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이야기
효율적인 침탈과 중국 침략을 용도로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의 끝과 끝을 철도로 거미줄처럼 이어 놓았다. 우리가 아는 철도 이름 거개가 일제 시대 놓여진 것이고 그 철도를 타고 무수한 쌀과 자원이 일본으로 갔고 수없는 이들이 보따리 짊어지고 압록강 넘어 만주로 갔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철도, 즉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 등의 시발지 역할을 ...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이야기
효율적인 침탈과 중국 침략을 용도로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의 끝과 끝을 철도로 거미줄처럼 이어 놓았다. 우리가 아는 철도 이름 거개가 일제 시대 놓여진 것이고 그 철도를 타고 무수한 쌀과 자원이 일본으로 갔고 수없는 이들이 보따리 짊어지고 압록강 넘어 만주로 갔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철도, 즉 경원선, 경춘선, 중앙선 등의 시발지 역할을 ...
한 역이 청량리역이었다. 원래는 1911년 ‘보통역’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고 ‘동경성역’으로 불리우다가 ‘청량리역’의 명칭을 획득한 것이 1942년. 그런데 6.25 때 청량리역사는 전쟁통에 불타 버린다. 최대 규모의 서울역은 용케 온전했는데 청량리역은 전화를 입은 것이다. (이 사나운 팔자를 기억해 두자)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역사가 다시 재건됐다. 성대한 기념식을 치르고 만장하신 내빈의 박수 속에 역사에 기적 소리 울리며 들어온 건 좋았지만 청량리 역의 팔자는 역시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석유 난방이 도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의 난방 재료는 무조건 석탄이었다. 강원도 일대에서 광부들이 캐낸 석탄은 화물 열차에 실려 청량리역으로 실려왔다. 그런데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지긋지긋하게 못살던 시절, 이 석탄열차를 두고 가히 미국 서부의 무법시대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일이 잦았다. 1960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에 묘사된 풍경을 정리해 본다.
밤 열한시경 석탄을 가득 실은 열차가 청량리 역에 들어오면 한 손에는 부삽, 한손에는 쇠갈퀴를 든 수십 명의 청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열차가 속도를 늦추면 일제히 달려들어 쇠갈퀴를 휘둘러 열차 옆문을 따고 탄을 퍼가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사탕에 개미 꾀듯이 수백 명이 달라붙어 캐낸 탄은 또 그 위에서 대기 중인 수백 명의 아주머니들의 푸대자루로 들어가고 밀거래는 순식간에 끝난다. 그렇게 없어지는 석탄이 연간 1만톤쯤 됐다고 한다. 부족한 나라는 자신의 석탄을 지킬 힘도 없었다. 경비원이라고 해야 2-3명. 괜히 호루라기 불고 달려들었다가 몰매맞기 십상이었고 작심을 하고 경비 중이던 청량리 경찰서 형사가 총을 쏘며 맞섰지만 석탄 도둑들은 돌팔매로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기사 그들에게도 이 일은 밥줄이었을 것이다.
피해는 석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군수물자도 공격을 받았고 어떤 간 큰 도둑들은 아예 열차를 멈추고 물건을 털어가는 대열차강도 흉내를 내기도 했다. 보다못한 당국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철로변에 담이 없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하기에 절도가 기승을 부린다고 판단, 철로변에 장벽을 쌓은 것이다. 효과는 탁월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 도둑으로 끼니를 잇던 주민들이 먹고 살게 해 달라며 아우성을 친 것이다. 석탄공사 청량리 출장소장, 청량리경찰서장, 청량리역장, 등이 총동원돼 대책회의가 열리기까지 했다.
한 번 불바다를 이뤘고 불을 때는 석탄의 종착지였던 청량리역이라 그런가 이 지역은 또 유난히 불과 인연이 많았다. 지금 롯데마트가 되어 있는 바로 그 건물은 과거 대왕코너라는 일종의 종합 유흥 건물이었다, 극장도 있고 술집도 있고 분식집도 있고 심지어 나이트 클럽도 있었던. 이 대왕코너에서는 화재가 3번이나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74년의 화재는 끔찍했다. 72년의 화재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화마는 무서운 채찍을 휘두른다. 최악의 희생은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했다. 화재로 인해 별안간 불이 나가자 일부에서는 “키스타임!”이라고 환호가 나오기까지 했지만 곧 분위기는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때 이성을 유지(?)했던 건 종업원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그때도 돈 내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유일한 출입문이었던 회전문은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기동 불능이 됐고 88 명이 죽었다. 이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도 다음 해 대왕코너에서는 또 불이 났고 대왕코너 철거 후 지어닌 맘모스 호텔에서도, 그 뒤를 이은 롯데 백화점에서도 화재가 연속해서 났다. 오죽하면 롯데 측이 대개 내거는 붉은빛 차양들을 치우고 청록색으로 대신했을까.
그렇게 화기(火氣)가 강한 청량리역이지만 동시에 그 역은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들을 지닌 젊은이들을 동해 바다로 실어 날랐던 소방 기차의 출발 역이기도 했다. 실연을 당하고 또는 시대와 불화하여 상처를 입고, 응어리진 마음들을 토해 버려는 청춘들이 기타 하나 동전 몇 닢 챙겨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를 부르짖으며 만난 곳이 바로 청량리 시계탑 역이었고, 해마다 봄철이면 강촌이나 대성리의 민박집을 향하여 대규모로 출정(?)하던 젊은 MT 군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청량리역은 군부대 많은 강원도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이별의 현장이었고 청량리 역전에는 애인을 군대에 보내고 눈물 짓는 젊은 여성들의 긴 그림자가 끊이지 않았었다.
사연많은 구 역사는 민자역사가 도입되었을 때 한켠으로 밀려났다가 2007년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아울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588 번지에 있다 하여 588이라 불리우던 사창가도 사라졌다. 1959년에서 2007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구석을 들여다봤던 청량리 역사는 수많은 사연과 슬픔을 안고서 이제 추억 속에서만 건재하다.
1959년 11월 6일 청량리 역 역사가 다시 재건됐다. 성대한 기념식을 치르고 만장하신 내빈의 박수 속에 역사에 기적 소리 울리며 들어온 건 좋았지만 청량리 역의 팔자는 역시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다. 석유 난방이 도입되기 이전 우리나라의 난방 재료는 무조건 석탄이었다. 강원도 일대에서 광부들이 캐낸 석탄은 화물 열차에 실려 청량리역으로 실려왔다. 그런데 정말이지 대한민국이 지긋지긋하게 못살던 시절, 이 석탄열차를 두고 가히 미국 서부의 무법시대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일이 잦았다. 1960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에 묘사된 풍경을 정리해 본다.
밤 열한시경 석탄을 가득 실은 열차가 청량리 역에 들어오면 한 손에는 부삽, 한손에는 쇠갈퀴를 든 수십 명의 청년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열차가 속도를 늦추면 일제히 달려들어 쇠갈퀴를 휘둘러 열차 옆문을 따고 탄을 퍼가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사탕에 개미 꾀듯이 수백 명이 달라붙어 캐낸 탄은 또 그 위에서 대기 중인 수백 명의 아주머니들의 푸대자루로 들어가고 밀거래는 순식간에 끝난다. 그렇게 없어지는 석탄이 연간 1만톤쯤 됐다고 한다. 부족한 나라는 자신의 석탄을 지킬 힘도 없었다. 경비원이라고 해야 2-3명. 괜히 호루라기 불고 달려들었다가 몰매맞기 십상이었고 작심을 하고 경비 중이던 청량리 경찰서 형사가 총을 쏘며 맞섰지만 석탄 도둑들은 돌팔매로 맞서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기사 그들에게도 이 일은 밥줄이었을 것이다.
피해는 석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군수물자도 공격을 받았고 어떤 간 큰 도둑들은 아예 열차를 멈추고 물건을 털어가는 대열차강도 흉내를 내기도 했다. 보다못한 당국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철로변에 담이 없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하기에 절도가 기승을 부린다고 판단, 철로변에 장벽을 쌓은 것이다. 효과는 탁월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 도둑으로 끼니를 잇던 주민들이 먹고 살게 해 달라며 아우성을 친 것이다. 석탄공사 청량리 출장소장, 청량리경찰서장, 청량리역장, 등이 총동원돼 대책회의가 열리기까지 했다.
한 번 불바다를 이뤘고 불을 때는 석탄의 종착지였던 청량리역이라 그런가 이 지역은 또 유난히 불과 인연이 많았다. 지금 롯데마트가 되어 있는 바로 그 건물은 과거 대왕코너라는 일종의 종합 유흥 건물이었다, 극장도 있고 술집도 있고 분식집도 있고 심지어 나이트 클럽도 있었던. 이 대왕코너에서는 화재가 3번이나 발생한다. 그 중에서도 74년의 화재는 끔찍했다. 72년의 화재를 경험했지만 여전히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화마는 무서운 채찍을 휘두른다. 최악의 희생은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했다. 화재로 인해 별안간 불이 나가자 일부에서는 “키스타임!”이라고 환호가 나오기까지 했지만 곧 분위기는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때 이성을 유지(?)했던 건 종업원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그때도 돈 내고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유일한 출입문이었던 회전문은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기동 불능이 됐고 88 명이 죽었다. 이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도 다음 해 대왕코너에서는 또 불이 났고 대왕코너 철거 후 지어닌 맘모스 호텔에서도, 그 뒤를 이은 롯데 백화점에서도 화재가 연속해서 났다. 오죽하면 롯데 측이 대개 내거는 붉은빛 차양들을 치우고 청록색으로 대신했을까.
그렇게 화기(火氣)가 강한 청량리역이지만 동시에 그 역은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덩이들을 지닌 젊은이들을 동해 바다로 실어 날랐던 소방 기차의 출발 역이기도 했다. 실연을 당하고 또는 시대와 불화하여 상처를 입고, 응어리진 마음들을 토해 버려는 청춘들이 기타 하나 동전 몇 닢 챙겨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를 부르짖으며 만난 곳이 바로 청량리 시계탑 역이었고, 해마다 봄철이면 강촌이나 대성리의 민박집을 향하여 대규모로 출정(?)하던 젊은 MT 군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청량리역은 군부대 많은 강원도로 향하는 젊은이들의 이별의 현장이었고 청량리 역전에는 애인을 군대에 보내고 눈물 짓는 젊은 여성들의 긴 그림자가 끊이지 않았었다.
사연많은 구 역사는 민자역사가 도입되었을 때 한켠으로 밀려났다가 2007년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아울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588 번지에 있다 하여 588이라 불리우던 사창가도 사라졌다. 1959년에서 2007년까지 한국 현대사의 구석을 들여다봤던 청량리 역사는 수많은 사연과 슬픔을 안고서 이제 추억 속에서만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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