔직히 한국 사람보다 일을 열심히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주관적인 평가다) 그리스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며 시위를 벌였다. 화염병이 날았고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으며 자신들에게 가해질 ‘고통과 부담’에 저항했다. 그것의 정당성을 찬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IMF를 맞는 우리의 자세”가 너무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온순했다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다. 

“과장님 (사장님 기사)이 인사를 오셨어. 사장님을 20년 모신 분이고 기사만 한 게 아니라 회사 관리직도 함께 하셨어. 몇년 동안 나보다 늦게 오신 적 한 번도 없었고 빨리 가신 적 한 번도 없었어. 그분이 잘들 지내라고 인사를 하시는데 눈물이 났어. 사장님도 속이 안좋으셨는지 나와 보시지도 않았어. 여직원들 다 우는데 그분은 웃으셨어.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울지들 말라고.” 눈이 빨개져서 왔던 아내의 푸념이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정든 직장에서 내팽개쳐지면서도 의연히 웃었다. 웃지 못하더라도 당시 제일은행 직원들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남은 분들의 건투와 우리 은행의 건승”을 기원하면서 비디오를 찍었다. 누가 이 사태를 불러왔는지,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항의는 실종됐다. 종교적 의미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는 고백은 거룩하지만 사회적으로 그 고백이 강요될 때 그것은 죄악이다. 그것도 가장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지워지는 상황에서는. 외환 위기의 시발점이라 할 한보 사태에서 “머슴이 뭘 알겠습니까?”라고 뇌까리던 정태수같은 개새끼들은 그래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죽을 힘을 다해 그 곳간을 채워 주던 머슴들은 “나만 그런가 뭐.” 하면서 물러섰다. 

그뿐인가. 그 외환 위기를 극복해 보겠다고 사람들은 금모으기에 나선다. 애들 돌반지에 결혼 반지, 시어머니가 남겨주신 패물까지 장롱을 박박 긁은 금을 들고 사람들은 은행 앞에 장사진을 쳤다. 100년 전 국채보상운동 때 거지가 동냥 받은 돈을 보태고 기생들이 웃음과 몸 팔아 번 돈을 바치던 그 유전자는 참으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다. 물론 국채보상운동 당시 참여가 극히 미미했던 고관대작들, “그걸 해서 뭘 하겠냐? 바보들”이라며 비웃던 약삭빠른 사람들의 유전자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금모으기 실적이 가장 부진했던 것은 서울 강남이었다. 그뿐인가. 이 금을 모아 수출하는 업무를 맡았던 재벌들의 행태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 금 수출업무를 맡은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이 금모으기운동이 한창인 때에도 금을 수입해 팔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금을 수출한 해외업체로부터 수출가격보다 0.2∼0.5% 높은 값으로 사들였다. 올해 들어 지난 4월 말까지 대우·현대·LG 등 7대 종합상사들이 수입한 금은 약 10억달러에 이른다. 1월과 2월 각각 7천5백만달러, 1억1천만달러, 3월 3억9천6백만달러였다. 4월에도 (주)대우가 2억6천만달러, 현대종합상사 6천1백만달러, LG종합상사 5천7백만달러, 삼성물산 6백만달러 등이 약 4억달러의 금을 수입했다. 

이들이 금 수입을 위해 도입하는 무역신용은 월 3억∼4억달러에 이른다. 이를 통해 연이율 11∼12%에 6개월까지 외상거래를 한다. 반면 금을 수출하면 바로 달러를 손에 쥘 수 있고 이를 원화로 바꿔 국내 금융기관의 고금리 금융상품에 투자하면 적지 않은 이자수익을 낼 수 있다. 해외업체들로서는 종합상사들에 비싼값에 팔았다가 싼값에 되사들이는 셈이다.“ (한겨레21 - 조준상 기자) 

도대체 왜 이렇게 착한 것인가. 왜 이렇게 더럽게 착한 것인가. 다산 정약용은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어 말도 안되는 군포(軍布) 즉 병역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던 한 가족의 처지를 고발했었다. 배냇물도 안 마른 갓난 아이에게 군포가 부과되자 이에 분을 못이긴 남자는 자기 성기를 잘라 버린다. ...... 磨刀入房血滿席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왜 그는 자기 성기를 잘라 버리기 전에 동네 사또를 죽이지 못했을까. 안되면 고을 아전이라도 목을 따지 못했을까. 자기 성기를 자를 때 자르더라도 왜 그 칼을 밖으로 겨누지 못했을까. 왜 “아이 낳은 죄”를 자신에게 돌려야 했을까. 왜 자기 물건 잘라 아내가 땅을 치고 통곡하게 만들어야 했을까. 참다 참다 못해 일어난 민란에서도 그랬다. 아전들은 죽이고 불에 던지고 때려 죽이면서도 사또를 죽이지는 못했다. 욕보이고 엉덩이를 차서 쫓아낼지언정 죽이지는 못했다. 임오군란 때 왕비를 죽이자고 궁궐을 범한 막가는 인생들도 왕은 어쩌지 않았다. 갑오농민전쟁의 슬로건도 결국은 “보국안민”이었고 탐관오리들을 미워했으되 그 우두머리인 왕한테는 별반 시비를 걸지 못했다. 결국 IMF 때도 그랬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당연히 잘려야 하는 줄로 알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사가 잘되기를 빌었고, 그리스처럼 시위는 커녕 양순하고 공손하게 그 ‘고통’을 감내했다. 나는 가끔 이 더럽게 착한 유전자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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